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꿈의 나라> 배우 분장 모습

<오! 꿈의 나라> 배우 분장 모습 ⓒ 장산곶매

 
빛고을 광주는 한국영화운동의 정신이 시작된 곳이었다. '영화운동'의 출발이 광주민중항쟁 이후로,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인 1980년 5월의 아픔은 '영화'에 '운동'이 더해지게 했다. 1980년대 한국영화운동의 성과물인 장편영화 <오! 꿈의 나라>가 5월 광주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은 한국 영화운동에 있어 광주가 갖는 의미를 상징한다.
 
서울이 중심일 수밖에 없었던 한국 영화운동에서 지역의 경우는 부산영화운동이 대표적이었다. 1984년 시작된 부산씨네클럽과 1985년 부산대학교 영화패 살리라, 1988년 꽃다림 등의 활동이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목받은 활동이 덜했을 뿐 광주에서의 영화운동 시작도 1984년대 초반이었다. 시기적으로 부산씨네클럽이 만들어진 시기와 비슷하다. 다른 지역의 영화운동이 대부분 1990년대 이후 들어 활성화된 것을 감안하면 광주의 영화운동의 출발은 이른 편이었다.
 
광주 영화운동의 바탕이 된 것은 1970년대 문화운동이었다. 문화운동의 성과가 쌓이면서 1980년 5월 이후 진화했다. 유신독재 시절 광주에서 문화패 활동을 했던 운동가들이 광주항쟁을 거친 이후 영화운동의 방향을 모색한 것이었다.
 
5.18을 겪은 이후 군사독재에 대한 저항정신을 기본바탕으로, 민중운동의 흐름 속에 영화운동이 발전했다는 것은 광주가 갖는 특색이었다. 1980년 5월의 아픔과 기억은 한국 영화운동의 발전에 동력으로 작용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 만들어진 민중영화가 광주 상영만큼은 유독 치열한 과정을 거쳐야 했던 것은 영화운동에서 광주가 갖는 비중을 상징한다. 민중항쟁의 도시 광주는 서울만큼이나 격렬한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고, 영화에 대한 지지를 보냈다. 온갖 탄압에 굴하지 않은 채 영화를 지켜내면서 영화운동 진영에 힘을 불어넣은 것이다.
 
탈춤으로 태동한 광주 문화운동
 
광주 영화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사로서 광주 문화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 광주 문화운동 출발의 주역이었던 윤만식(전 광주 민예총 대표)에 따르면 광주 문화운동은 1970년대 YMCA가 개설한 탈춤강습이 본격적인 태동이었다.
 
윤만식은 2017년 국사편찬위원회가 정리한 <'1970년대 광주문화운동과 5.18 민주화운동의 기억' 구술채록연구집>(한재섭/윤수안 정리. 이하 구술채록집)에서 "1971년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 소재 대학을 가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학원에 다니며 재수 삼수를 하는 과정에서 종로 2가 서울 YMCA에서 열렸던 탈춤강습회를 처음 알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강습 대상이 대학생으로만 제한됐다. 이후 윤만식이 탈춤강습에 참여한 것은 대학에 입학한 이후였다. 1973년 전남대에 입학한 윤만식은 2학기에 군에 입대했고, 1976년 군에서 제대해 복학한 이듬해인 1977년 탈춤 강습생 모집을 한다는 안내문을 보고 직접 전일빌딩 건너편에 있는 YMCA로 찾아간 것이다.
 
 1970년대 광주  YMCA

1970년대 광주 YMCA ⓒ 광주 YMCA

 
 1978년 봄 전남대 사회학과 수학여행 중 경주 박물관 앞에서 봉산탈춤 기본 춤사위를 선보이는 김선출(전남문화재단 대표)

1978년 봄 전남대 사회학과 수학여행 중 경주 박물관 앞에서 봉산탈춤 기본 춤사위를 선보이는 김선출(전남문화재단 대표) ⓒ 김선출 제공

 
당시 강습에 참여했던 김선출(전남문화재단 대표)에 따르면 "광주YMCA가 기획한 탈춤강습 프로그램은 2일간 YMCA 무진관에서 열렸고, 봉산탈춤 전수 조교가 내려와 봉산탈춤 기본기를 가르친 것"이 전부였다.
 
탈춤강습에 모인 사람은 윤만식을 비롯해 김선출(전남문화재단 대표), 김윤기(전 광주문화재단 대표), 조길예(전 전남대 독문과 교수), 윤성석(전남대 정외과 교수) 등이었다. 이들은 'Y가면극회'라는 임시 모임을 조직하게 된다.
 
윤만식은 "당시 광주 YMCA 김호준 사무총장이 탈춤을 배울 수 있게 공간을 빌려줘야 하는데, 그냥 이 무대를 빌려줄 순 없고 돈이 없는 대학생들에게 대여료를 받을 수도 없다 보니, 하나의 써클(동아리)을 만든 것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사무총장이 학생들에게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덕분에 배려를 받게 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Y가면극회'는 1977년 12월 겨울 서울에서 강사들을 초청해 탈춤강습을 열게 된다. 이때 탈춤을 가르치러 왔던 사람이 서울대 문화패에서 활동하던 채희완(부산대 교수), 유인택(예술의 전당 대표), 그리고 홍익대에서 활동했던 김봉준(화가) 등 3인이었다.
 
이들 세 사람이 광주까지 원정 와서 탈춤을 지도한 것은 놀이패 한두레 덕분이었다. 한두레는 1974년 서울대, 이화여대 탈춤반 출신들을 주축으로 '민족문화연구모임 한두레'로 출범한 대표적인 마당극 단체로 문화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윤만식은 구술채록집에서 "당시 75학번이었던 조길예(전 전남대 독문과 교수)의 남자친구가 서울대 재학 중이던 최권행(서울대 교수. 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조성위원장)이었고, 서울대 한두레하고 가까웠기에 자연스럽게 소개를 했다"며 "한두레에서 활동하던 채희완에게 '광주도 전남대학교에 문화팀이 필요하다, 형님이 좀 내려가서 좀 도와달라'고 부탁해 강사로 내려오게 된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당시 최권행은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1974년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 사건 피해자 중 한 사람이었다.
 
