<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 스틸컷

<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 스틸컷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한국인의 평균 수명이 83세를 넘긴 지금, 당신에게 '여든 살 이후의 삶은 어떨 것 같냐'고 묻는다면 어떨까? 1937년생, 여든 다섯의 영화감독 리들리 스콧은 여전히 현역이다. 지난해 10월 중세 역사물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이하 '라스트 듀얼')를 내놓았고, 한 달 만에 레이디 가가 주연의 <하우스 오브 구찌>를 내놓았다. 기복이 있긴 하지만, 그는 수십년 째 무엇이든 찍고, 어떤 이야기든 다루고자 하는 모험가다.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고대 대서사시, <에일리언>에 그려진 공포의 우주, <델마와 루이스>같은 페미니즘 버디 무비까지. 모두 그가 구축한 세계다.

리들리 스콧은 <라스트 듀얼>을 '자신이 만든 최고의 영화 중 하나'라고 자부했다. 그리고 처참한 흥행 실패를 마주해야만 했다. 1억 달러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되었지만, 흥행 수익은 손익분기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 하는 3천만 달러 남짓에 그쳤다. 스콧은 이 실패에 대해,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밀레니얼 세대를 탓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얼마전 디즈니 플러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더 많은 청년들이 작품을 스마트폰으로 만날 수 있는 계기가 생긴 것이다.

결국 진실은 한 가지 뿐이다
 
 <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 스틸컷

<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 스틸컷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14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시대의 프랑스, 절친한 전우였던 장 드 카루주(맷 데이먼 분)와 자크 르 그리(애덤 드라이버)는 여러 가지 이해 관계 때문에 갈라진다. 그리고 어느날 장이 집을 떠나 있는 동안, 자크는 장의 집으로 찾아가 장의 아내인 마르그리트(조디 코머)를 강간한다. 자크는 '우리는 사랑에 무력했을 뿐'이라며 악행을 낭만화한다.

마르그리트는 불합리를 참을 수 없어 피해 사실을 공론화한다. 장과 자크는 결투 재판으로 모든 것을 하늘에 맡기게 된다. 이때 펼쳐진 프랑스 역사상 마지막 결투 재판이 주제다. 중세의 결투 재판은 증거가 부족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당사자가 공인된 결투를 치르는 과정이다. 패자에게는 하늘의 심판이 내려진 것이라고 간주된다. 장 드 카루주가 패하게 된다면, 피해자인 마르그리트 역시 무고죄로 화형을 당하게 된다. 시대의 총체적인 불합리에는 속시원한 서사도,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될 여지도 주어지지 않는다.

<라스트 듀얼>은 <라쇼몽>(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향권에 있다. 똑같은 사건을 세 인물의 서로 다른 시각에서 접근하면서 풀어나간다. 장 드 카루주의 진실, 자크 르 그리의 진실, 그리고 마르그리트의 진실이 존재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진실'이라고 명명하는 장면은 3부 '마르그리트의 진실' 뿐이다. 두 남자의 기억 속에서 낭만화된 스스로의 모습은 3부에서 숨겨진 야만성을 드러낸다.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도 문화의 갑옷 속에는 폭력적인 남성성이 숨어 있다. 난봉꾼 자크 뿐 아니라, 고결한 기사인 장 드 카루주 조차도 여러 차례 가부장의 폭력성을 드러낸다. 장 드 카루주의 어머니는 "옮음 따윈 없어. 사내들만의 권력만이 존재할 뿐이지"라고 말한다. 시대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사도의 명예는 무엇을 밟고 올라선 것일까?

세 개의 파트에 걸쳐 같은 장면이 반복되고 있지만,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 뉘앙스의 차이가 작품의 핵심이다. 음악과 카메라 구도, 대사의 톤 등을 통해 인간이 인식하는 진실이 천 갈래 나뉠 수 있음을 묘사한다. 그러나 가변적이며 상대적인 듯한 진실은 결국 한 가지로 귀결된다.

'미투' 시대가 낳은 중세 영화
   
 <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 스틸컷

<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 > 스틸컷 ⓒ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리들리 스콧은 21세기의 이야기에 중세의 갑옷 외피를 입혔다. 600여년 전의 이야기지만, 이곳에도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크가 "숙녀였기에 의례적인 반항은 있었다"라며 행위를 합리화하는 모습에도 기시감이 느껴진다.

"강간은 여성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그 남편에 대한 재산 침해다"라는 성직자의 대사는 이 시대의 속성을 요약한다. 역사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던 시절, 생존자 마르그리트는 존엄을 외친다. <라스트 듀얼>은 2010년대 후반 미투 시대의 영향권에 있다. 오래전부터 페미니즘적 접근을 해온 리들리 스콧이 시대와 영민하게 호흡한 결과물이다.

맷 데이먼, 그리고 영주 피에르를 연기한 벤 애플렉은 각본 작업에도 참여했다. 남성중심적 시각에서 서술된 1,2부는 그들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 듀오의 공동 작업은 <굿 윌 헌팅> 이후 24년 만이다. 두 사람이 과거 성추행 가해자 케이시 애플렉을 비호했다가 비난받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편견을 고백하자면, 나는 중세 서사를 선호하지 않는다. 과학과 이성보다 종교가 강조되는 시대였고, 인간이 불합리하게 다뤄지는 '암흑 시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라스트 듀얼>은 이 전근대성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마르그리트 개인의 고통이 시대의 야만과 만나면서, 이야기는 더욱 힘이 세진다. 현대가 중세성으로부터 탈출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씁쓸함도 함께 남는다. 영화 속 두 기사들은 자신이 믿는 진실을 위해 처절하게 싸우지만, 왜곡으로 점철된 그들의 영지에 진실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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