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 종목 중에서 배구만큼 피지컬이 중요한 스포츠도 드물 것이다. 수원전산여고(현 한봄고) 시절 윙스파이커와 세터, 리베로까지 소화하던 다재다능한 선수였던 한수진(GS칼텍스 KIXX)은 2017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한수진은 프로 입단 후 공격수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세터 역시 작은 키 때문에 한계를 보였다. 결국 한수진은 현재 수비전문 선수인 리베로로 활약하고 있다.

농구 역시 배구 못지 않게 피지컬이 중요한 스포츠로 꼽힌다. 1980~1990년대 한국농구를 주름 잡았던 '슛도사' 이충희나 '농구대통령' 허재도 밟지 못한 NBA 무대를 221cm의 하승진이 한국인 최초로 진출한 것이 그 증거다. 다만 농구에서는 NBA 평균 이하의 신장을 가진 스테판 커리(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가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는 것처럼 선수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신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여자프로농구에서도 선수들의 피지컬이 좋아지면서 평균신장이 점점 커지는 추세였다. 하지만 이번 시즌에는 박지수(KB스타즈) 같은 장신 선수들의 활약만큼 유난히 단신 선수들의 분전이 돋보이고 있다. 170cm도 채 되지 않는 신장을 가지고 있지만 장신숲을 헤집고 다니면서 과감한 슛과 날카로운 패스로 경기 흐름을 바꿔놓으며 농구팬들을 열광시키는 WKBL의 대표적인 단신선수는 누가 있을까.

[안혜지] 리그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패스마스터
 
 슛만 장착한다면 안혜지는 WKBL에서 완전무결한 포인트가드로 군림할 수 있다.

슛만 장착한다면 안혜지는 WKBL에서 완전무결한 포인트가드로 군림할 수 있다. ⓒ 한국여자농구연맹

 
166cm의 신장을 가진 은광여고의 가드 박세미는 지난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신세계 쿨캣의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박세미 이후 8년 동안 신인 드래프트에서 160cm대의 신장을 가진 선수가 전체 1순위 지명을 받은 경우는 없었다. 그러던 2014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64cm의 작은 신장을 가진 동주여상의 안혜지가 '66득점 소녀' 김진영(BNK썸)을 제치고 9년 만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된 160cm대의 신장을 가진 선수가 됐다.

안혜지는 프로 데뷔 후 네 시즌 동안 71경기에서 1.63득점 1.38어시스트에 그치며 프로무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안혜지에게 부족했던 건 실력이 아닌 출전시간이었다. 안혜지는 KDB생명의 주전포인트가드 이경은(신한은행 에스버드)이 팀을 떠나자마자 주전포인트가드 자리를 차지해 2018-2019 시즌 6.54득점 6.3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단숨에 리그 어시스트 여왕에 등극했다.

안혜지는 BNK가 팀을 인수한 2019-2020 시즌 데뷔 후 처음으로 두 자리 수 득점(10.30점)을 올리며 무려 7.70개의 어시스트로 두 시즌 연속으로 어시스트 타이틀을 사수했다. 안혜지는 지난 시즌 단 한 개 차이로 우리은행 우리원의 김진희에게 어이스트 1위 자리를 내줬지만 이번 시즌 경기당 6.36개의 어시스트로 다시 어시스트 1위를 달리고 있다. 물론 지난 세 시즌 동안 안혜지가 기록한 774개의 어시스트는 WKBL에서 독보적인 1위다.

저돌적인 돌파 후 패스가 특기인 안혜지의 가장 큰 약점은 외곽슛이다. 실제로 안혜지의 통산 3점슛 성공률은 26.7%에 불과하고 이번 시즌에도 24.7%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안혜지는 예년처럼 기회가 와도 슛을 던지지 못하고 위축되기 보다는 수비가 떨어지면 과감하게 슛을 던지며 감각을 찾아가고 있다. 이미 리그 정상급 포인트가드로 손색이 없는 안혜지가 외곽슛까지 갖춘다면 안혜지는 포인트가드로서 또 한 단계 '진화'할 것이다.

[허예은] 어시스트 1위 다투는 2001년생 유망주
 
 2001년생 유망주 허예은은 스타군단 KB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성장하고 있다.