이에 대해 김선출은 "최권행은 당시 민청학련 사건으로 인한 서울대 제적생으로 한마당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황석영(소설가)과 친분이 있었다"며 "황석영의 소개로 한두레가 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임시단체인 Y가면극회를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내려운 채희완, 유인택을 금남로 YMCA 건물 내 Y다방에서 처음 맞이했다"고 기억했다.
 
김봉준(화가.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은 <프레시안>(2021. 9.17)에 기고한 글에서 "1970년대 중반 대학탈춤반은 서울대,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고려대, 서울여대, 한양대, 숙명여대 등에서 생겼고, 탈춤 풍물의 정보를 교환하며 서로 먼저 배운 것은 전수해 주며 지내고 있었다"고 밝혔다. 서울지역 대학 탈춤반에서 이어지던 교류가 광주로 넓혀진 것이었다.
 
유인택(예술의 전당 대표)은 "당시 마당극패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서울대 춤패에서 활동하던 채희완이 '조교가 필요하니 같이 가자'고 제안해 광주로 간 것이었다"며 "대학 3학년 때였다"고 말했다. 이어 "3개월 동안 한 번 내려가면 10일 정도 머무르다 올라오는 식으로 탈춤과 풍물, 탈 제작을 가르쳤다"고 덧붙였다.
 
 2018년 11월 24일 옛 전남도청에서 개최된 광주문화운동 40주년 회고와 전망 세미나에서 발표한 '광주문화운동의 태동과 전개(1977~1987)' 발제문

2018년 11월 24일 옛 전남도청에서 개최된 광주문화운동 40주년 회고와 전망 세미나에서 발표한 '광주문화운동의 태동과 전개(1977~1987)' 발제문 ⓒ 임한필 제공

 
당시 탈춤 강습생 중에는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 도청에서 산화했던 윤상원 열사도 수강한 것으로 나온다. 전용호(<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 전 광주전남 소설가협회 대표)가 2018년 11월 24일 옛 전남도청에서 개최된 '광주문화운동 40주년 회고와 전망 세미나'에서 발표한 광주문화운동의 태동과 전개(1977~1987) 발제문에 따르면 참가자 명단에 윤상원이 들어 있다.
 
그러나 유인택은 "참여한 분들이 한 두 분 정도만 기억나는데, 윤상원 열사가 참여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Y가면극회를 이끌었던 김선출 역시도 윤상원 열사의 참여는 "불확실하다"고 기억했다.
 
김선출과 함께 Y가면극회에 참여했던 김윤기(전 광주문화재단 대표)는 전남대 5.18 연구소의 증언자료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1989.2)'에서 탈춤을 배우던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976년 전남대 법대에 입학해 1학년 때부터 학과공부에 취미를 잃었고, '소금'이라는 교양서클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2학년 때 전남대 민청학련세대들이 학생운동을 재건하기 위해 전남대학교에 재건그룹을 만들면서 자연스럽게 그 그룹에 연결돼 소그룹 학습을 했다.
 
숨어다니다시피 1년 동안 운동권 입문서 수준 정도의 서적을 가지고 학습을 하다가, 1977년 겨울이 되면서 소그룹내 역할분화가 됐고, 나와 김선출은 문화운동 쪽을 담당하기로 했다. 서울에서는 김지하씨를 중심으로 탈춤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우리도 그것에 자극받아 문화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겨울에 YMCA에서 강사를 초빙해 탈춤강습을 했는데 우린 자연스럽게 합류해 탈춤을 배우고 그 강사와 함께 저녁에는 토론도 하면서 여관에서 합숙하다시피 했다. 1977년 서울대 김상진 열사 추도식 때 탈춤공연이 큰 성과를 거두는 것을 보면서 탈춤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이 폭압적 상황 속에서 굉장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인식했다."

 
탈춤강습회는 1978년 4월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창립으로 이어진다. 전남대에 탈춤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운동 조직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회장은 김선출이었고, 부회장은 김윤기였다.
 
김윤기는 "윤만식, 김선출, 김정희 등 몇몇과 함께 서클을 등록했다"며 "기능이 뛰어나진 않았지만 우린 열심히 활동했다. 봉산탈춤 공연도 했고, 민족양식으로서의 탈춤에 애정을 가지게 되면서 그러한 애정을 운동과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회상했다.
 
유신독재에 저항하다 수배되고 구속
 
탈춤반이었던 민속문화연구회와 함께 광주 문화운동에서 역할을 했던 또 다른 조직은 전남대학교 연극반이었다. 1976년 전남대 입학 후 연극반에서 활동했던 김태종(놀이패 신명 2대 대표)은 구술 채록집에서 "공부에는 관심 없고 밖에서 악을 쓰며 시위하던 과정에서 선배들의 권유를 받아 연극반 활동을 시작했다"며 "당시 전남대 연극반은 윤상원과 5.18 민중항쟁당시 항쟁지도부 홍보부장이었던 박효선 등이 활동했다"고 말했다.
 
박효선(작고)은 1976년 전남대 국문과에 입학해 연극반 활동을 했고, 5·18 이후 윤한봉(작고, 재야운동가)와 함께 도피생활을 했다. 광주 문화운동 뿐만 아니라 1990년대 영화 제작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인물이다.
 
박효선은 광주민중항쟁이 계엄군 진입하기 전 도청에서 먼저 빠져나왔다는 자괴감으로 인해, 함께 도청에 있다가 정신이상자가 된 김영철 등 당시 시민군들에 대한 죄의식이 있었다. 이 때문에 생을 마칠 때까지 오월극에 천착했다. 1983년 극단 토박이를 창립했고 1989년 민들레소극장을 건립했으며 1998년 지병으로 별세하기 직전까지 오월 비디오 영화 <레드 브릭>을 준비하고 있었다.
 
 5.18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고 박효선(오른쪽)과 가족들

5.18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고 박효선(오른쪽)과 가족들 ⓒ 김선출 제공

 
김윤기는 "녹두서점을 운영하던 김상윤 선배의 도움으로 연극반과 교류를 갖기 시작해 박효선 선배, 김태종 등과 인간적인 교류를 갖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속문화연구회는 박정희 정권 당시 발생한 교육지표 사건으로 인해 주요 회원들 다수가 수배를 받으면서 활동이 중단된다.
 
