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태조 이성계는 고려 말에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했다. 거침없는 돌진으로 표현해도 될 정도였다. 1356년에 공민왕이 여진족 거주지인 쌍성총관부를 몽골로부터 수복할 때 스물한 살 나이로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적극 협력한 그였다. 그 뒤 몽골·홍건적·여진족·왜구의 침입을 격퇴하고 고려 내부의 반란도 진압하면서 그는 위상을 높여갔다.
 
1388년 상반기에 우왕 및 최영과 힘을 합쳐 구세력인 이인임 정권을 몰아낸 그는 요동정벌군 5만 대군이 휘하에 들어오자 그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진격했다(위화도회군). 조정의 실권을 확보한 그는 그로부터 4년 뒤 고려를 무너트리고 새로운 나라의 시조가 됐다.
 
그 결과로, 그와 그의 가족은 왕족이 됐다. 변방인 동북면의 귀족에서 고려 중앙의 왕족으로 변신한 것이다. KBS <태종 이방원> 속의 이성계(김영철 분)와 그 가족들이 갑작스러운 신분 변화를 어리둥절해 하는 것처럼, 실제 역사 속의 이성계와 그 가족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시기에 급작스러운 신분 탈바꿈을 경험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1356년부터 1392년까지 36년간은 이성계가 나라를 얻는 과정이었다. 고려왕조의 신하로 들어갔던 그는 1392년에 고려 주상이 된 뒤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으로 바꾸었다. 스물한 살부터 쉰일곱까지 그의 인생은 국(國)을 이루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과 반비례를 이룬 것이 그의 가(家)가 처한 운명이이다. 조선 건국을 즈음한 시기에 그의 가정에서는 불행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성계의 정치적 성공이 가정의 행복으로 연결되지 못했던 것이다.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에 따르면, 이성계는 본거지인 동북면과 '직장 본사'인 개경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1370년경에 중간 지역인 황해도 곡산에서 훗날 신덕왕후가 될 강씨 소녀를 만났다. 강씨가 태어난 해는 스물한 살 된 이성계가 쌍성총관부 수복에 협력한 1356년이다.
 
10대 중반과 30대 중반으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우물가의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됐다. <다산시문집>에 따르면 곡산을 지나다가 목이 몹시 탔던 이성계는 개울가에 있던 10대 소녀에게 물 한 모금을 부탁했고, 소녀는 버들잎을 띄운 물바가지를 건넸다가 이성계의 신경질적 반응을 초래했다. "급히 드시면 체할 것 같아 그랬습니다"라는 차분한 대답이 이성계를 가라앉혔고, 두 사람은 결혼해 개경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이 상황을 가슴 쓰리게 지켜봤을 조강지처 한씨(훗날의 신의왕후)는 동북면 본거지에서 묵묵하게 가정을 지켜나갔다. 귀족이나 부유층에서는 일부다처가 횡행했다 할지라도 평민들 사이에서는 일부일처가 유지됐으므로, 이런 결혼이 보편적인 공감을 얻었다고는 볼 수 없다. 옛날 사람들도 이런 결혼의 불합리를 모르지 않았다.
 
한씨는 그런 불합리를 받아들이면서 이성계 가문을 지켰다.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이성계가 개경 무대에 심혈을 쏟으며 승승장구를 거듭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조선 건국의 숨은 공신이라 할 만했다. 하지만 이성계가 즉위하기 1년 전인 1391년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이성계 가문의 핵심 기둥이 건국 얼마 전에 사라진 것이다.
 
이성계는 건국 4년 뒤에도 부인을 잃었다. 개경 집을 지키며 이성계의 중앙 활동을 돕다가 조선 건국과 함께 중전이 된 신덕왕후가 1396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신의왕후의 죽음뿐 아니라 신덕왕후의 죽음도 이성계에게 충격을 줬다. 그 상실감은 그가 금기를 깨고 도성 안에 신덕왕후 무덤을 만든 데서도 나타난다. 그는 신덕왕후 무덤인 정릉을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조성했다. 너무 그리운 나머지 가까운 곳에 두고자 했던 것이다. 이 무덤은 이성계가 사망한 이듬해인 1409년에 한씨 핏줄인 이방원에 의해 파헤쳐졌고 무덤 옆의 석물들은 청계천 광교(광통교)를 만드는 데 사용됐다.
 
 KBS 1TV <태종 이방원>

KBS 1TV <태종 이방원> ⓒ KBS

 
이성계는 부인뿐 아니라 장남 이방우로 인해서도 상실감을 느꼈다. 조선왕조에서 진안대군으로 추증된 이방우는 이 왕조를 강하게 거부했다. 1789년에 정조 임금이 지은 진안대군 묘비명에 따르면, 그는 위화도회군이 있은 1388년에 가족을 데리고 철원으로 옮겨가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음력으로 태조 2년 12월 13일자(양력 1394년 1월 15일자) <태조실록>은 이날 죽은 이방우를 두고 '술을 좋아해 매일 폭음하다가 병이 나서 세상을 떠났다'고 설명했다. 폭음을 한 것은 술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한 은둔 생활에도 기인했을 수 있다. 장남이 자신의 쿠데타를 거부한 뒤 폭음으로 소일하다가 그렇게 됐으니, 이성계의 가슴이 얼마나 쓰렸을까.
 
무인인 이성계와 달리,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은 공부 잘하는 문인이었다. 이방원은 위화도회군 5년 전에 17세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문신 관료의 길로 들어섰다. 이방원처럼, 여섯째아들인 이방연도 공부를 잘했다. 어린 나이에 과거를 거쳐 성균박사가 됐다.
 
태종 9년 윤4월 10일자(1409년 5월 24일자) <태종실록>은 이방연이 1385년에 급제한 뒤 요절했다고 말한다. 위화도회군 3년 전에 급제했고 그 뒤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난 듯하다. 건국을 전후한 시점에 이성계 가정에 불행이 많았던 것이다. 권력이 늘어가는 것과 반비례해 가족들이 하나씩 사라진 셈이다.
 
불운은 이 정도로 그치지 않았다. 임금이 되고 6년 뒤인 1398년에는 첫째부인의 아들이 둘째부인의 아들들을 살육했다(제1차 왕자의 난). 둘째부인의 아들인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데 대한 이방원의 보복이었다.
 
이때 이성계가 경험한 것은 아들들 간의 살육을 목격하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아들 이방원이 자기를 끌어내리는 일까지 경험했다. 동지이자 최측근인 정도전 역시 이방원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니, 그의 충격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첫째부인의 아들들끼리 상호 항쟁하는 사변이 벌어졌다. 넷째아들 이방간이 동생 이방원의 독주에 불만을 품고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콩가루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로 집안이 풍비박산이다.
 
나라는 얻었지만 가정은 잃은 이성계는 제1차 왕자의 난으로부터 10년을 더 살았다. 부인 둘이 죽고 아들 여럿이 상호항쟁 기타 이유로 세상을 떠난 뒤 10년을 더 버텼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게 아니라 빼앗긴 것이니, 결과적으로 보면 가정뿐 아니라 나라까지 다 잃은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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