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나 서유럽으로 해외여행을 가본 사람들은 현지인을 만났을 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친절을 겪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한국 사람들 역시 동남아나 아랍 사람들, 그리고 흑인들이 길을 물었을 때 필요 이상의 경계심을 가지거나 대답을 꺼렸던 기억이 있을지 모른다. 굳이 외국인이 아니어도 몸이 불편한 노약자를 대하거나 자신과 다른 점을 가진 사람을 대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거부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사실 따로 교육을 받지 않아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별'이 얼마나 나쁘고 우리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알게 모르게 누군가를 차별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차별금지법 제정마저 쉽지 않을 정도로,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린 내린 차별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특히 눈에 잘 보이지 않으면서도 우리 사회에 가장 만연한 차별은 바로 성차별이다. 1995년 이민용 감독의 장편 데뷔작 <개 같은 날의 오후>는 그 시절, 차마 입 밖에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던 성차별 문제를 무겁지 않게 다루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수작이었다.
 
 이민용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서울에서만 27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이민용 감독의 데뷔작이었던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서울에서만 27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 (주)순필름

 
1990년대 중반 가장 바빴던 여성배우

1988년 영화 <황금의 탑>의 단역으로 데뷔한 정선경은 <골목대장 형래와 검은 망또> <영구와 흡혈귀 드라큐라> <영구와 부시맨> 등 심형래가 주연을 맡은 어린이 영화에 주로 출연했다. 그러던 1994년 정선경은 장선우 감독의 문제작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주인공으로 캐스팅되면서 주연으로 데뷔했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는 파격적인 내용에도 서울에서만 38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통해 4개 영화제의 신인상을 휩쓴 정선경은 단숨에 충무로와 방송가가 동시에 주목하는 신예스타로 떠올랐다. 그리고 정선경은 1995년 한 해 동안 SBS 드라마 <장희빈>과 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돈을 갖고 튀어라> 그리고 <개 같은 날의 오후>에 동시에 캐스팅됐다(배우 인재풀이 좁았던 1990년대까지만 해도 스타 배우가 1년에 3~4개의 작품에 겹치기 출연하며 '다작'을 하는 일은 다반사였다).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야 하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정선경 외에도 하유미, 손숙, 김보연, 송옥숙, 문수진 등 여러 여성 배우들이 '집단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영화였다. <개 같은 날의 오후>는 남녀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담은 파격적인 소재를 코믹하게 담아냈고 서울에서만 27만 관객을 동원하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정선경은 <개 같은 날의 오후>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정선경은 1996년과 1997년 이병헌과 함께 한 두 편의 영화(<그들만의 세상> <지상만가>)가 흥행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드라마 <파랑새는 있다>를 통해 짧은 슬럼프를 극복했다. 1999년에는 드라마 <국희>에서 손창민을 짝사랑하는 신영을 연기하며 데뷔 후 최초로 악역 연기에 도전하기도 했다(물론 드라마 말미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려 대신 총을 맞으며 선역으로 돌아온다).

정선경은 2000년대 들어 1990년대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현대극과 사극,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꾸준한 연기활동을 선보였다. 2007년 재일교포와 결혼해 슬하에 두 딸을 두고 있는 정선경은 결혼 후 일본으로 이주했다가 남편의 싱가포르 발령으로 2013년부터 싱가포르에서 생활하고 있다. 비록 비슷한 또래의 김혜수나 전도연처럼 긴 시간 롱런하고 있진 못하지만 정선경은 1990년대 누구보다 화려한 전성기를 보낸 배우였다.

남녀문제 아닌 모든 차별에 대한 이야기
 
 <개 같은 날의 오후>는 특정배우가 아닌 10여 명의 여성배우들이 집단주인공으로 출연했다.

<개 같은 날의 오후>는 특정배우가 아닌 10여 명의 여성배우들이 집단주인공으로 출연했다. ⓒ (주)순필름

 
가만히 있어도 불쾌지수가 올라가는 뜨거운 여름날, 아파트 앞 그늘에 모여 앉아 수박을 먹던 부녀회 회원들은 도박 중독에 의처증까지 있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고 집으로 끌려가는 정희(하유미 분)를 발견한다. 남편의 선을 넘은 폭력에 분노한 윤희(정선경 분)로부터 시작된 남편을 향한 여성들의 응징은 결국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폭력에 가담했던 여성들은 자신들을 연행하려는 경찰을 피해 아파트 옥상으로 대피한다.