교육지표 사건은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 대학교수들이 '박정희가 제정한 국민교육헌장이 우리 교육의 지표가 될 수 없다'며 비판 성명을 낸 반독재 투쟁이었다. 박정희 유신독재는 정보기관을 동원해 이들을 탄압했는데, 연세대 성내운 교수와 전남대 송기숙 교수, 이화여대 이효재 교수 등이 해직됐다.
 
전남대에서는 이들의 해직을 철회하라고 요구하며 학생들이 도서관 등에서 농성과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다수 학생이 연행 후 구속됐고, 민속문화연구회 핵심들은 수배된다. 김선출은 "본격적인 공연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교육지표 사건 주동으로 연루돼 도피하면서 탈반은 창립 3개월만에 해체 상태가 됐다"고 회상했다.
 
김태종은 구술채록집에서 "교육지표사건이 터지고 나서 김선출, 김윤기가 지명수배로 인해 도피하면서 전남대 문화운동이 한번 꺾이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선출과 김윤기는 서울에서 도피 생활을 이어갔다. 김선출은 "1978년 7월부터 79년 9월까지의 서울 도피생활 중에도 나의 관심사는 오직 문화운동이었다"며 "방학 기간에 양주별산대 전수차 온 전남대 탈춤반 후배들을 만나러 수배 중임에도 김윤기와 막걸리 통을 메고 전수관을 찾아가기도 했다"고 밝혔다
 
또한 "주로 채희완을 만나 김민기 등 한두레 선배들과 술자리도 하고 서교동, 보문동 연습실에도 갔으며, 단편영화 '삼포가는 길' 촬영현장도 동행해 조명 반사판을 들었던 기억이 있으며, 장선우(감독)을 만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79년 9월 검거된다. 김선출은 용인 한국민속촌에서, 김윤기는 아현동 자취집 근처에서 각각 경찰에 잡힌 것이다.
 
김선출은 "김윤기와 함께 수배 중에도 탈춤과 풍물 중심의 문화운동을 위해 용인 한국민속촌까지 찾아가 민속촌 단장에게 풍물 지도를 받던 중이었다"며 "아예 민속촌 단원으로 위장 취업까지 했는데, 두 달 만에 민속촌 놀이마당에서 체포됐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당시 정인삼 단장은 연습을 열심히 하는 김선출을 보고"한국에 장구잽이 한 명 나오겠네"라고 칭찬했었다고 한다.
 
당시는 박정희 긴급조치 9호시대였다. 김태종은 구술채록집에서 "긴급조치 9호라는 게 굉장히 포괄적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그런 조치였다"면서, "그래서 문화운동이 꺾였다가 1979년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은 10.26 사태 이후로 암중모색하던 과정에서 극단 광대 창단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태종은 또한 "광주 문화운동이 서울과 접점을 통해 확장할 수 있었다"며 "소설 <장길산> 집필을 해남에 머물다 광주로 거처를 옮겨온 황석영(소설가)이 서울대 문화운동 그룹과 광주 문화운동과 연결을 넓히는 데 도움을 줬다"고 말했다. "1970년대 한국의 문화운동 시조였던 김지하 시인이 문인이다 보니 황석영과 교류가 있어, 문화운동 1세대인 임진택·채희완·김민기·장선우 등을 소개한 것이 광주와 서울이 연결된 계기였다"고 덧붙였다.
 
임진택은 "1979년 12월 31일 서울을 떠나 광주에 살던 소설가 황석영 선배가 광주 민족민주진영 송년행사에 불러줘서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 위치한 YMCA 강당 무진관으로 탈춤의 채희완과 노래꾼 김민기와 함께 내려갔고, 김지하 시인의 담시 '비어'(蜚語) 중 한 편에 창을 붙인 '소리 내력'을 공연했다"면서 "이때 윤상원을 처음 만났다"고 회상했다.
 
5.18 이후 시작된 광주 영화운동
 
 전남대 탈춤반 민속문화연구회를 만들었고 박관현 열사 다큐를 제작했던 김선출(전남문화재단 대표)와 김윤기(전 광주문화재단 대표)

전남대 탈춤반 민속문화연구회를 만들었고 박관현 열사 다큐를 제작했던 김선출(전남문화재단 대표)와 김윤기(전 광주문화재단 대표) ⓒ 전남문화재단,광주문화재단

 
광주의 문화운동이 영화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광주 문화운동 주역들은 대부분 5.18 항쟁 당시 홍보 활동과 항쟁지도부의 업무를 도왔고, 이 때문에 모두 구속된다. 김윤기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계엄군에 체포됐고, 김선출은 서울로 피해 다니다 광주로 내려와 자수한다.
 
김태종은 1980년 5월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이 후퇴한 후 민주시민총궐기대회 사회를 맡았다가 수배돼 1981년 8월 검거됐다. 이후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당시 전두환이 이미 대통령이 된 상태라 분위기가 유화적이었고, 판사도 잘 만난 덕분이었다"고 회상했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여파로 와해 되다시피 했던 문화운동 진영은 1983년부터 다시 활동을 재개하면서 영화운동의 토대가 마련된다. 중심은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 김선출과 김윤기였다. 1970년대 민속문화연구회를 만들었던 두 사람이 1980년대 영화운동의 주역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도움을 준 사람이 홍기선(감독)이었다. 서울대 영화 써클 '얄라셩' 활동 이후 서울영화집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홍기선은 광주 문화운동이 전열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연결된 것이다.
 
1978년 전남대 민속문화연구회에서 활동했던 전용호(<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 전 광주전남 소설가협회 대표)의 구술채록집에 따르면 1983년 당시 광주에는 황석영(소설가)의 집을 거점으로 문화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광주지역 민주화운동의 거목이었던 강신석 목사(작고)가 외국에서 지원기금을 받아오면서, 4월쯤 '일과 놀이' 소극장이 개설된다. 지원기금은 저개발 국가의 어떤 지역을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성격이었다. 소극장은 광주 문화운동의 거점이 됐고, 사무국장은 전용호가 맡았다.
 
