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종목의 팬들은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한국인들의 야구 사랑은 남다르다 못해 유별나다. 지난 2013년 LG트윈스가 11년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했을 때 플레이오프가 열린 잠실야구장은 옷장 속 먼지가 쌓여 있던 유광점퍼를 입고 나온 LG 팬들의 행렬로 가득 했다. 2008년 만년 하위팀이었던 롯데 자이언츠가 제리 로이스터 감독 부임 후 돌풍을 일으켰을 때 부산 시민들이 보여준 야구열기도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열광적인 응원을 보내던 팬들일수록 실망스런 일이 생기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불과 일주일 전에도 FA 자격을 얻은 8명의 주축선수를 타 구단으로 보냈던 두산 베어스의 팬들이 트럭시위를 통해 구단의 소극적인 투자에 대해 항의의 뜻을 나타냈다. 1980년대에는 경기 결과와 내용에 불만을 가진 팬들이 경기가 끝난 후 구단버스를 막아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심지어 버스에 불을 지르는 일도 있었다.

사실 스포츠를 가벼운 취미생활 정도로만 즐긴다면 결과나 성적에 크게 기분이 상하거나 분노할 일은 없다. 하지만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나 구단에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이입하고 자신의 삶과 동일시한다면 스포츠는 더 이상 즐거운 취미생활이 될 수 없다. 로버트 드 니로와 웨슬리 스나입스가 출연한 고 토니 스콧 감독의 <더 팬>은 과도한 팬심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야구팬의 이야기를 다룬 흥미롭고 독특한 스포츠 스릴러 영화다.
 
 <더 팬>은 두 배우의 높은 인지도 덕에 국내에서 서울 18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더 팬>은 두 배우의 높은 인지도 덕에 국내에서 서울 18만 관객을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 (주)미도영화사

 
액션 배우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웨서방'

올랜도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연기를 전공한 스나입스는 1987년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연출한 고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 < Bad >에 출연했다. 1989년 야구영화 <메이저리그>에서 도루왕 윌리 메이스 헤이스를 연기한 스나입스는 스파이크 리 감독의 <모베터 블루스>와 <정글 피버>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92년 항공액션 스릴러 <패신저57>을 통해 신예 액션스타로 떠올랐다.

1992년 우디 해럴슨과 <덩크슛>에 출연한 스나입스는 1993년 실베스타 스텔론과 함께 한 <데몰리션맨>에서 메인빌런 사이먼 피닉스를 연기하며 명성을 높였다. <고공침투>와 <머니 트레인>을 통해 액션배우로 입지를 굳혀가던 스나입스는 1995년 고 휘트니 휴스턴 주연의 잔잔한 드라마 <사랑을 기다리며>와 코미디 영화 <투 웡 푸>에 차례로 출연하며 액션배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러 장르에 도전했다.

웨슬리 스나입스의 여러 도전 중에는 1996년 스릴러의 거장 고 토니 스콧 감독, 대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함께 했던 스포츠 스릴러 <더 팬>도 있었다. <메이저리그>에 이어 7년 만에 맡은 야구선수 역할이었지만 도루왕이었던 윌리 헤이즈와 달리 <더 팬>에서는 MVP 3회의 홈런타자 바비 레이번을 연기했다. 다만 <더 팬>은 세계적으로 1800만 달러의 성적에 그치며 흥행에서는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몇 편의 다른 장르 외도에서 그리 좋은 성과를 얻지 못한 스나입스는 1998년 본업(?)인 액션으로 돌아와 그의 대표작이 된 <블레이드>를 선보였다. 마블코믹스의 뱀파이어 히어로를 실사화한 <블레이드>는 스나입스의 열연 속에 7년 동안 3편까지 제작됐고 세계적으로 4억17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스나입스는 2014년 전·현직 액션스타들이 대거 뭉친 <익스펜더블3>에도 출연했다.

사실 스나입스는 <블레이드> 시리즈를 끝낸 2000년대 중반 이후 하락세에 접어 들면서 최근엔 주로 2차 시장을 노리고 제작되는 저예산 영화에 출연하고 있다. 하지만 2003년 <사랑이 뭐길래> <엄마의 바다> 등을 연출했던 고 박철PD의 딸 박나경씨와 혼인신고를 하며 국내에서는 '웨서방'으로 불리고 있다. 슬하에 4명의 자녀(1녀3남)를 두고 있는 스나입스는 작년 박철PD가 별세했을 때 "우리의 영원한 거장, 아버님"이라 부르며 장인을 추모했다.