2001년생 유망주 허예은은 스타군단 KB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성장하고 있다. ⓒ 한국여자농구연맹

 
2005년의 박세미에서 2014년의 안혜지까지. 신장 170cm를 넘지 않은 단신 선수가 전체 1순위로 뽑히기까지는 무려 9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시 6년의 시간이 지난 2020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신장 165cm의 단신 선수가 매 시즌 우승에 도전하는 강호 KB스타즈에 전체 1순위로 지명 받았다. 상주여고 2학년 시절 2경기 연속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농구팬들을 놀라게 했던 허예은이 그 주인공이다. 

허예은은 입단 초기부터 드리블, 패싱, 리딩, 돌파능력, 시야까지 겸비한 특급유망주로 프로무대에서 충분히 통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허예은은 프로 입단 후 두 시즌 동안 37경기에서 2.84득점 1.59어시스트에 그쳤다. 작은 신장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상대팀 작전에 대처할 경험이나 노하우를 갖추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허예은이 프로에 적응하기 까지는 두 시즌이면 충분했다. 

허예은은 지난 시즌까지 30분 이상의 출전시간을 기록하며 KB 부동의 주전포인트가드로 활약하던 심성영을 제치고 이번 시즌 KB의 주전포인트가드로 활약하고 있다. 경기당 평균 29분 47초를 소화하고 있는 허예은은 8.6득점 6.13어시스트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해주고 있다. 안혜지에게 단 0.23개 뒤진 어시스트 2위를 달리고 있는 허예은은 3~5위권과의 차이를 20개 이상으로 벌리면서 사실상 어시스트 경쟁 구도를 2파전으로 만들고 있다.

허예은이 가진 최대 장점은 아직 만 20세(2001년생)에 불과한 어린 나이와 함께 그녀의 소속팀이 이번 시즌 독보적인 선두(14승 1패)를 달리고 있는 KB스타즈라는 점이다. KB에는 득점 1위 박지수와 3점슛 1위 강이슬 등 최고의 실력을 가진 쟁쟁한 동료들이 즐비하다. 자신의 패스를 꼬박꼬박 득점으로 연결시켜 줄 수 있는 동료들이 많다는 것은 포인트가드로서 가장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강계리] 9시즌 만에 기회 잡은 대기만성 가드
 
 강계리는 프로 입단 후 9시즌 동안 세 번의 이적을 거듭한 끝에 신한은행에 정착하고 있다.

강계리는 프로 입단 후 9시즌 동안 세 번의 이적을 거듭한 끝에 신한은행에 정착하고 있다. ⓒ 한국여자농구연맹

 
안혜지와 허예은은 전체 1순위로 입단해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안에 주전 자리를 차지해 곧바로 좋은 성적을 올린 선수들이다. 하지만 해가 바뀌면 한국나이로 서른이 되는 강계리(신한은행)는 꽤나 먼 길을 돌아 뒤늦게 빛을 보고 있는 대기만성형 선수다. 춘천여고와 한림성심대를 나와 2013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1순위로 삼성생명 블루밍스에 입단한 강계리는 다섯 시즌 동안 한 번도 평균득점 5점을 넘기지 못했다.

2019년 1월 드래프트 동기 박혜미(삼성생명)와의 트레이드로 신한은행 유니폼을 입은 강계리는 13경기에서 7.08득점 3.3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드디어 빛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신한은행은 2018-2019 시즌이 끝난 후 FA 김이슬(하나원큐)을 영입했고 강계리는 보상선수로 지명 받아 하나원큐에서 두 시즌 동안 활약했다. 강계리는 2020년 박신자컵에서 박신자컵 역대 최초로 트리플더블을 기록하며 대회 MVP를 수상했다. 

그렇게 하나원큐에서 적응하던 강계리는 지난 5월 2:2 트레이드를 통해 다시 신한은행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번 시즌 신한은행에서 평균 23분 36초를 소화하면서 8.27득점 3.87리바운드 2.80어시스트 1.40스틸로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치고 있다. 지난 11일 BNK와의 경기에서 24분 동안 6어시스트 4스틸로 알토란 같은 활약을 선보인 강계리는 13일 하나원큐전에서 20득점으로 개인 최다득점 기록을 세웠다.

현재 신한은행은 이경은이 3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포인트가드로서 풀타임을 소화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팔방미인 에이스 김단비에게 게임 리딩을 모두 맡기면 팀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두 시즌 만에 팀에 복귀한 강계리의 활약은 구나단 감독대행에게는 대단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강계리 역시 프로 데뷔 9시즌 만에 찾아온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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