당시 '일과 놀이' 소극장에서는 공연 외에 서울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에서 제작한 단편영화도 상영됐다. 전용호는 "당시 서울 애오개소극장을 운영했고 민중운동연합에서 활동했던 정희섭(전 예술인복지재단 대표)를 통해 홍기선을 소개받았다"며 "서울영화집단 홍기선이 필름을 직접 광주로 가져와 상영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 문화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던 '일과 놀이' 소극장은 1년 만에 문을 닫게 된다. 공연장 개설을 위한 법적 요건을 완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전용호가 공연법 위반으로 기소됐기 때문이다. 무고한 민중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군사독재가 지역에서 꿈틀대는 문화운동을 놔두지 않았던 것이었다.
 
 박관현 열사 생가

박관현 열사 생가 ⓒ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제공

 
그러나 홍기선(감독)과 광주 문화운동과의 교류는 김선출과 김윤기가 나서면서 박관현 열사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으로 발전하게 된다.
 
박관현 열사는 1980년 5월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광주항쟁 직전 도피해 수배 생활을 했다. 2년 뒤인 1982년 4월 8일 내란예비음모·계엄령 위반 등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체포된 이후 모진 고문을 받았다. 5월 4일 기소돼 9월 7일 징역 5년을 선고받은 후 광주고등법원에 항소하여 재판 계류 중 50일간의 옥중 단식투쟁 끝에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박관현 열사의 시신을 탈취해 생가 앞산에 매장했다.
 
1983년 1주기를 맞이하면서 김선출과 김윤기가 박관현 다큐멘터리 영화에 뛰어든 것이었다. 김윤기(전 광주문화재단 대표)는 "1983년 8월에 군에서 제대 후 시간이 있어 1983년 9월쯤에 1주일 동안 김선출(전남문화재단 대표) 등과 박관현 열사에 대한 다큐 영화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수동으로 직접 후반 작업을 했고, 홍기선(감독)을 통해 서울영화집단 배인정(노동자뉴스제작단 대표)을 소개받아 함께 제작했다"고 덧붙였다.
 
김선출은 "김윤기와 '광주에서 영화운동을 하려면 영화 집단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큐멘터리로 찍게 된 것이었다"며 "전남 영광군 불갑면에 있던 열사의 생가와 묘소를 촬영했고, 꽤 긴 분량으로 만들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영화양식, 영화문법 같은 것은 무시하고 찍은 것이었고, 영화에 대한 기초 기자재 다루는 부분도 몰랐으나 8mm 카메라로 제작하는 것이 간단해서 부감을 준다고 나무에도 올라가서 촬영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김선출은 또한 "촬영을 끝내고 편집 방법이라든가 현상을 하는 과정을 잘 몰랐는데, 촬영했던 8mm 카메라가 단종된 기종으로 국내에서 현상을 못 한다고 해서 배인정이 서울로 가져가 일본으로 보내 현상을 해왔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당시 제작비는 황석영 작가의 소설 <장길산>을 방문 판매해서 받은 수익금으로 충당했다.
 
배인정은 "광주에 숙소를 얻어 제작에 참여했다"며 "영광에서 아들 생각을 하며 막걸리를 마시던 박관현 열사 어머니의 모습 등을 촬영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상영회를 한다고 해서 필름을 전달하고 다른 일 때문에 급히 서울로 올라간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1983년 박관현 열사 다큐가 상영됐던 전남대 사대 건물. 오월항쟁도가 그려져 있다.

1983년 박관현 열사 다큐가 상영됐던 전남대 사대 건물. 오월항쟁도가 그려져 있다. ⓒ 성하훈

 
상영은 전남대 교내에서 진행됐다. 김윤기는 "전남대 대강당에서 상영했던 것 같다"고 기억했으나, 김선출은 "지금 광주민중항쟁도 벽화가 그려져 있는 전남대 사범대 벽에다 상영했다"고 말했다.
 
또한 "영사기가 따로 돌아가고 바로 옆 카세트에서는 녹음한 오디오가 나갔는데, 영상과 오디오의 시차가 잘 맞을지 걱정을 했으나, 그때 분위기는 학생들의 열기가 고조되어 있어 박관현 총학생회장에 대한 현장감과 최초로 자체 제작한 흑백 영화라서 매우 흥분되고 감동적인 상영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윤기는 "당시 상영 중 경찰의 침탈로 상영이 중단됐고, 누군가 필름을 가지고 도망친 것으로 기억한다"며 "첫 상영 후 필름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선출은 "저녁 야외 상영 후 완성도를 높이고 재편집 등을 위해 배인정이 서울로 가져간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박관현 다큐로 출발한 전남대 '아리랑'
 
1983년 박관현 다큐멘터리는 1984년 전남대에서 영화 동아리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다. 광주 영화운동의 출발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김윤기와 1980년 제적됐던 김선출이 복적하면서 영화서클 아리랑의 창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서울의 대학영화서클이 1985년 이후 집중적으로 생겨난 것과 비교하면 전남대 영화서클인 아리랑의 출발은 비교적 빨랐던 셈이다.
 
김선출은 "1984년에 복학 후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 분위기였기에 탈춤반 후배인 박경완(작고, 전 무등일보 기자)에게 영화 서클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고, 나운규 감독의 작품 <아리랑>에 착안해 이름을 '아리랑'으로 짓게 됐다"고 말했다.
 
아리랑 창립회원이었던 박경완은 졸업 후 무등일보 사진기자로 활동하다 1991년 목포에서 추락한 아시아나항공 사고를 취재하고 광주로 돌아오던 과정에서 교통사고로 순직했다.
 
전남대 아리랑은 1984년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주로 영화감상 등으로 진행됐을 뿐 제작이나 촬영 등에서 뚜렷한 활동은 나타나지 않았다. 김윤기는 "1984년 비디오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8mm 영화 제작은 사라졌다"고 회상했다. 
 
 조재형 감독

조재형 감독 ⓒ Culture ItDa 유튜브 방송

  
전남대 아리랑이 영화 제작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1988년부터였다. 영화 동아리로서의 정체성이 강화된 것은 당시 신입생으로 아리랑에 가입한 조재형(감독. 전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이 역할을 했다. 조재형에 따르면 '아리랑'은 박관현 열사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후 생겨났으나 영화 보다는 사진동아리 성격이 강해 매해 5월이면 '오월 사진전'을 열었다. 선배들이 박관현 열사 다큐를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 8mm 촬영 카메라 2대와 필름을 보유하고 있었다.
 
