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의 한 장면. ⓒ MBC

 
MBC <옷소매 붉은 끝동>에 나오는 정조 이산(이준호 분)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강말금 분)의 관계는 다소 밋밋하다. 마치 '쇼윈도 모자'처럼 좀 의례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대화 내용을 보면 어머니와 아들인 줄 알게 되지만, 만약 묵음으로 처리해놓고 화면을 보게 되면 두 사람이 무슨 사이인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화면상으로 나타나는 두 모자의 감정 교류가 일반적이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실제의 정조 임금이 어머니에게 보여준 인상적인 모습 중 하나는 어머니를 향해 적극 다가서는 모양새다. 그러면서도 어머니의 마음을 돌려보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었다.
 
일반적인 아들들은 아버지보다 어머니를 좀 더 좋아하는 경향이 있지만, 정조는 그렇지 않았다. 정조의 경우에는,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아버지에 대한 마음보다 명확히 아래에 있었다. 이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에 어머니가 끼친 영향이 있다는 정조의 부정적 인식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정조와 어머니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는 1735년에 출생했다. 사도세자는 열 살 때부터 기득권층을 비판했다. 왕실 사돈인 외척들에 대해서는 특히 그랬다. 이런 세자가 1749년부터 13년간 임금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했으니, 그가 국정 관리를 대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수세력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아버지 영조와의 관계마저 불편해진 사도세자는 음력으로 임오년 5월인 양력 1762년 7월 여드레 동안 뒤주(쌀통)에 갇혔다가 세상을 떠났다(임오화변).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앞에서 끌려 나가고 말았다. 이때 정조는 열 살이었다. 이 나이에 그런 경험을 했으니, 임오화변이 정조의 심리에 얼마나 큰 상처를 남겼을지 알 수 있다.
 
그 뒤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눈총을 받으며 살았다. 그가 정상적인 임금이 되자면 아버지의 명예 회복과 복권이 필요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회한과 더불어 아버지의 명예회복에 대한 집념이 그를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 대한 애착이 한층 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조의 개혁 정치가 사도세자의 개혁 정신을 계승한 것도 그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앞장선 기득권층과 왕실 외척 속에 어머니의 집안도 있었다. 사도세자가 죽던 날, 정조의 작은외할아버지인 홍인한은 너무 기뻐 한강에서 뱃놀이를 했다. 또 정조가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에게 애원할 때 정조를 밖으로 끌어낸 사람은 다름 아닌 혜경궁 홍씨였다. 영조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혜경궁이 차단했던 것이다.
 
혜경궁은 남편 집안인 왕실보다 자기 집안의 이익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남편의 죽음을 적극적으로 막지 않고 오히려 방조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랬기 때문에 어머니에 대한 정조의 마음에는 효심도 당연히 들어 있었겠지만, 원망의 마음도 함께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자경전 터와 안내문. 자경전이 경모궁을 바라보도록 설계됐다는 설명이 밑줄 친 부분에 적혀 있다.

자경전 터와 안내문. 자경전이 경모궁을 바라보도록 설계됐다는 설명이 밑줄 친 부분에 적혀 있다. ⓒ 김종성


그런 정조의 심리가 묻은 흔적 중 하나가 오늘날 창경궁 언덕에 남아 있는 '자경전 터'다. 자경전은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집이다. 임금이 된 이듬해인 1777년에 축조했다. 언덕에 있기 때문에 동쪽 건너편 서울대병원 마당이 잘 보인다. 자경전에서 방문을 열면 서울대병원 마당이 잘 보이도록 설계됐던 것이다.
 
바로 그 서울대병원 마당 자리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이 있었다. 자경전 터와 경모궁 터의 거리는 약 500미터다. 지금은 의과대학 건물이 가로막고 있어 자경전에서 경모궁이 눈에 띄지 않지만, 고층 건물이 없었던 18세기에는 잘 보였을 것이다.
 
자경전 축조에 담긴 정조의 의도는 어머니가 방문을 열 때마다 아버지의 사당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버지를 생각하도록 만들려는 정조의 의중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혜경궁 역시 사도세자의 비극에 한몫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방문을 열고 나갈 때마다 남편 사당을 바라보는 일이 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혜경궁 입장에서는 섬뜩한 일이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할아버지에게 애원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을 끌어낸 사람이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잘 기억했을 것이다. 그런 정조가 자경전을 그 위치에 축조한 것은 좋게 해석하면 어머니에게 아버지와의 화해를 촉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나쁘게 해석하면 어머니에게 반성을 촉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수원화성에서 열린 혜경궁의 환갑잔치

정조가 어머니를 수원화성에 모시고 가서 환갑잔치를 열어준 일도 비슷한 의미를 띠었다. 각종 서적에서 이 일은 정조의 효심을 증명하는 이벤트로 언급되고 있지만, 그렇게만 이해되기에는 부족한 측면이 많다.
 
정조가 수원화성을 세운 것은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서였다. 한양에는 아버지를 죽인 양반 기득권세력이 많았다. 그래서 상인과 농민들을 중심으로 수원화성을 세운 뒤 이곳을 거점으로 아버지 명예회복과 개혁정치를 완성하고 싶어 했다. 이를 위해 화성 신도시 건설에 착공하고 아버지 무덤을 화성으로 옮겼다. 그런 뒤인 1795년에 어머니 환갑잔치를 수원화성에서 열었다. 아버지 무덤이 옮겨진 상태에서 어머니를 그리로 모시고 갔던 것이다.
 
혜경궁한테는 죽은 남편이 끔찍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 무덤이 있는 곳으로 모시고 갔다. 정조가 어머니의 심기를 배려했다면 이곳에서 잔치를 열지는 않았을 것이다.
 
 환갑잔치에 참석한 혜경궁(왼쪽 사진)과 정조(오른쪽 사진). 화성행궁에서 찍은 사진.

환갑잔치에 참석한 혜경궁(왼쪽 사진)과 정조(오른쪽 사진). 화성행궁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정조의 어머니는 기득권세력을 위해서 살았고, 정조의 아버지는 기득권세력과 싸우다 죽었다. 정조는 아버지의 흔적이 있는 곳으로 어머니를 이끌고 갔다. 수원화성까지 가는 동안 혜경궁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정조는 어머니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면서도 어머니의 마음을 돌리려고 노력한 아들이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정조는 궁녀 성덕임(이세영 분)에게는 절절한 눈길을 보내면서도 어머니에게는 밋밋한 눈길을 보낸다. 하지만, 실제의 정조는 어머니에 대해서도 또 다른 의미의 절절한 눈길을 보낸 아들이었다.
 
그런 정조의 마음을 아들 순조도 잘 알고 있었던 듯하다. 정조는 48세 때인 180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나서 16년 뒤에 어머니 혜경궁이 눈을 감았다. 혜경궁이 1815년에 사망했다고 적혀 있는 글들이 적지 않지만, 실제 사망은 1816년에 있었다. 1815년의 음력 12월 15일을 양력으로 바꾸지 않고 무심코 집필한 결과다. 그의 사망일은 1816년 1월 13일이다.
 
혜경궁이 사망하자, 순조 역시 아버지를 모방하는 듯한 행동을 했다. 26세인 순조는 할머니가 꺼림칙해 할 만한 일을 했다. 죽은 할머니의 시신을 할아버지와 합장시킨 것이다. 정조가 못 다한 것을 아들 순조가 마저 성취시킨 셈이다. 경기도 화성시에 소재한 융릉이 혜경궁 홍씨와 사도세자의 합장릉이 된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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