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6년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1300만, 2007년 심형래 감독의 <디워>가 82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최다관객 1위를 차지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괴물>과 <디워>의 흥행은 할리우드의 전유물이라 여기며 국내에선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괴수영화의 성공사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괴물>과 <디워>의 성공은 2011년 <7광구>라는 독특한 '혼종'을 낳기도 했다.

할리우드에서는 지난 1999년 (지금은 자매가 된) 워쇼스키 형제에 의해 <매트릭스>라는 엄청난 SF걸작이 탄생했다. <매트릭스>는 세계적으로 4억 6600만 달러(박스오피스 모조 기준)의 수익을 올리며 크게 흥행했고 오늘날까지도 <스타워즈> <터미네이터2>와 함께 대중문화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친 명작으로 꾸준히 회자되고 있다. <매트릭스>는 오는 22일 4번째 이야기 <매트릭스: 리저렉션>이 18년 만에 개봉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7광구>라는 혼종이 등장했던 것처럼 할리우드에서도 <매트릭스>의 성공 이후 세계관과 촬영기법 등을 모방한 아류작들이 많이 제작됐지만 대부분 큰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쉬운 흥행성적에도 그저 '<매트릭스>의 아류'로 취급하기엔 다소 억울한 부분이 있다. 액션 영화로서도 볼거리가 가득하지만 주제의식도 결코 가볍지 않은 크리스찬 베일 주연의 2002년작 <이퀼리브리엄>이다.
 
 2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 <이퀼리브리엄>은 <매트릭스>의 아류 취급을 받으며 흥행 실패했다.

2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저예산 영화(?) <이퀼리브리엄>은 <매트릭스>의 아류 취급을 받으며 흥행 실패했다. ⓒ 시네마서비스

 
55kg에서 90kg까지 오가는 변신의 귀재

1986년 만 12세의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크리스찬 베일은 이듬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전쟁영화 <태양의 제국>에서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하는 소년 제이미 역으로 일약 세계가 주목하는 아역 배우로 떠올랐다. 베일이 대중들에게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 부분은 할리우드에서 많은 아역배우들이 경험하는 '청소년기의 저주'를 벗어나 연기력과 흥행파워를 겸비한 훌륭한 성인연기자로 성장했다는 점이다.

1994년 위노나 라이더가 주연을 맡은 <작은 아씨들>에 출연한 베일은 2000년 메리 해론 감독의 <아메리칸 사이코>를 통해 열연을 펼치며 또 한 번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고 베일은 2002년 20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SF 액션 영화<이퀼리브리엄>에 출연했다. <이퀼리브리엄>은 세계적으로 530만 달러의 흥행성적에 그쳤을 정도로 극장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DVD 등 2차 시장에서의 선전으로 재평가 받았다.

베일은 2005년 천재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을 만나 <다크나이트> 3부작을 통해 고담시를 지키는 어둠의 기사로 변신했다. 물론 크리스찬 베일의 배트맨은 조커를 연기했던 고 히스 레저에 가려 주인공으로 크게 돋보이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베일은 브루스 웨인이 배트맨으로 성장하는 과정과 히어로로서의 고뇌를 잘 표현했다. 놀란 감독의 <다크나이트> 3부작은 세계적으로 24억 6200만 달러의 엄청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크리스찬 베일은 할리우드 내에서도 엄청난 몸무게 변화를 자랑하는 배우로 유명하다. 183cm의 훤칠한 신장을 가진 베일은 2004년에 개봉했던 <머시니스트>에서 체중을 55kg까지 감량했다가 2005년 배트맨을 연기하기 위해 90kg에 육박하는 근육질 몸매를 만들었다. 종합격투기 체급을 기준으로 하면 플라이급부터 라이트 헤비급까지 오간 셈인데 실제로 UFC에서도 플라이급과 라이트헤비급 사이를 넘나든 선수는 없었다.

<다크나이트> 3부작 이후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스타배우로 떠오른 베일은 <터미네이터: 미래전쟁의 시작> <파이터> <아메리칸 허슬> <빅쇼트> <바이스>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다. 2019년 맷 데이먼과 함께 <포드 V 페라리>에 출연했던 베일은 내년 여름 개봉 예정인 마블 스튜디오의 <토르: 러브 앤 썬더>에서 메인 빌런 고르를 연기하며 또 다른 카리스마를 발산할 예정이다.

여러 매체에서 오마주된 멋진 총기액션
 
 크리스찬 베일은 <이퀼리브리엄>에서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멋진 총기액션을 선보인다.