조재형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며 "동아리에 영화와 비디오도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했고, 이 과정에서 아리랑은 영화패 아리랑과 사진패 아리랑으로 나눠지게 됐다"고 설명했다.
 
부산에서 영화운동을 한 황의완(부산콘텐츠마켓 집행위원장)은 "1988년 8.15 남북학생회담 통일선봉대를 촬영하며 동행하다가 전남대에서 필름이 떨어졌는데, 전남대생들이 학내 서클에 필름이 있다며 구해줘 계속 촬영을 이어갈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영화패 아리랑의 도움을 받은 것이었다.
 
조재형은 "아리랑에서 영화 찍는 기술은 배우지 못했으나 어떤 영화를 찍어야 하는지는 배웠다"며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해 모은 돈과 동아리 지원을 합해서 비디오카메라와 편집 장비 등을 구입했고, 이후 두 편의 비디오 영화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첫 작품은 다큐멘터리 <조선의 피가 끓는다>로 통일운동에 대한 영화였고, 두 번째 작품이 전교조를 다룬 <참교육의 함성으로>였다. 조재형은 "동아리 회원이었던 백수정 등과 함께 제작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영화패 아리랑 회원이었던 정영석은 "당시 동아리 회원이던 최고봉 선배가 600만 원 상당의 빔프로젝트를 과감히 구입했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뒤 한번 상영할 때마다 상영료 10만 원을 받아서 이를 갚았다"고 말했다.
 
조재형은 이후 영화 쪽에 한발 더 다가서게 된다. "1991년에서 서울로 와서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만든> 영화제작소 청년에서 1~2개월 정도 활동하다 당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영상창작단장을 맡게 됐다"며 "8월 출범식이 열리던 때 비디오카메라로 극영화 <그해 겨울 푸른 빛 플랭카드>를 제작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영화 내용은 플래카드를 보고 동아리 활동을 하고, 플래카드를 통해 의식화되는 대학생의 모습을 담은 이야기였다.
 
조재형은 이 시기 "한양대에 가서 전대협 문화국에서 활동하던 김조광수(감독), 한양대에서 학생운동을 하던 정윤철(감독), 영화제작소 청년의 오정훈(다큐멘터리 감독) 등과 만났다"고 회상했다.
 
경찰 진입하면 영사기 들고 도망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으로 이어지는 광주의 영화운동은 작품 제작이나 비평 등 독자적인 움직임보다는 학생운동의 흐름 안에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5월의 아픔을 겪은 광주라는 지역적 특수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했다.
 
 2020년 12월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열린 특별전에 참석한 조재형 감독과 전남대 영화패 아리랑 후배들

2020년 12월 광주독립영화관에서 열린 특별전에 참석한 조재형 감독과 전남대 영화패 아리랑 후배들 ⓒ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제공

 
한국 영화운동의 대표적 성과물인 <오! 꿈의 나라>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등이 전남대 총학생회 주도로 학내에서 상영될 때 '아리랑'의 역할은 필름보호였다.
 
당시 아리랑 회원이었던 정영석은 "<파업전야> 당시 전남대는 경찰의 상영 방해를 막아낼 수 있는 곳이었기에 영화패 아리랑 선후배들이 필름을 옆에서 지켰다"며 "경찰이 상영을 막기 위해 학내로 진입하면 필름을 자른 후 영사기를 들고 밖으로 도망가는 것이 내 임무였다"고 말했다.
 
김선출은 "홍기선이 전남대에서의 <파업전야> 상영을 이야기할 때면 유석이라는 학생을 안타까워했다"고 기억했다. "1990년 당시 <파업전야> 상영을 막기 위해 경찰 헬기가 뜨고 교내에 진입할 때 이를 막는 과정에서 직격탄을 맞아 큰 부상을 당했고, 이후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었다"라며 "홍기선이 그 학생의 헌신을 높이 사면서 계속 이야기를 꺼냈다"고 회상했다.
 
한겨레신문 1990년 4월 15일 기사에 따르면 행정학과 4학년이었던 유석은 1990년 4월 13일 전남대에서 <파업전야> 상영 당시 경찰이 필름과 영사기를 압수하기 위해 진입하자 항의 시위를 벌이던 과정에서 경찰이 쏜 직격 최루단에 맞아 앞니 10개와 턱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당했다.
 
영화패 '아리랑' 회원들은 대부분 학생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조재형은 "당시 전남대 학생운동권의 전투조직인 '오월대' 소대장을 맡기도 했다"고 말했다. 오월대에서 활동한 것은 조재형 외에도 여럿이었다.
 
1980년~1990년대 각 대학에는 시위현장에서 경찰과 맞서는 전투조직(사수대)이 결성돼 있었는데, 광주의 경우 전남대 '오월대'와 조선대 '녹두대'가 대표적이었다. 서울대는 '폭풍대', 중앙대는 '의혈대', 건국대는 '황소대', 한양대는 '투쟁결사대' 등 대학별로 별도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들은 체계적인 조직을 갖춘 후 화염병과 각목 쇠파이프 등으로 무장하고 시위현장의 가장 앞에서 경찰과 맞섰다.
 
특히 광주지역 대학의 '오월대'와 '녹두대'는 인원도 많은 데다 전투력도 가장 높게 평가됐다. 조직적인 훈련과 연락체계를 갖췄고, 경찰이 시위를 진압하러 사복체포조인 백골단을 투입할 때 이들은 도망가지 않고 달려나가 맞서는 식으로 뛰어난 전투력을 자랑했다. 경찰의 원천봉쇄나 저지선을 뚫는데 발군의 역량을 발휘하며 학생운동의 전설로 평가될 정도였다
 
조재형은 "전대협 영상창작단장을 맡게 된 것도 당시 남총련(광주전남지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전투력이 출중했기 때문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 경험은 영화 <오월대> 제작 시도로 이어진다.
 
조재형에 따르면 1991년 전대협 출범식이 열렸을 때 모금한 돈으로 <그해 겨울 푸른 빛 플랭카드>를 제작한 후 필름영화를 하나 만들자고 해서 16mm 영화로 <오월대> 촬영에 들어갔다. 그러나 충무로에서 왔던 촬영감독이 광주 촬영 후 서울로 올라가면서 흐지부지된다.
 
