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1_전쟁터에서도 문화와 예술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수도 사라예보.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시민들에게 포탄이 떨어져 떼죽음 당한 자리에 매일 오후 4시마다 사라예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수석 첼리스트가 첼로를 연주한다. 국내에도 번역 출판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라는 소설 속 이야기다. 사람들이 연주를 듣기 위해 모여들자 내전 중인 양대 세력은 한쪽은 연주자를 저격하기 위해, 다른 쪽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저격수를 파견한다.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는 이웃을 위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목숨을 건 연주를 하지만 상호 적대하는 세력들 간에는 정치적 이해득실이 우선이다. 첼리스트는 이런 현실을 그의 연주로 규탄하며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존재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생존 자체가 지상과제인 전장에서 문화나 예술은 사치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전쟁이 일상일 순 없다. 많은 이들이 평소에 누렸던 삶을 떠올리는 데 문화와 예술의 가치는 결코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 삶의 즐거움을 떠올려 생의 의지와 이성적 판단을 유지하는 촉매 기능을 해낸다. 그런 경험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전쟁이라는 극한상황에 처한 피아니스트라는 설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 피아니스트를 묘사한 로만 폴란스키의 2002년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이미 등장한 바 있다. 전쟁 발발 전 폴란드 국영 라디오 방송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브와디스와프 슈필만과 그의 가족들이 나치 점령 하에서 겪는 고난과 홀로코스트 풍경이 묘사된 작품 속 클라이막스는 게토에서 고립된 채 방황하던 주인공이 우연히 마주친 독일 군 장교 앞에서 목숨을 걸고 혼신을 다하는 피아노 연주 장면이다. 이제 소개하려는 <전장의 피아니스트> 기본 내용을 듣는다면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떠올릴 법하다.
 
비참한 전쟁터에서 자신의 생존을 위해 고심하는 주인공의 상황을 그려냈다는 점에선 두 영화는 비교될 구석이 제법 많다. 하지만 작품 속 배경이 다르고 시대상이 차이 나듯, <전장의 피아니스트>는 특히 후반부의 반전과 주인공의 변화 측면에서 차이가 적지 않은 편이다.
 
2_시리아 내전 속 시민들의 삶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
 
"전장의 피아니스트" 포스터 영화 메인 포스터

▲ "전장의 피아니스트" 포스터 영화 메인 포스터 ⓒ 찬란

 
<전장의 피아니스트>는 내전이 한창이던 2014년 시리아 북부 작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카림은 유럽에도 약간은 알려진 피아니스트(였)다. 하지만 4년째 이어진 전쟁으로 온 나라가 황폐화된 상황에선 그가 재능을 발휘할 길이 있을 리 없다. 오래 알고 지낸 동네 어른 아부 무사의 가게에서 일을 도우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처지다.
 
영화가 시작되면 주민들이 피신한 지하실을 배경으로 카림은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하는 중이다. '꿈'이라는 곡의 제목처럼, 바깥에선 총소리와 포격, 폭격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지하실 안은 외부와는 유리된 공간처럼 느껴진다. 음악을 배경으로 어둡고 먼지투성이 지하실에서나마 일상을 이어가려는 주민들 모습이 찬찬히 묘사된다. 하지만 곧 지하실은 바깥 현실과 연결된다. 폭격으로 발생한 부상자가 실려 오고 응급처치에 나선 의사는 환자의 안정을 위해 카림에게 뭐든 연주하라고 소리친다.
 
음악을 통해 간신히 가려두고 있던 암울한 현실은 곧 돌아온다. 극단주의 이슬람 군벌이 들이닥쳐 카림의 피아노를 발견한다(이슬람 근본주의에선 음악을 금지한다). 무장세력 대장은 카림을 구타한 뒤 피아노에 총질을 해 부숴놓는다. 사실 카림은 그 피아노를 팔아 13일 후 유럽으로 밀입국을 알선하는 브로커와 거래한 상태였다. 모든 계획이 무너질 위기에 처해 망연자실한 카림은 피아노 부속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카림은 피아노 부품을 얻기 위해 내전의 한복판이라 모두가 가기를 만류하던 람자 마을로 향한다. 동네에 머물러 있어도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낯선 곳으로 떠나며 벌어지는 위기들은 영화의 주요 스릴을 구성하는 지점이자 배경을 확장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카림은 타인의 희생과 자신이 겪은 고난을 대가로 간신히 피아노 부속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 과연 그 수리된 피아노의 가치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카림의 막판 선택이 어떤 결과를 도출할지 거듭되는 전개가 보는 이들에게 긴장을 극대화시킨다.
 