끝내 파국으로 끝나버린 어긋한 팬심
 
 웨슬리 스나입스(오른쪽)는 <더 팬>을 통해 대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연기를 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

웨슬리 스나입스(오른쪽)는 <더 팬>을 통해 대배우 로버트 드 니로와 연기를 할 좋은 기회를 얻었다. ⓒ (주)미도영화사

 
부진한 판매실적과 부적절한 태도로 직장에서 해고 당하고 이혼한 아내로부터 아들에 대한 접근금지명령까지 당한 길(로버트 드 니로 분)의 유일한 위안은 고향팀으로 이적한 야구스타 바비 레이번(웨슬리 스나입스 분)뿐이다. 바비는 개막전에서 옆구리 부상을 극복하고 만루홈런을 때려내지만 자신에게 포지션을 빼앗기고 등번호를 양보하지 않은 팀 동료이자 라이벌 프리모(베니치오 델 토로 분)와의 갈등 때문에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

바비의 슬럼프가 프리모 때문이라고 판단한 길은 우발적으로 프리모를 살해하고 공교롭게도 바비 역시 비슷한 시기 슬럼프에서 탈출해 연일 맹타를 휘두른다. 길은 바비를 관찰하다가 물에 빠진 바비의 아들 숀을 구하고 바비의 집에 초대 받는다. 하지만 길의 기대와 달리 바비는 "팬은 잘할 때는 달라 붙다가 못할 때는 침이나 뱉는 존재"라며 팬의 가치를 폄하한다. 그렇게 바비의 광팬이었던 길은 단숨에 그의 안티로 돌변한다.

바비의 아들을 유괴한 길은 바비에게 다음 경기에서 자신을 위해 홈런을 치고 자신을 향한 고마움을 전광판에 띄우라고 협박한다. 바비는 폭우 속에 열린 경기에서 인사이드파크 홈런을 때리지만 심판으로 위장한 길은 아웃을 선언하고 바비와 대치하던 길은 경찰이 쏜 총에 최후를 맞는다. 이후 경찰이 발견한 길의 은신처에는 납치됐던 바비의 아들과 길의 소년 시절 활약상을 모아 놓은 자료들이 있었다.

<더 팬>은 뛰어난 야구선수를 꿈꿨지만 부상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 야구광이 어긋난 팬심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가장 좋아했던 선수의 아들을 유괴하며 파멸에 이르는 스릴러 영화다. 1981년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과 1975년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던 대배우 로버트 드 니로는 변함없는 명연기로 타락한 야구팬을 잘 표현했다. 두 번째 야구선수를 연기했던 웨슬리 스나입스 역시 거만한 슈퍼스타 역할을 잘 소화했다. 

영화적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였지만 사실 야구 경기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들이 몇 차례 등장한다. 무엇보다 영화에서처럼 엄청난 폭우가 쏟아질 때는 돔구장이 아닌 이상 경기가 속개되지 않는다. 특히 방수포 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메이저리그 구장들은 폭우가 쏟아질 경우 빨리 경기를 중단해 그라운드가 젖는 것을 방지한다. 길이 주심으로 잠입하는 장면 역시 영화적 재미를 위한 장치일 뿐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힘들다.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 배우의 리즈시절(?)
 
 <더 팬>에서는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 베니시오 델 토로의 리즈시절(?)을 볼 수 있다.

<더 팬>에서는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연기파 배우 베니시오 델 토로의 리즈시절(?)을 볼 수 있다. ⓒ (주)미도영화사

 
푸에르토리코 출신 배우 베니시오 델 토로는 2001년 <트래픽>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2008년 체 게바라의 삶을 다룬 <체>를 통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다. 강한 카리스마를 갖춘 배우로 유명하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의 콜렉터처럼 코믹한 역도 소화 가능한 배우다.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유주얼 서스펙트>에서는 5명의 용의자 중 한 명인 프레드 펜스터를 연기하기도 했다.

델 토로는 <더 팬>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주전 중견수였다가 바비 레이번의 이적으로 좌익수로 밀려난 후안 프리모를 연기했다. 포지션을 빼앗긴 프리모는 등번호 11번 만큼은 바비에게 끝까지 양보하지 않았는데 영화에서 자세한 이야기가 소개되진 않았지만 프리모 역시 '11'을 어깨에 문신으로 새길 만큼 등번호에 대한 애착이 매우 크다. 하지만 자세한 사연을 알 길이 없는 길은 바비를 위해 프리모를 살해한다.

웨슬리 스나입스와 <투 웡 푸>에도 함께 출연했던 존 레귀자모는 <더 팬>에서 바비 레이번의 에이전트 매니 역을 맡았다. 슈퍼스타인 바비의 경기력은 물론 사생활까지 철저하게 관리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역할이다. 1996년작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에 의해 죽는 줄리엣의 사촌 티볼트를 연기했던 레귀자모는 애니메이션 <아이스 에이지> 시리즈에서는 나무늘보 시드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야구광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또 다른 영화 <날 미치게 하는 남자>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1986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2004년을 배경으로 한 로맨틱 코미디다. 이 영화에는 조니 데이먼과 제이슨 베리텍, 트롯 닉슨 등 당시 보스턴의 우승멤버들이 대거 카메오로 출연했다. 하지만 <더 팬>은 스릴러라는 장르와 비극으로 끝나는 결말 때문인지 현역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특별출연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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