1990년 대학에 입학해 아리랑 회원으로 활동했던 정우영(광주영화영상인연대 이사)은 "김조광수 감독이 전대협 문화국에 있을 때였는데, 전남대 용봉문학회 출신 소설가의 글을 바탕으로 아리랑과 함께 시나리오를 쓰고 촬영에 들어갔으나 제작비 문제로 중단됐다"고 말했다
 
이후 조재형은 영화 일을 하기 위해 1999년 서울에 왔고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한겨레영화학교 수료 후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다. <조폭 마누라> 조연출로 들어갔고, 이 시기 만나서 가까이 지낸 원신연(<봉오동> 감독), 손재권(<해치지 않아> 감독) 등과 함께 영화창작집단 M16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2013년 이후 광주로 귀향하기까지 충무로 생활을 꽤 오래하며 다큐멘터리 <세월오월> 등 여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98년 전남대 영화패 아리랑이 주최한 아리랑영화제

1998년 전남대 영화패 아리랑이 주최한 아리랑영화제 ⓒ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제공

 
전남대 아리랑은 1990년대 후반 국내 단편영화들을 소개하는 아리랑영화제를 개최하며 활동을 이어가다가 2000년대 이후 사라지게 된다. 정우영은 "영화동아리 아리랑은 2000년 대 초반까지 유지됐고, 사진동아리는 2010년까지 존재했다가 사라졌다"고 말했다.
 
아리랑의 성격에 대해 정우영은 "아리랑이 새로운 해외 예술영화도 봤지만, 학생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회변혁운동으로서 영화에 더 중점을 둔 동아리였다"며 "선배들이 통일선봉대와 전대협 출범식을 촬영 후 이를 비디오로 편집한 후 복사해서 배포했고, 대학에 입학해 이를 볼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조대영과 굿펠라스
 
'전남대 영화패 아리랑'으로 시작된 광주영화운동은 1990년대 들어 흐름이 바뀌게 된다. 조재형이 적극적으로 창작을 주도하며 전남대 아리랑의 체질을 바꾸기는 했으나,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예술영화를 추구한 시네마테크 운동이 더 탄력을 받게 된 것이다. 이는 1990년대 들어 한국 영화운동이 충무로라는 제도권으로 전선을 확대하면서, 기존 재야 영화운동은 독립예술영화로 구분되던 흐름과 맥이 닿아있다.
 
물론 5월의 기억이 내재한 지역적 특성상 반독재 민주화와 반제 반파쇼 투쟁의 성격이 영화운동의 기본바탕이었으나, 제작 역량의 한계 등이 작용하면서 새로운 시각의 예술영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뚜렷해진 것이다.  
 
 조대영 전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

조대영 전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 ⓒ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제공

 
예술영화에 초점을 맞춘 시네마테크 활동의 주역은 조대영(전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이었다. 1990년대 이후 광주 시네마테크 운동 역사와 함께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출발은 1991년 만든 예술영화 동호회 굿펠라스였다.
 
조대영은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장성의 초등학교 교실에서 16mm 영사기를 통해 보았던 반공영화가 영화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고, 초등학교 6학년 때 광주로 이사 와서 남도예술회관에서 봤던 <로보트 태권브이>가 생각난다"며 "이후 영화에 흥미를 느껴 1984년 창간된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 1989년에 창간된 <로드쇼>를 헌책방을 다니면서 구해서 보기도 했던 것이 시작이었다"고 회상했다.
 
1988년 대학에 입학한 조대영은 사진동아리에 가입하려다가 마음이 바뀌면서 직접 동아리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행에 옮겨진 것은 이후 1990년 단기사병(방위병)으로 군에 입대하면서였다.
 
지역에 영화모임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고, 군 복무를 하면서 의미 있는 문화생활을 하자는 생각이 더해지면서 1991년 3월 2일 '굿펠라스'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모임 이름은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 <좋은 친구들>(1991)의 영문 원제목에서 빌려왔다.
 
조대영은 "처음 시작할 때는 손으로 모집 원고를 쓰고 친구가 타자기로 쳐서 방위병들에게 돌렸다"며 "초기 8명이 모여 첫 모임을 가졌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1991년 12월 군 복무를 마친 조대영은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맞은 편에 있던 혜성교회 지하에 굿펠라스 모임 공간을 마련하면서 활동을 강화한다. 월세 15만 원을 내는 공간이었고 1주일에 한 번 열리는 상영에 15명 안팎 정도가 참여했다. 당시 매월 회비가 20만 원 정도 걷혔으나, 임대료 정도만 해결될 수 있는 비용이기에 운영비는 조대영이 혼자서 감당했다. 그만큼 예술영화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시기였다.
 
상영 작품은 예술영화들이었고 그 당시 광주에 있는 대형 비디오 가게들을 다니면서 빌려왔다. 조대영에 따르면 주로 많이 갔던 곳은 화정동 제2청사 옆에 있던 '라이프 비디오'로. 버스로 가서 테이프 수십 개를 빌려다가 보고 반납하고, 또 빌려다가 보고 또 반납하던 시절이었다.
 
 1994년 3월 개최된 페미니즘영화제 포스터

1994년 3월 개최된 페미니즘영화제 포스터 ⓒ 조대영 제공

 
이를 바탕으로 1994년 3월 전남대학교 백도 시청각실에서 '페미니즘 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첫 비디오 상영회를 개최한다. 1990년대 광주에서 열린 소규모 영화제의 시작이었다.
 
국내에서 '페미니즘 영화제'는 1993년 6월 이언경(감독. 작고) 김영(프로듀서) 손주연(제작자) 등이 중심이 돼 열린 것이 처음이었다. 그 영향이 1년 뒤 광주에서 개최된 페미니즘 영화제로 이어진 것이다.
 
