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사에 남을 만큼 크게 흥행했거나 개봉 당시엔 크게 주목 받지 못했더라도 훗날 관객들에게 재평가된 영화들은 시간이 지나 극장에 다시 걸리기도 한다. 개봉 당시 전 세계 흥행 1위를 기록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타이타닉>은 지난 2012년 3D로 재개봉해 국내에서만 36만 관객을 추가로 동원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개봉한지 15년이 지났어도 <타이타닉>의 감동은 여전히 관객들의 마음에 남아있던 것이다.

하지만 재개봉만으로 30만이 넘는 관객을 모은 <타이타닉>도 역대 재개봉 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지난 2004년에 개봉해 전국 17만 관객에 그쳤던 미셸 공드리 감독의 판타지 멜로 <이터널 선샤인>이 2015년 재개봉해 무려 49만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재개봉 영화 흥행 1위 기록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터널 선샤인>의 성공은 극장가에 옛날 영화 재개봉 붐을 가져오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타이타닉>과 <이터널 선샤인>이 재개봉 영화의 상징이 됐지만 국내 극장가에서 가장 많이 재개봉된 영화는 따로 있다. 2003년 처음으로 개봉한 후 2013년과 2015년, 2017년, 2019년, 2020년에 이어 올해도 12월 23일 재개봉 된 영화다. 

바로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연인들에게 가장 사랑 받는 영화이자 '로맨스 영화의 명가' 워킹타이틀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작정하고 만든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 <러브 액츄얼리>다.
 
 <러브 액츄얼리>는 올해까지 국내에서만 무려 6번에 걸쳐 재개봉했다.

<러브 액츄얼리>는 올해까지 국내에서만 무려 6번에 걸쳐 재개봉했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영국 로맨틱 코미디를 대표하는 작가 겸 감독

드라마 쪽을 보면 <도깨비>, <태양의 후예>의 김은숙 작가와 <시그널>, <킹덤>의 김은희 작가,<펜트하우스>의 김순옥 작가 등 국내에 뛰어난 작가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영화 쪽에서는 감독들이 각본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 뛰어난 전문 작가는 찾기가 쉽지 않다. 2000년대 초반 <주유소 습격사건>,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특사>의 박정우 작가가 영화전문작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2004년 <바람의 전설>을 연출하며 감독 타이틀을 얻었다.

하지만 영국 출신의 리처드 커티스는 감독이 아닌 작가로 먼저 명성을 얻었다. 80년대 초반부터 '미스터빈'으로 유명한 로완 앳킨슨과 호흡을 맞춘 커티스는 <블랙애더>,<미스터빈> 등 코미디 작가로 먼저 이름을 알렸다. 그러던 1994년 배우 휴 그랜트의 출세작이었던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을 통해 골든글러브와 아카데미 각본상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99년 <노팅 힐>의 각본을 쓰며 또 한 번 인기작가의 명성을 이어간 커티스는 2001년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통해 런던 비평가 협회상에서 작가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작가로만 활동을 이어가던 커티스는 2003년 크리스마스 시즌을 겨냥해 만든 <러브 액츄얼리>의 각본을 쓰면서 처음으로 직접 메가폰까지 잡았다. 당시 커티스는 이미 40대 후반을 향해가고 있었기에 감독으로 데뷔하기엔 결코 이른 나이가 아니었다.

영화계 안팎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커티스의 감독 데뷔는 성공적이었다. 커티스 감독 특유의 따뜻한 이야기에 영국 출신의 스타배우들이 총출동한 <러브 앨츄얼리>는 4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세계적으로 2억4500만 달러의 성적을 기록하며 크게 흥행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커티스는 데뷔작 <러브 액츄얼리> 이후 <브리짓 존스의 일기: 열정과 애정>, <카페의 소녀> 각본을 쓰며 작가로서 자신의 본분을 이어갔다.

2009년 커티스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 <락앤롤 보트>가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지만 2013년 기획부터 각본, 연출까지 참여한 <어바웃 타임>이 제작비의 3배가 넘는 흥행수익을 올리며 건재를 과시했다. 2018년 <맘마미아2>와 2019년 대니 보일 감독이 연출한 <예스터데이>의 각본을 쓰며 60대 중반의 나이에도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리처드 커티스는 '영국 로맨틱 코미디의 아이콘'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인물이다.

모든 관객들 공감할 수 있는 10가지 사랑이야기
 
 <러브 액츄얼리>의 스케치북 고백은 수 많은 매체에서 패러디된 명장면이다.

