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와 연출 영역을 엄격하게 구분하며 '연기 외길인생'을 고집하는 배우들도 적지 않지만 영화가 촬영되는 현장에 오래 머무르는 배우들은 누구보다 영화의 제작 환경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배우들은 현장에서 감독과 의견이 엇갈릴 때 '만약 내가 감독이었다면 이 장면을 이렇게 연출 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하고 실제로 현장에서 감독에게 의견을 내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때때로 배우들의 연출도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마이 라띠마>의 유지태와 <허삼관>의 하정우, <미성년>의 김윤석, <톱스타>의 박중훈, <사라진 시간>의 정진영, <여배우는 오늘도>의 문소리 등 많은 배우들이 감독으로 변신해 연출에 도전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흥행에 성공을 거둔 배우 출신 감독은 찾기 힘들다. 이것은 배우 출신 감독들의 흥행감각 부족 때문일 수도 있고 관객들의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으며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할리우드에는 <흐르는 강물처럼>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아이언맨>의 존 파브로, <쥬랜더>의 벤 스틸러, <아르고>의 벤 애플릭처럼 감독을 겸하면서 대중적으로도 성공한 배우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할리우드가 인정하는 최고의 감독 겸 배우는 따로 있다. 젊은 시절에는 서부영화의 아이콘으로 군림하다가 감독 데뷔 후에도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 주인공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국내에서도 2005년에 개봉했다가 12년이 지난 2017년에 재개봉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국내에서도 2005년에 개봉했다가 12년이 지난 2017년에 재개봉했다. ⓒ (주)노바미디어

 
카데미 2회 수상에 빛나는 감독 겸 배우

1950년대부터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스트우드는 60년대 세르조 레오네 감독과 함께 한 '무법자 3부작' <황야의 무법자>,<석양의 건맨>,<석양의 무법자>를 차례로 히트시키며 스타배우로 떠올랐다. 6~70년대 미국 서부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부영화의 아이콘'으로 군림하던 이스트우드는 1971년 스릴러 영화<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70년대 <평원의 무법자>,<무법자 조시 웰즈>,<건틀릿> 등을 연출하며 자신의 영화적 스승이었던 레오네 감독의 뒤를 따르던 이스트우드는 1988년 <버드>를 통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오르며 감독으로 능력을 인정 받았다. 그리고 1992년 '서부영화의 장인'으로서 그 동안 자신이 연기했던 무법자 캐릭터를 재해석한 <용서 받지 못한 자>에서 감독과 주연을 맡으며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휩쓸었다.

이스트우드는 1993년 <퍼펙트 월드>에 이어 1995년에는 메릴 스트립과 아름다운 중년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연출과 주연을 맡으며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한 존재감을 발휘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선보인 <트루 크라임>과 <스페이스 카우보이>, <블러드 워크> 등이 다소 아쉬운 성적을 남기며 이스트우드의 시대가 저무는 듯 했다.

하지만 이스트우드는 2004년 노년의 복싱트레이너와 여성 복서지망생의 이야기를 다룬 필생의 역작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만들며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3000만 달러의 많지 않은 제작비로 만든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세계적으로 2억16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그리고 이듬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이상 클린트 이스트우드),여우주연상(힐러리 스왱크),남우조연상(모건 프리먼)을 휩쓸었다.

이스트우드는 2008년 안젤리나 졸리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려놓은 <체인질링>과 2개의 해외 영화제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그랜 토리노>를 연출했다. 2015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아메리칸 스나이퍼> 역시 팔순이 넘은 나이에 연출했던 '감독' 이스트우드의 대표적이다. 이제 어느덧 90세를 훌쩍 넘겼지만 이스트우드는 작년에도 신작 <크라이 마초>의 감독과 주연을 맡으며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복싱영화의 탈을 쓴 가슴 시린 휴먼 드라마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주역 3명은 200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모두 트로피를 차지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주역 3명은 200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모두 트로피를 차지했다. ⓒ (주)노바미디어

 
글러브를 낀 여성복서가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포스터만 보고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록키>의 여성버전' 같은 가난한 여성복서의 성공스토리 정도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딸과 결별한 노년의 복싱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 분)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읜 복서 지망생 매기(힐러리 스왱크 분)가 서로를 통해 결별한 딸과 돌아가신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하는 휴먼 드라마다.