조대영은 "페미니즘 영화제 작품 수급을 위해 서울의 민간 시네마테크 씨앙시에 손주연 대표를 만나러 갔더니 생각보다 많은 복사비를 요구했다"며 "돈도 없는데 그럴 수는 없다 싶어서 변영주 감독의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1993)만 그때 당시 10만 원을 주고 샀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이어 "출시된 비디오 중 일반인들이 모르는 영화 정보를 찾아서 화정동 비디오대여점에서 빌려 상영을 했다"며 "이후에 열렸던 많은 상영회 같은 경우는 주로 출시되지 않은 영화들이 프로그램에 포함됐고 그때의 영화 자료들은 '문화학교 서울'을 통해 빌려왔다"고 덧붙였다. 이때 문화학교 서울에서 활동하던 88학번 같은 또래 조영각(전 영진위 부위원장) 곽용수(인디스토리 대표) 등과 인연을 맺게 된다.
 
시네클럽에서 시네마테크로
 
1995년 이후 광주 시네마테크 운동에서 박상백(슈아픽쳐스 대표)도 빼놓을 수 없다. 박상백은 "1994년 군대 후임의 소개로 굿펠라스에 가서 예술영화를 처음 봤고, 당시 본 영화가 레오 카락스 감독이 연출한 영화였다"며 "굿펠라스에서 프랑스 영화를 비롯해 예술영화를 많이 접했다"고 회상했다.
 
박상백은 또한 "굿펠라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네마테크로의 발전을 고민하게 됐다"며 "굿펠라스가 시네클럽 성격이었기에, 영화를 집중적으로 탐구하는 시네마테크로서의 확장을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광주 굿펠라스가 주최했던 애니메이션영화제

광주 굿펠라스가 주최했던 애니메이션영화제 ⓒ 조대영 제공

 
이 결실이 1995년 4월 1일 설립된 '씨네마떼크 필름리뷰'였다. 굿펠라스 활동을 했던 박상백과 오성환 등이 운영진이었고, 조대영은 대표를 맡았다. 그렇다고 굿펠라스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네클럽 형태로 굿펠라스는 유지된 상태에서 별도의 시네마테크 활동이 시작된 것이었다.
 
필름리뷰는 광주 최초의 민간 시네마테크라는 의미가 있다. 개관을 기념해 현대작가주의영화제를 비롯해 컬트영화제 등 다양한 기획전을 선보인다. 조대영은 필름리뷰의 개관 기념 영화제를 소개하는 홍보물에 개관 취지를 이렇게 밝혔다.
 
"바야흐로 현대는 비주얼 시대이며 뉴미디어 시대인 셈이다. 갈수록 시대는 눈으로 즐기는 것을 요구하고 그 중심에 놓인 영화 또한 문화예술의 큰 영역을 차지할 것이다. 씨네마떼크 필름리뷰의 개관 목적은 대중예술로서의 영화가 올바르게 기능해야 한다는 데 있다. 지방색을 띨 것이며 에로와 코믹과 폭력 액션물이 영화의 대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작품을 찍는 풍토를 조성할 것이며, 영화팬들 스스로가 영화 아닌 예향을 깨닫기를 바라고 나아가서는 실천적 대안을 제시할 것을 전망한다. 이러한 것들이 필름리뷰가 해야 할 몫이고 영화로서의 광주를 실천하겠다는 굳은 신념이며 멋진 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5개월 뒤인 1995년 9월 필름리뷰는 '광주 씨네마떼끄 영화로 세상보기'로 분화하게 된다. 박상백은 "당시 20대 초반이었고, 열정과 의욕이 넘치다 보니 운영 방향 등에 대해 다소 이견이 생겨났다"며 "실무 역할을 했던 3인 중 나와 오성환이 따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새로운 시네마테크 이름은 현실과 동떨어져 생각될 수 없는 영화의 특성을 인식해 이름을 '영화로 세상보기'로 정했다.
 
'영화로 세상보기'는 회원이 많지는 않았으나 편협하지 않은 영화보기와 열띤 토론을 통해 영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시도했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계기로 전국씨네마떼끄연합이 결성되던 시기에는 광주를 대표하는 씨네마떼끄로서 참여한다.
 
 1998년 광주 씨네마떼끄 영화로 세상보기에서 주최한 닫힌영화 열린영화제

1998년 광주 씨네마떼끄 영화로 세상보기에서 주최한 닫힌영화 열린영화제 ⓒ 광주영화영상인연대 제공

 
 1998년 광주 씨네마떼끄 영화로 세상보기가 주최했던 닫힌영화 열린영화제 모습

1998년 광주 씨네마떼끄 영화로 세상보기가 주최했던 닫힌영화 열린영화제 모습 ⓒ 박상백 제공

 
박상백은 "'영화로 세상보기'는 20석 정도의 작은 시사실이 있는 시네마테크였다"면서 "회원제로 운영했고, 많은 시행착오와 경제적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고 말했다. 또한 "당시 영화에 대한 열정이 있었기에 2천만 원 정도를 마련해 비디오 라이브러리를 만들고 상영 장비를 구입하는 등 시네마테크 운영에 쏟아부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힘에 부치기도 했던 시기로 20대 시절이라 딱히 돈은 들어올 데가 없었고 회원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시네마테크가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영을 멈추고 싶지 않았다"며 "그 당시 안정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던 '문화학교 서울'이 부럽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영화로 세상보기'에서 상영했던 영화들은 당시 주목받던 짐 자무쉬를 비롯해 북미의 인디영화와 왕가위, 기타노 다케시, 허우 샤오시엔, 차이밍량,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이와이 슌지, 에드워드 양 등의 아시아 뉴-웨이브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고전영화 및 유럽의 예술영화와 제3세계 영화 등도 소개했다.
 
회원들을 대상으로 작은 영화제를 지속적으로 개최했으나 회원제운영의 한계에 맞닥뜨리면서 새로운 방식을 추구한다. 좀 더 범위가 넓은 관객 운동을 실현하기 위해서 당시 폐업하는 소극장(동시상영 극장)을 잠시 임대하는 방식으로 회원 외에 다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영화제를 개최한 것이다.
 