레바논 출신으로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한 지미 케이루즈 감독은 2016년, 단편 <녹턴 인 블랙>을 연출해 주목받은 후 이를 장편화한 형태로 (기본 설정과 일부 배역진이 계승된) 첫 장편 <전장의 피아니스트>를 완성했다. 정상적인 영화 촬영이 힘든 시리아 상황 때문에 영화는 레바논과 (ISIS가 오랫동안 지배했던) 이라크 모술을 오가며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기록영상을 보듯 내전의 참상이 고스란히 재현될 수 있었다.
 
2_1. 내전 속 시민들 일상 재현의 탁월함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영화 속에서 카림과 이웃들의 삶은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극중에서 이미 4년째 이어진 내전은 초반의 시민혁명 시절 희망은 사라진 채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혼돈 그 자체로 묘사된다. 시리아 내전이 발발된 2011년 당시만 해도 '아랍의 봄', '재스민 혁명'이라 불리듯 독재정권에 맞선 시민봉기 성격이 강했지만 무장투쟁 과정에서 국가 내부의 뿌리 깊은 종교/민족/지역 갈등이 표면화되고 외세의 개입이 확대되면서 사태는 혼돈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영화에서도 묘사되듯 정부군은 반군 지역 민간인에 대한 폭격을 거리낌 없이 자행한다. 민간인 주거지역에 대한 '통 폭탄' 공습이 빈번하고 사상자는 늘어만 간다. 하지만 이미 반정부세력은 분열되고 지리멸렬한 상태다. 시민혁명에서 무장투쟁으로 중심이동하면서 과격 강경파가 반군 내에서 득세하고 주도권을 갖는다. 그 틈을 타 발호한 극단주의 무장집단들이 반군 내에 혼재되어 있는 상태고 이제 반군 내에서 또 다른 내분이 격화되는 상황이다.
 
카림 또한 반군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이미 전망을 잃은 상태다. 그렇기에 국외로 탈출해 자유롭게 피아노를 치며 살기 위한 계획에 집중한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가 남긴 피아노와 해외로 탈출해도 취업이 가능한 재능이 카림이 이웃들에 비해 가진 상대적 비교우위다. 브로커에게 돈만 지급하면 그는 유럽에 발 딛는 순간 다른 이들보다 나은 형편으로 새 출발할 수 있다. 그런 조건은 동네 주민들이 카림에 대해 불신하거나 의심하는 조건으로도 작용한다.
 
영화 도입부 지하실 풍경 묘사는 보기 드문 탁월한 재현 수준을 선보인다. 총알과 포탄이 날아다니는 지상이 아니라 지하로 일상의 터전을 옮긴 듯 지하실 공간은 내전 중 시민들의 일상을 그대로 압축한 그림과 같다. 여인은 식사 준비를 하고 아이들은 어떻게든 놀이를 찾는다. 노인들은 장기에 몰두해 바깥을 잊으려 애쓴다. 그 와중에도 상거래가 이뤄지고 응급수술도 진행된다. 짧은 장면 속에 실제 전쟁 속 일상이란 저런 것이겠다는 공감이 들 만큼 충실한 묘사다.
 
카림 주변의 주민들은 각자의 희망과 선택을 취한다. 극단주의 세력에 맞서 봉기를 준비하는 조직은 동료를 규합하고 무기를 모으며 보안대책을 강구한다. (이들에게 카림의 피아노는 극단주의 세력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위험한 대상이기도 하다) 젊고 능력 있는 이들은 토익 공부를 열심히 하는 카림의 사촌처럼 해외로 떠날 준비로 불안을 견딘다. 희망은 포기한 채 그저 하루하루 버티는 이들도 적지 않다. 노인들은 그저 묵묵히 시간을 보내며 현실에 초연하다. 이렇게 각자의 일상을 유지하는 이들이 지하실 대피소 내에 전부 뒤섞여 있다.
 