이미 1992년작 <용서 받지 못한 자>를 통해 한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는 이스트우드와 모건 프리먼은 이번에도 복싱 체육관의 트레이너와 시설관리자로 좋은 연기호흡을 자랑했다. 하지만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가장 빛나는 배우는 역시 매기 역의 힐러리 스왱크였다. 이미 2000년 <소년은 울지 않는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스왱크는 5년 후 <밀리언 달러 베이비>를 통해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트로피를 차지했다.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등장하는 단어는 바로 게일어(중세 아일랜드어에서 갈라져 나온 언어)인 '모쿠슈라'였다. 프랭키는 해외원정경기를 온 매기에게 입혀주는 가운에 모쿠슈라라는 단어를 새겼고 이는 곧 매기의 링네임이 된다. 프랭키는 매기의 질문에도 끝까지 모쿠슈라의 뜻을 알려주지 않다가 그녀와 작별 인사를 나누면서 "나의 소중한.. 나의 혈육"이라는 단어의 뜻을 매기에게 알려준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프랭키가 직접 매기의 산소 호흡기를 떼는 결말 때문에 일각에서는 '환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영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스트우드는 "내가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이는 영화를 찍었다고 해서 관객들에게 살인을 하라는 건 아니다"라며 비판적인 시선에 일침을 날렸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매기의 죽음은 프랭키나 의사의 결정이 아닌 언제나 치열한 인생을 살아온 매기가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F.X.툴이라는 필명을 쓴 권투매니저 겸 컷맨(지혈전문가) 출신 작가 제리 보이드가 쓴 모음집 <로프 번스: 코너에서 펼쳐진 이야기> 중 하나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 프랭키처럼 원작자인 보이드 역시 평생 풍족하지 못한 인생을 살다가 자신의 책이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어벤저스> 팔콘이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
 
 <어벤저스>에서 팔콘을 연기했던 안소니 마키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후배를 괴롭히는 악역을 맡았다.

<어벤저스>에서 팔콘을 연기했던 안소니 마키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후배를 괴롭히는 악역을 맡았다. ⓒ (주)노바미디어

 
모건 프리먼이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뛰어난 배우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관객은 많지 않다. 하지만 1988년 <스트리트 스마트>를 통해 처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던 프리먼은 1990년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1995년 <쇼생크 탈출>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3번이나 올랐음에도 한 번도 수상하지 못했다. 따라서 프리먼에게 첫 아카데미 트로피(남우조연상)를 안긴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더욱 의미 있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프리먼은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현역 시절 프랭키의 만류에도 경기를 강행하다가 KO로 패한 후 한 쪽 시력을 잃고 프랭키가 운영하는 체육관의 시설을 관리하는 스크랩을 연기했다. 생각 없이 샌드백만 두드리던 매기에게 처음으로 복싱의 기본자세를 알려 준 인물이기도 하다. 109경기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던 스크랩은 막내 수강생 데인저(제이 바루첼 분)을 괴롭히는 쇼렐리(안소니 마키 분)를 쓰러트리며 110번째 경기를 채웠다.

프랭키가 운영하는 체육관의 유망주 쇼렐리는 거만한 성격으로 후배 데인저를 무시하고 괴롭힌다. 데인저에 대한 괴롭힘이 도에 지나친 어느 날, 스크랩과 맞붙게 되고 쇼렐리는 스크랩의 편치에 맞고 기절한다. 70대 노인의 펀치에 실신하는 굴욕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는 <어벤저스>에서 캡틴 아메리카로부터 방패를 물려 받는 팔콘을 연기했던 안소니 마키였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는 데뷔 초기 마키의 파릇파릇하던 시절을 볼 수 있다.

이미 은퇴한 복서 토마스 헌즈를 꺾고 챔피언에 오르겠다고 허풍을 떠는 조금 모자란 체육관의 막내 데인저 역은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의 히컵 목소리 연기를 했던 제이 바루첼이 연기했다. 데인저는 체육관의 유망주 쇼렐리에게 스파링을 가장한 일방적인 구타를 당한 후 의기소침해 체육관을 떠나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질 때도 있는 거야"라는 스크랩의 충고를 떠올리며 체육관으로 돌아온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