박상백은 "영화로 세상보기가 개최한 '퀴어 영화제', '현대 일본영화제', '애니메이션 영화제', '닫힌 영화, 열린 영화제' 등에 몰려드는 관객들을 보고 해외 예술영화에 대한 관심이 많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말했다. 영화제의 성공은 시네마테크 활동에 힘을 불어넣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한재섭(광주영화영상인연대 사무국장)은 "고등학생 시절 굿펠라스에 참여했고, 대학에 들어가서 '영화로 세상보기' 회원으로 활동했다"며 "영화제 행사가 열리면 매표, 포스터 붙이기, 보도자료 배포 등을 담당했다"고 시네마테크 활동을 추억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광주 시네마테크 운동을 주도했던 '영화로 세상보기' 활동은 2000년대 중반 이후 광주극장으로 옮겨간다. 박상백은 "2001년 개최됐던 광주국제영화제(광주국제영상축제)에 스태프로 참여한 후 2005년 서울로 올라와 <내 청춘에게 고함>(2006, 감독 김영남)의 제작에 참여한 뒤 필름포럼에서 일을 했다"며 "이후 영화로 세상보기 활동은 멈추지 않고 광주극장으로 옮겨가 계속 이어지는 중이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영화였던 조대영
 
필름리뷰가 분화된 이후 조대영은 굿펠라스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조대영은 "필름리뷰 대표를 1년을 채 못 채우고 나왔다"면서 "1996년 무렵 '굿펠라스'는 '도그마'로 이름을 바꾸었고, 고정 공간이 마련돼 있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여러 영화제를 개최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행사를 개최할 때 도그마 대신 주로 굿펠라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조대영은 "기존 이름이 많이 알려져 있었기에 영화제나 영화아카데미는 굿펠라스로 진행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조대영이 기획했던 영화아카데미

조대영이 기획했던 영화아카데미 ⓒ 조대영 제공

 
굿펠라스는 인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해 영화아카데미를 개설하기도 했다. 광주의 저변 확대를 위해 조대영이 발로 뛴 결과였다. 당시 초빙된 강사는 정성일(영화평론가), 박찬욱(감독), 변영주(감독), 변재란(영화평론가) 등으로 한국영화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던 영화인들이었다.
 
1999년 11월에는 전남대 앞에 있던 사회과학서점 '청년글방'에서 영화창작아카데미를 진행했는데, 독립예술영화에 대한 저변을 넓히는 데 있어 조대영은 다양한 기획력을 발휘했다.
 
조대영은 이후 2001년과 2002 광주국제영화제 운영팀장으로 활동했고, 직접 비디오대여점 '비디오보물섬'을 운영하면서 광주영상미디어센터 운영위원과 광주전남미디어행동연대 배급팀장을 맡는 등 광주 시네마테크 운동의 중심에서 잠시도 벗어나지 않았다. 보유하고 있는 서적이 4만 권이고 비디오가 5만 점일 만큼 아카이브 자산도 방대하다.
 
그는 비디오대여점을 운영하고, 비디오를 모은 계기에 대해 "1995년 '필름리뷰' 시작 이전에 성균관대학교 근처 혜화동에 있던 사설 시네마테크 '영화사랑'에 갔던 기억이 있다"며 "어느 날 그곳이 문을 닫는다고 해서 어머니를 졸라서 얻은 돈 당시 500만 원으로 국내 출시가 안 된 예술영화 비디오를 잔뜩 승합차를 빌려 광주로 가져 온 것이 비디오를 수집한 단초가 됐다"고 회상했다.
 
시네마테크 활동을 바탕으로 축적된 광주 영화운동은 1999년 맥지청소년 사회교육원이 운영지원했던 청소년 영화동아리 '출아'와 2001년부터 2006년 정도까지 광주 산수동과 사직동을 옮겨 다녔던 광주영상미디어센터 등을 통해 확장됐다. 그리고 2009년 광주독립영화협회를 만드는 결실을 맺게 된다.
 
한재섭(광주영화영상인연대 사무국장)은 조대영에 대해 "처음 만난 1994년부터 지금까지 그는 언제나 영화였다"며 "삶의 원칙과 삶을 구성하는 질료, 삶을 꾸려나가는 태도도 영화였고, 영화를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과 시간을 소모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했으며 영화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읽고 영화를 말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고 평가했다.
 
5.18의 기억이 다큐 감독으로 이끌어
 
광주 영화운동은 문화운동을 기반으로 확장됐기 때문인지 한국영화의 중심인 충무로보다는 광주라는 지역 안에서 독립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기틀을 다진 것이 특징이다. 부산의 영화운동이 서울과 활발히 교류하며 충무로를 통해 성과를 냈다면, 광주 영화운동은 서울과의 교류는 있었으나 충무로라는 제도권에서의 활동은 약한 차이를 나타냈다.
 
광주 영화운동의 흐름에서는 벗어나 있었으나, 충무로에서 한국 영화운동의 중심에 섰던 광주 출신 영화인들은 여럿이다.
 
1980년 5월을 직접 겪은 광주 출신 영화인으로 1980년대~1990년대 서울 영화운동의 주역으로 민족영화연구소 출신 김준종(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사무국장)이 대표적이다. 민족영화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했던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은 5.18 당시 전남대 재학 중이었다. 학창 시절을 광주에서 보낸 후 한국외국어대 연극반에서 활동했던 이정욱(감독. 한국외국어대 교수)은 김홍준 감독 밑에서 조감독을 거친 후 2003년 데뷔했다.
 
 진모영 감독(오른쪽), 한경수 감독

진모영 감독(오른쪽), 한경수 감독 ⓒ 진모영 제공

 
영화패 아리랑 출신은 아니지만 1990년대 전남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진모영(감독.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부집행위원장)도 빼놓을 수 없는 영화인이다. 진모영은 "대학 재학시절에는 학생운동에만 적극 참여했고, 영화동아리 활동 등은 없었다"며 "1997년 독립 프로덕션에 들어간 이후 본격적으로 영상물을 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춘이 막이> 프로듀서를 맡았고, <세월호 골든타임, 국가는 없었다> 공동연출자 중 한 명인 한경수(감독) 역시 광주 출신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한경수는 "광주에서의 중고등학교 시절 전교조 설립되고 합법화 투쟁을 할 당시 학내에서 전교조 지지 대자보를 붙이는 활동을 했고 한국외국어대 재학 시절에는 영화동아리 울림에 들어가려다가 학생운동이 절실하게 다가와서 학생회와 사회과학동아리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이어 "1999년 독립제작사에 들어가 다큐멘터리를 처음 시작했다"면서 "초등학교 때 발생한 5.18 민중항쟁이 다큐멘터리로 이끌었고 지금 제작 중인 5.18 관련 다큐멘터리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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