2_2. 극단주의 세력의 공포통치 실상 묘사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그저 상징화된 존재로 우리에게 인식되곤 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전횡 고증도 무척 뛰어나다. 영화 초반부에 카림의 동네 주변을 장악한 무장 세력은 검은색 복장에 터번과 수염을 기른 채 무단통치를 휘두른다. 그들의 공포를 느끼기까진 얼마 걸리지 않는다. 아이들이 축구를 하다 공이 그들 앞에 굴러가자 곧 분위기는 얼어붙는다(일체의 스포츠 또한 금지하고 있다). '진정한 이슬람교도'를 감별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양 이들은 총을 앞세워 반대파들을 숙청하며 공포로 군림하지만 주민들에게 기본적인 삶을 보장하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영화 속에선 특히 전쟁 중에서도 '내전' 상황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양상이 여러모로 구현되고 있다. 과거에 지인이나 이웃이던 이가 순식간에 학대와 살상의 가해자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동네 이웃이 밀고하거나 앞잡이가 되는 행태가 실감나게 묘사된다. 극단주의 세력이 강제로 반대자를 숙청하고 공포 정치를 펼치면서 학문과 예술을 탄압하는 실태는 짧지만 효과적으로 그려진다. 카림이 돌보던 소년 지아드와 친구들이 강제로 입학한 이슬람 학교에선 교과서를 지급하는 게 아니라 모아서 불태운다(!). 지금까지 배운 지식은 잘못된 것이니 비워내야 한다는 명분이다. 나치가 책을 불태우던 악몽이 다음 세기에 재현된 꼴이다(그리고 나치는 곧이어 사람도 불태웠다). 영화 후반에 등장하는 소수자에 대한 박해는 저곳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다.
 
특히 관객에게 감정소모를 겪게 만드는 건 어떻게든 인간성을 잃지 않고 선행을 이어가는 이들이 차례로 비참한 운명을 당하는 광경들이다. 전쟁고아를 돌보던 사람, 재기의 희망을 놓지 않고 가게를 꾸미던 사람들이 쓰러져 간다. 희망을 잃지 않고 인간성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던 이들이 폭력 앞에 희생당하는 순간이 거듭 이어지다 보니 영화 속 주인공이나 바깥의 우리들이나 절망감을 느끼는 건 매한가지다.
 
동네를 장악한 극단주의 군벌의 대장은 카림을 괴롭히는 '빌런' 격이다. 사실 그는 카림과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로 카림에게 집착하며 어떻게든 굴복시키려 한다. 마치 소설 <태백산맥>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쉽게 상상할 법하다. 이들은 반외세를 외치고 종교적 경건함을 주창하지만 힘없는 주민들을 괴롭히며 시시덕거리는 모습이나 주민들에겐 금지하는 흡연을 자신들은 거리낌 없이 일삼는 걸 보면 완장을 잘못 찬 이들이 어떻게 폭주하는지 예시한다.
 
3_천방지축 지아드: 카림의 변화를 이끌다
 

카림이 시달리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그가 동생처럼 챙기려는 고아 지아드는 현실을 부정하는 행동으로 카림을 위기에 빠트리곤 한다. 얼핏 보면 지아드는 전형적인 문제적 캐릭터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이 어린 소년이 처한 상황이 미친 것이다. 유일하게 의지하던 아버지는 극단주의자들에게 끌려간 뒤 실종되었다(아버지는 끌려갈 때 카림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카림이 람자로 피아노 부품을 구하러 간 사이 지아드와 친구들은 이슬람 학교에 강제 입교한다. 무장 세력은 소년들에게 공부 대신 총과 폭탄 사용법을 가르친다(!). 오직 이슬람 원리주의와 무기 사용법만 가르치며 밤에는 출입을 통제한다. 학교라기 보단 소년병 양성소에 가까운 격이다. 동서고금 독재 권력의 전매특허 우민화 정책의 표본이다.
 
지아드는 여러 차례 고집을 부리며 카림을 난처하게 한다. 하지만 지아드에게도 할 말은 있다. 카림은 비록 지금은 자신을 돌보지만 피아노를 수리하면 자신을 버리고 유럽으로 떠날 상황이라는 걸 소년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지아드가 제정신으로 견디는 게 더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그런 소년을 오직 영화 전개만 놓고 '고구마' 취급하기란 참 곤란한 노릇이다. 영화 내내 지아드의 철없는 행동이 카림과 주변 사람들을 곤란에 빠지게 하지만 지아드가 악의를 갖고 일으킨 경우는 거의 없다. 어린 소년 나름대로 카림을 돕거나 아버지의 복수를 하기 위해 궁리한 결과다. 비록 그게 미쳐가는 세상에서 턱없이 어설프거나 부족할 뿐이다.
 