<러브 액츄얼리>의 스케치북 고백은 수 많은 매체에서 패러디된 명장면이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러브 액츄얼리>가 처음 기획됐을 때 이 방대한 이야기가 순조롭게 완성될 거라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할리우드에서 자리를 잡고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배우들의 스케줄을 맞추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휴 그랜트를 비롯해 리암 니슨, 콜린 퍼스, 엠마 톰슨, 빌 나이, 키이라 나이틀리, 마틴 프리먼 등 영국 출신의 배우들은 바쁜 시간을 쪼개 기꺼이 이 아름다운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러브 액츄얼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이야기를 그려낸다. 부부간의 사랑부터 남매간의 사랑, 영국수상과 직원의 사랑, 소설가와 가정부의 사랑, 친구의 아내에게 반한 남자의 짝사랑, 미국으로 떠나는 여학생을 흠모하는 소년의 짝사랑,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등 무려 10쌍의 사랑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집단주인공을 내세우는 영화라도 물리적으로 시간을 쪼개지 않는 이상 적절하게 시간과 분량을 배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뛰어난 작가 출신의 커티스 감독은 적절하게 시간과 분량을 조절해 출연하는 배우들이 모두 주인공이 되도록 영화를 만들었다. 관객들이 어떤 캐릭터에 몰입하든 영화에 공감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심지어 커티스 감독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서도 배우들의 지명도를 고려하지 않았다.

각 캐릭터들마다 사랑이 연결되는 결정적인 장면들이 있지만 역시 관객들에게 가장 뜨거운 호응을 얻은 <러브 액츄얼리>의 최고 명장면은 마크(앤드류 린콘 분)가 줄리엣(키이라 나이틀리 분)에게 전하는 '스케치북 고백장면'이었다. 줄리엣은 마크가 찍은 결혼식 비디오에서 자신만 찍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크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줄리엣의 신혼집에 찾아가 스케치북으로 말 없이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영화 속에서는 대단히 아름답게 표현되지만 사실 줄리엣은 '악녀'에 더 가깝다. 고백을 마친 마크 혼자 마음을 정리하게 내버려 둬야 하는 상황에서 줄리엣은 마크에게 뛰어와 키스를 한다.

커티스의 두 페르소나 빌 나이-로완 앳킨슨
 
 빌 나이는 <러브 액츄얼리>를 시작으로 커티스 감독과 4개의 작품을 함께 했다.

빌 나이는 <러브 액츄얼리>를 시작으로 커티스 감독과 4개의 작품을 함께 했다. ⓒ (주)제이앤씨미디어그룹

 
<러브 액츄얼리>에서 휴 그랜트와 콜린 퍼스, 엠마 톰슨 같은 쟁쟁한 배우들을 제치고 엔딩 그레딧의 최상단을 차지한 배우는 바로 한물 간 가수 빌리 맥을 연기했던 빌 나이다. 빌리 맥은 <온 누리에 사랑은>이라는 노래의 가사만 살짝 바꿔 <온 누리에 크리스마스는>으로 리메이크해 크리스마스 시즌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빌리는 엘튼 존이 초대한 화려한 파티를 마다하고 매니저 조(그레고르 피셔 분)와 크리스마스를 보낸다. 

빌 나이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의 데비 존슨, <언더월드> 시리즈의 빅터 등 개성 있는 악역 연기로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진 배우다. <작전명 발키리>에서는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보충군 부사령관을 연기하기도 했다. <러브 액츄얼리>를 통해 리처드 커티스 감독과 인연을 맺은 빌 나이는 <카페의 소녀>, <락앤롤 보트>,<어바웃 타임> 등에 차례로 출연하며 한 동안 커티스 감독의 '페르소나'로 활약했다.

'미스터 빈' 로완 앳킨슨도 <러브 액츄얼리>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등장해 이야기 진행에 도움을 줬다. 해리(고 앨런 릭먼 분)가 부인을 놔두고 부하직원에게 고가의 목걸이를 선물하려 할 때는 선물 포장을 천천히 하면서 목걸이 구입을 못하게 막았다. 또한 샘(토마스 생스터 분)이 공항직원에게 막혀 조안나(레베카 브라이언 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지 못할 때는 공항직원의 시야를 가려 샘이 출국장으로 들어갈 수 있게 돕는다.

빌 나이가 2000년대 이후 커티스 감독과 많은 호흡을 맞췄다면 8~90년대부터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던 '원조 커티스의 남자'는 단연 로완 앳킨슨이다. 커티스는 두 사람의 출세작인 <블랙애더>를 시작으로 TV시리즈 <미스터 빈>, 1997년에 제작된 <빈> 극장판의 각본을 썼고 2007년에 개봉한 <미스터 빈의 홀리데이>에서는 기획에 참여했다. 한마디로 커티스와 앳킨슨은 서로의 인생에서 없어서는 안될 '깐부' 같은 사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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