각자 다른 사연을 가진 여성들은 처음엔 오합지졸처럼 싸우지만 아들에게 구박받던 할머니(김애라 분)의 투신을 계기로 공권력에 맞서 싸우는 여전사들로 언론에 보도된다. 옥상 위 여성들이 하나로 뭉쳐 자신들의 정당방위를 주장하던 중 경찰에 의해 옥상에서 함께 투쟁하던 밤무대 가수 유미(김알음 분)가 남자인 것이 밝혀진다. 옥상 위 여성들은 큰 혼란에 빠지지만 경숙(손숙 분)의 설득에 사회적 약자였던 유미도 옥상에 남게 됐다.

옥상 위 여성들은 사다리차를 타고 올라온 홍연주 기자(문수진 분)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기다리다 못한 경찰들은 특수진압대를 투입해 강제연행에 나서고 자신들의 생각을 세상에 충분히 알렸다고 판단한 여성들은 아파트로 모인 여성단체들의 응원을 받으며 한 명씩 옥상에서 뛰어내린다(물론 아파트 바닥엔 경찰이 설치한 공기 안전매트가 있었다).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정희를 돕다가 졸지에 살인자로 내몰린 아파트의 여성들이 차별에 맞서는 이야기다. 하지만 <개 같은 날의 오후>는 남녀차별만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세상의 편견 때문에 오해받고 절박한 상황에 놓이게 된 약자들을 위한 영화였다. 실제로 <개 같은 날의 오후>는 이민용 감독을 비롯해 장진 감독, 훗날 <항거: 유관순 이야기>를 만드는 조민호 감독 등 남성들이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한 작품이다.

장편 데뷔작 <개 같은 날의 오후>를 통해 청룡 영화제와 대종상 영화제, 백상예술대상의 신인 감독상을 휩쓸며 화려하게 데뷔한 이민용 감독은 작가정신과 흥행 감각을 겸비한 대형 신인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이영애와 최민수를 앞세운 차기작 <인샬라>가 서울 관객 4만으로 흥행에 실패하면서 슬럼프에 빠졌고 2003년 박영규, 차인표 주연의 <보리울의 여름>마저 전국 8만 6000 관객에 그치며 사실상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마감했다.

최악의 남성캐릭터를 연기했던 정보석
 
 정보석은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 기동대장 역을 통해 최악의 남성상을 보여줬다.

정보석은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 기동대장 역을 통해 최악의 남성상을 보여줬다. ⓒ (주)순필름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 정보석은 기동대장 역할을 통해 최악의 남성 캐릭터를 보여줬다. 옥상에 올라간 여성들을 '살인자'라 부르고 부하들에게 걸핏하면 화를 내는 전형적인 상명하복의 '꼰대' 경찰인 기동대장은 아내와의 통화에서도 거칠게 명령조로 이야기하며 관객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그러면서도 고향 후배인 진압 전문가(조형기 분)에게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정보석은 <개 같은 날의 오후>의 기동대장을 통해 15년 후에 연기할 '희대의 악역' <자이언트> 조필연 캐릭터의 예행연습을 했다.

지금은 악역 전문 배우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이경영과 1990년대 가수 겸 배우로 연예계 최고의 만능 엔터테이너로 명성이 자자했던 김민종은 빈집털이를 하러 왔다가 그대로 빈집에 갇히는 좀도둑 콤비로 출연했다. 두 사람은 <개 같은 날의 오후>를 통해 그동안 이경영과 김민종의 이미지와는 다른 가볍고 코믹한 연기를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7명의 기성 감독들이 신인 배우들을 캐스팅해 만든 옴니버스 영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 가지 이유>로 주목받은 문수진도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 옥상 여성들에게 동화된 방송국 기자를 연기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96년 <코르셋>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던 문수진은 <올가미> <연인> 등에 출연하며 1990년대 중·후반까지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20대 중반의 이른 나이에 연예계 활동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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