이제 카림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람자에서 그는 죽을 고비를 여러 번 겪은 끝에 피아노 수리에 필요한 부속을 구한다. 그리고 수리를 마친다. 이틀 후면 떠날 수 있다. 다른 이들은 거액을 들여 브로커 편에 유럽으로 향하더라도 난민 대접에 그치는 신세이지만 카림은 무사히 도착만 하면 오케스트라에 자리도 마련되어 있다. 이웃들 중 일부는 그의 유럽행을 격려하지만 극단주의 세력에 대한 봉기를 계획하는 이들은 카림이 자기보신에만 몰두한다고 고까운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다. 지아드의 막무가내 폭주도 카림은 결국 자신을 끝까지 돌보지 않으리란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연 카림은 어떤 선택을 내릴까?
 
4_시리아 내전에 대한 한 단면으로 모자라지 않는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전장의 피아니스트"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찬란

 
<전장의 피아니스트>는 소규모 영화로서는 드물게 전쟁영화로서의 스펙터클과 긴장감의 재현도가 상당한 작품이다. 물론 그런 액션 스릴이 이 영화의 본령은 아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개인, 그리고 예술에게 강요되는 선택이 작품이 추구하는 주제다. 그 두 요소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며 과연 어떻게 이야기가 끝날지 관객에게 흥미와 궁금증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든다.  

물론 두 측면이 골고루 가미되다 보니 사실주의적 묘사와 스펙터클 연출이 물과 기름처럼 이질감을 주는 부분도 종종 튀어나온다. 하지만 대부분의 장면들은 내전의 실상을 구현하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크게 거슬리거나 삐죽 돌출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영화 제작진이 시리아 내전에 대한 태도가 결코 가볍지 않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극단주의 세력 대장처럼) 개별 인물 심리묘사가 다소 생략된 채 목적형 캐릭터로 쓰여서 아쉬운 경우도 몇 있지만 종합적인 측면에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실태 형상화는 빼어난 편이다.
 
그런 약간의 아쉬움도 있지만 결국 영화의 결말은 도입부와 대구를 이루는 음악의 힘으로 거침없이 질주한다. 대미를 장식하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1번 발트슈타인 연주 장면은 놀라운 몰입 수준을 관객에게 선사한다. 그 곡이 흐르는 극적인 상황은 영화 시작과 함께 지하실에서 숨은 채 몰래 연주하던 장면과 완벽한 대비를 이룬다. 피아노와 카림이 취하는 저항의 사자후 그 자체다. 곧바로 구구절절 후일담 따위 없는 엔딩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부류로 흐르지 않는 마무리는 오히려 영화가 끝난 뒤 상당한 여운을 남긴다. 이 결말 때문에 로만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와 차별화되는 작품이 탄생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보면 그 지점이 오히려 할리우드 전쟁물의 스펙터클과 흡사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저런 절체절명의 상황, 모든 꿈과 희망을 포기하느냐 마느냐의 순간이라면 저런 선택도 가능하지 않을까? 모든 게 광기와 야만에 물든 것 같은 공간에서 저런 방식의 저항이 꼭 불가능한 일일까? 능히 반문할 법하다.
 
시리아 내전 중 정부군에 포위된 소도시에서 지하 도서관을 꾸리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을 보면, 당장 급한 생필품 못지않게 전쟁터 한복판에서 시민들이 얼마나 독서에 굶주렸는지 실감할 수 있다. 비참한 전쟁터 한복판에서 당장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권의 책, 한 줄기 음악이 가져오는 위안과 희망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지 않을까. 내전의 상징 알레포 격전장에서도 버려진 고양이를 돌보던 남자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지 않았던가.
 
그렇게 마지막의 초현실적 장면 또한 실제 현지 정서와 충분히 근접해 있어 보이는 감독의 소망과 의지가 담긴 장면이라 봐도 좋지 않을까. 시리아 내전의 한 단면을 고스란히 압축하고 비록 현실에선 배반당한 혁명일지언정 영화 속에서나마 인류애와 이성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픈 소망을 어찌 탓할 수 있으랴. <전장의 피아니스트>는 그 소박한 꿈의 힘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영화다.
 
<작품정보>
전장의 피아니스트 Broken Keys
2020|미국, 레바논, 프랑스, 키프로스|전쟁/드라마
2022.01.06. 개봉|110분|12세 관람가
감독 지미 케이루즈
주연 타렉 야쿱(카림 역)
출연 롤라 벡스마티(사마르 역), 모우니르 마스리(아부 무사 역),
줄리안 파르하트(압달라 역), 이브라힘 모스타파(지아드 역)
수입 및 배급 찬란
 
2021 워싱턴DC국제영화제 Signis상
2020 칸영화제 초청
2021 전주국제영화제 초청
전장의 피아니스트 지미 케이루즈 감독 타렉 야쿱 녹턴 인 블랙 시리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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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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