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빈(의빈 성씨)과 정조 이산의 사랑을 다룬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의 최근 방영분에서는 세손인 이산(이준호 분)이 무장 병력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묘사됐다.
 
10일 방영된 제9회는 세손이 휘하 병력 및 궁녀·내관들과 함께 대궐을 떠나 임시 처소에 유숙하다가 무장 병력의 습격을 받는 장면을 보여줬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싫어하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세력이 벌인 일이었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급속히 쇠약해져 정조의 즉위가 임박해지자, 반대파들이 급한 마음에 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런데도 세상은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외딴 행궁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조정의 주목을 끌지 못한다. 믿어주지 않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정조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세력이 조정을 장악한 탓에, '나를 죽이려는 무장 세력이 있었다'는 그의 호소는 먹혀들지 않는다.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들의 틈바구니에서, 사도세자의 아들로서 세손 역할을 해야 하는 그의 처지를 반영하는 장면이다.
 
 MBC <옷소매 붉은 끝동>

MBC <옷소매 붉은 끝동> ⓒ MBC

 
정조를 위협한 세력들
 
실제의 정조 역시 세손 시절부터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거기다가 정적들의 감시를 일상적으로 받았다. 음력으로 정조 즉위년 6월 23일자(양력 1776년 8월 6일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적들은 세손 주변에 첩자들을 대거 배치해놓고 밤낮으로 주시했다. 세손을 보좌하는 궁궐 직원 상당수가 정적들에게 수고비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항상 불안에 떨었다. 그 같은 정조의 내면 상태를 입증하는 기록이 위 날짜의 <정조실록>이다.
 
이에 따르면, 임금이 된 지 3개월 보름 뒤에 정조는 세손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에게 가해졌던 위협을 회고했다. 외출복도 벗지 못한 채 잠자리에 드는 일이 많았으며, 그런 상태가 수개월간 이어진 적도 있다고 술회했다.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 정조를 얼마나 위협했는지는 정조에 대한 암살 시도가 즉위 이후에도 계속된 사실이 잘 보여준다. 정조가 즉위한 이듬해인 정조 1년 7월 28일(1777년 8월 30일)에 있었던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날 정조는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에서 서쪽으로 약 500미터 거리인 경희궁에 있었다. 그곳 존현각에서 밤늦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때 그의 두 귀에 조심스러운 발자국 소리가 흘러 들어갔다. 경희궁 대문에서 이어지는 기다란 회랑의 지붕을 누군가가 밟는 소리였다. 통행금지가 있었고 자동차가 없었던 시절이므로 그런 소리가 얼마든지 귀에 들릴 수 있었을 것이다.
 
눈길은 책에 두고 귀는 바깥에 주목하던 정조는 대문 쪽에서 접근하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자기 머리 위에서 멈추는 것을 느꼈다. 자객들이 회랑 지붕 위에서 존현각 지붕 위로 건너갔던 것이다.
 
침입자는 정조의 경호 장교인 강용휘와 민간 자객인 전흥문이었다. 존현각 지붕 위로 건너간 이들은 정조의 방에 침투하고자 기와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영화나 드라마 같았으면 수십 명의 자객들이 지붕 위로 침투했다가 방문 아래로 뛰어내렸을 수도 있지만, 실제의 두 자객은 지붕을 뚫고 정조의 머리 위로 뛰어내리는 방법을 강구했다.
 
때마침, 정조 옆을 지키던 내시도 잠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수행 내시가 존현각 주변의 경호 상태를 체크하느라 임금 옆에 아무도 없었다. 정조의 공포심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의 정조 같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검을 꺼내거나 활을 집어 들었을 것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 속의 정조 이산 같았으면, 자객이 수십 명 침투해도 용감히 활을 꺼내 들었을 것이다.
 
 MBC <옷소매 붉은 끝동>

MBC <옷소매 붉은 끝동> ⓒ MBC

 
하지만 만 25세의 실제 정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기 머리 위에서 기와를 걷어내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 뒤 문을 열고 고함을 쳤다. 어서들 모이라고 외친 것이다.
 
고함소리를 들은 궁궐 사람들이 존현각으로 몰려들자, 강용휘와 전흥문 역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들은 곧바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런 뒤 밤새 궁궐 숲속에 숨어 있었다. 양력 8월이었으니 춥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자객은 다음 날 아침 대문을 통해 유유히 빠져나갔다. 내부 협력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정적들이 정조를 우습게 봤다는 점은 13일 뒤 전흥문을 재차 파견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경희궁 사건에 놀란 정조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자 이번에는 창덕궁으로 전흥문을 파견했다.
 
전흥문은 제2차 침입 때는 정조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창덕궁 담장을 넘다가 경비 병력에 발견돼 체포되고 말았다. 영화나 드라마 같았으면 담장을 훌쩍 뛰어넘어 안쪽으로 달려갔겠지만, 실제의 자객은 그렇게 날렵하지 못했다.
 
이 정도로 정조는 일상적으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정적들은 자신들이 다수파인 점을 믿고, 끊임없이 대담하게 정조의 목숨을 노렸다.
 
그래서 세손 시절의 정조가 특히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이라는 점을 공공연히 언급하지 않는 것이었다. 정적들에게 매수된 사람들이 자기 주변을 둘러싼 상황에서, 상대 진영에 흘러들어갈 이야기를 입 밖에 낼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정조의 돌발행동

그렇게 조심스러웠던 정조가 즉위년 3월 10일(1776년 4월 27일) 즉위식에서는 뜻밖의 돌발행동을 일으켰다. '취임사'를 읽던 그의 입에서 갑자기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충격적인 이 발언으로 즉위식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음은 물론이다.
 
경희궁에서 벌어진 암살미수 사건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다. 즉위식 발언에 뒤이어 정조가 취한 일련의 후속 조치들이 보수세력을 긴장시킨 결과였다. 사도세자의 사당과 무덤을 격상시키고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가담한 홍인한·정후겸 등에 대한 사법적 응징에 착수하자, 보수세력이 강용휘·전흥문을 매수해 벌인 일이 바로 경희궁 암살미수 사건이었다.
 
이렇게 정조는 임금이 되기 전에도, 임금이 된 후에도 항상 암살 공포에 시달렸다. 외딴 행궁에서 세손 암살미수가 벌어졌는데도 조정이 별다른 관심을 표하지 않는 드라마 속 상황은, 물론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지만, 자신이 죽기를 바라는 보수세력들에 둘러싸인 정조의 암울한 처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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