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나와 생각과 사상이 다르고 (성·인종 등) 정체성이 다르면 이 세상에서 나와 함께 살 가치가 없는가?" 이렇게 물을 때 맨 정신으로 "예"라고 태연히 대답할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질문을 좀 바꾸어보자. "나와 생각과 사상이 다르고 (성·인종 등)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 때문에 내가 고통받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감정이 좀 복잡해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1999년 런던 테러: 네일 보머의 진실(아래, 네일보머의 진실)>은 바로 위의 질문 "고통받고 있는가?"에 대해서 (개인의 주체적 판단이 아니라 집단적 정서에 편승해) "예"라고 응답한 어떤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1990년대 영국에 '나와 다른 사람들'을 향한 극도의 불편감, 좌절감, 패배감을 느끼는 사람들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인종말살정책을 구조적·체계적(?)으로 시행했던 히틀러의 나치를 추종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극우정당 BNP(브리튼국민당)의 집회에 참석했으며, 자기들의 심란한 마음을 읽어주고 억울한 감정을 오냐오냐 알아주는 극우 정치적 선동에 기꺼이 휘말려들었다. 
 
BNP 집회에서 백인 청년들은 '고통받는다'는 자기 감정을 집단적으로 정당화했다. 생각과 사상과 성&인종 정체성이 나와 다른 사람들이 내 고통의 원흉이라는 생각을 집단적으로 공유했다. 원인과 결과를 엉성하게 연결한 것이었지만, BNP 집회에서는 차분히 그걸 따져볼 마음의 여유를 낼 수 없었다. 흡족한 직장도 없고 다정한 친구도 없이 지내던 젊은이들이 갑자기 무리로 모여 서로를 바라보니 열등감과 소외감이 커지면서 고통도 커져갔다. 나에게 고통이란 건 없을수록 좋다는 이기적 욕망은 고통에 대한 분노로 상승되며 타인들을 향해 발사됐다. 분노는 곧 폭력으로 나아갔고, 그들은 폭도가 되어갔다.  
 
분노
 
BNP 집회 참석자들은 당시 극우 정치인이자 BNP의 당수 존 틴들(John Tyndall)이 자기들의 분노와 폭력을 정당화해준다고 믿었다. 자기들의 분노와 폭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준다고 느꼈다. 취업 및 부의 축적에서 실패와 패배의 경험을 전연 공유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집회 뒤의 폭력사태에도 거의 수수방관하기만 하는 극우 정치인 틴들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는 별로 비판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흥분된 상태에서 나치 깃발을 들고 길거리로 나가 과격한 시위를 벌였고, 행인들을 위협했고, 나아가 행인들을 붙잡아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 때로 자기들끼리 부딪혀 피를 볼 때까지 싸우기도 했고, 그들의 시위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영화 스틸컷 <네일보머의 진실>

▲ 영화 스틸컷 <네일보머의 진실> ⓒ 넷플릭스

 

BNP 집회에 열렬히 참석했던 젊은이들 중에서 '네일보머(nail bomber)'가 탄생했다. '네일봄(nail bomb)'은 '못폭탄'이란 뜻이다. 못폭탄을 제작하고 폭파시킨 사람, 즉 네일보머는 당시 스물두 살의 백인남성 데이빗이었다. 데이빗은 체포됐을 때 자신을 서슴없이 자랑스럽게 '나치'로 소개했다. 그는 타인종이 혐오스럽고, 동성애자가 혐오스럽다고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또 폭탄 테러를 저지른 이유를 '영국사회에 공포와 분노와 혐오를 퍼뜨리기 위해서'라고 태연히 진술했다. 아니, 공포와 분노와 혐오를 퍼뜨려서 뭘 어쩌자고? 
 
그런데 데이빗에겐 딱히 목표란 게 없었다. 테러를 저지르면서 심지어 그는 체포되고 싶어했고, 재판을 받으면서 그는 정신질환에 의한 심신미약을 근거로 해서 무죄방면 선고를 받고 싶어했다. 모순된 의도와 지향이 그의 정신 안에서 '이기심(모든 게 나에게 이롭게 되어야 한다)'을 중심으로 얼기설기 봉합되어 있었다. 
 
자랑
 
재판에서 데이빗은 6회 종신형 선고를 받았다. 윤회나 부활도 없이 한 번 사는 인생에게 여섯 번의 종신형이라니! 한 번의 종신형 외에는 그 모든 선고를 이행할 능력이 데이빗에게 있을 리 없다. 데이빗을 재판한 재판부는 그만큼 그의 죄(혐오범죄)가 막중하다는 뜻을 영국사회에 제대로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끈한 형벌, 본때를 보인 형량이다. 
 
그런데 재판의 와중에 데이빗은 유죄를 피하고자, 자기가 정신적 문제를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전면에 내세웠다. 하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멀쩡한 정신상태인 사람이 자신과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까지 과도하게 혐오하긴 어려워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멀쩡한 정신상태인 사람이 못폭탄을 가방에 넣고 자기가 혐오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에 버젓이 갖다놓고 태연히 돌아나오기는 어렵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그렇다는 거다. 게다가, 못폭탄 속에 오염된 쥐에게서 채취한 물질을 묻혀놓기까지 했다니, 사람이 어찌 이다지도 잔혹할 수 있나 싶은 마음도 든다. 두뇌에 무슨 치명적 오류가 발생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데이빗은 자기에게 정신질환이 있다고 핑계를 대서, 심신의 미약함을 이유로 유죄를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그는 영악했다. 
 
데이빗의 문제는 두뇌에 있지 않았다. 정신에 있지 않았다. 그의 두뇌와 정신에는 아무런 이상징후가 없었다. 재판받으며 수감되어있을 때 매력적인 여성(가상인물)과의 편지 교류에서 데이빗은 자신의 정신상태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진술했다. 가상인물인 줄도 모르고 편지를 주고받던 데이빗은 여성 앞에서 몹시 우쭐해져서 자신을 검진한 의사들을 성공적으로 속였다고 자랑했다. 그의 치기어린 자랑 때문에 데이빗은 6회 종신형을 확정받았다. 
 
세뇌
 
데이빗의 이야기 옆으로, 다큐멘터리 <네일보머의 진실>은 데이빗의 체포에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는 또다른 이야기(behind story)를 들려준다. 숨은 공로자는 영화 안에서 자신의 얼굴을 철저히 숨긴다. 얼굴을 전연 알아볼 수 없게 화면처리를 했다. 
 
이 숨은 공로자는 '아더(Arthur)'로 불리우는데, 그는 1999년 즈음 BNP에 잠입해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그들의 범죄에 짐짓 동조하며, 그들의 범죄를 수사했다. 스파이 활동을 했던 거다. 그가 워낙 비밀리에 성공적으로 활동했기에 심지어 그의 가족들도 그를 나치주의자로 오래도록(20년간) 오해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더는 사건 당시 수사관들에게 데이빗을 명확히 지명했고, 그 바람에 수사관들은 데이빗의 집을 급습할 수 있었고, 결국 데이빗을 체포할 수 있었다. 
 
영화 중반쯤 아더는 자기가 인종차별주의자들 틈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논리를 반복해서 듣는 동안 '정말 그런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그들의 논리를 자꾸 들으니 세뇌되는 것 같았다는 고백이다. 나중엔 "홀로코스트가 진짜 있었을까?"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는 것. 
 
영화 스틸컷 <네일보머의 진실>

▲ 영화 스틸컷 <네일보머의 진실> ⓒ 넷플릭스

 
세뇌는 듣는 사람(들)에게 우호적으로 다가가, 그 사람에게 유리한 쪽으로 사회현상들을 풀이하면서 그 사람의 이기성을 환시키신다. 그리고 천천히 그 마음을 잠식해나가는 것이 아닐까. 

<네일보머의 진실>을 보면 데이빗이 어떻게 자신의 이기심을 확장시켜갔는지 알 수 있다. 반면, 아더가 자칫 확장되려는 이기심을 '공동체의식'으로 극복해내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보여준다. 이 두 젊은이들의 상반된 사례를 보여줌으로써 <네일보머의 진실>은 세뇌의 메카니즘 한 자락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영화 포스터 <네일보머의 진실>

▲ 영화 포스터 <네일보머의 진실> ⓒ 넷플릭스

 
네일보머의 진실 런던 테러 다큐멘터리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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