크리스찬 베일은 <이퀼리브리엄>에서 마치 춤을 추는 듯한 멋진 총기액션을 선보인다. ⓒ 시네마서비스

 
21세기 첫해 세계 3차 대전을 겪으며 인구수가 극감한 인류는 '라브리아'라는 통일 정부를 세우고 인간의 감정은 없애는 약품인 프로지움을 개발해 사람들에게 주기적으로 투약시켰다. 감정 유발자를 찾아내는 능력을 가진 존 프레스턴(크리스찬 베일 분)은 상부의 신뢰를 얻고 있는 라브리아의 유능한 요원이다. 하지만 프레스턴은 실수로 프로지움 약품을 깨트리고 공장까지 반란군의 공격을 받으면서 한동안 프로지움을 복용하지 못했다.

프로지움 미복용으로 감정을 갖게 된 프레스턴은 석양과 무지개를 보며 감동하고 자신을 따르는 개를 보호하기 위해 순찰부대를 소탕한다. 자신이 죽인 옛 동료의 안치소에 찾아가 뒤늦은 사과를 한 프레스턴은 감정유발자들의 본거지에서 반군의 지도자 유르겐(윌리암 피츠너 분)을 만난다. 그리고 유르겐은 뒤늦게 감정을 찾은 라브리아 최고의 요원 프레스턴에게 '만악의 근원'인 라브리아 영도자를 죽여 달라는 부탁을 한다.

프레스턴은 우여곡절 끝에 요원들을 꺾고 영도자 앞에 서지만 영도자가 있어야 할 자리엔 라브리아의 2인자인 부의장 듀폰트(앵거스 맥페이든 분)가 있었다. 영도자는 이미 수 해 전에 죽었고 듀폰트가 최고 권력자에 올랐음에도 원활한 지배를 위해 2인자 행세를 하고 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프레스턴은 듀폰트와 그의 수하들을 제거했고 무장봉기에 나선 반군들이 라브리아의 남은 병력과 싸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작품마다 엄청난 연기변신을 통해 다른 매력을 보여주기로 유명한 크리스찬 베일은 <이퀼리브리엄>에 캐스팅된 후 커트 위머 감독과 제작사로부터 '가장 멋진 전사'가 될 것을 요구 받은 게 분명하다. 실제로 베일은 깊은 눈매와 날카로운 이목구비 그리고 수용소 유니폼 같은 라브리아의 촌스런 의상들도 찰떡 같이 소화하는 패션감각을 선보였다. 베일은 "<이퀼리브리엄>이 베일의 리즈 시절"이라고 해도 될 만큼 멋진 모습을 선보였다.

<이퀼리브리엄>은 <매트릭스>의 영향을 받은 듯한 세기말적인 정서를 담고 있음에도 독창적인 총기 액션으로 많은 영화팬들을 열광시켰다. 특히 '건 카타'로 불리는 화려한 총기액션은 2006년 <울트라 바이올렛>에서 업그레이드 버전을 보여줬고 수 많은 영화와 게임,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 오마주됐다. <이퀼리브리엄>의 서사가 만족스럽지 못한 사람들도 크리스찬 베일의 예술적인 총기액션 만큼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오는 영화마다 목숨 잃는 '할리우드의 김갑수'
 
 '할리우드의 김갑수' 숀 빈(왼쪽)은 <이퀼리브리엄>에서도 여지 없이 초반부에 목숨을 잃는다.

'할리우드의 김갑수' 숀 빈(왼쪽)은 <이퀼리브리엄>에서도 여지 없이 초반부에 목숨을 잃는다. ⓒ 시네마서비스

 
절친한 동료도 죽일 정도로 냉철한 성격의 소유자인 프레스턴은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는 메리 오브라이언이라는 여성을 만난 후 그녀를 향한 동정심과 연민이 생긴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그녀가 처형 당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는데 이는 프레스턴이 라브리아를 멸망시켜야 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된다. 그만큼 분량은 많지 않았지만 메리는 <이퀼리브리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프레스톤의 숨어 있던 감정을 끄집어 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메리 역의 에밀리 왓슨은 줄리아 로버츠나 산드라 블록 같은 스타배우는 아니다. 하지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 2회와 골든글러브 여우주연상 후보 4회에 노미네이트됐을 정도로 유명한 연기파 배우다. 2013년에는 <책도둑>에서 리젤 에밍거(소피 넬리스 분)를 입양하는 부부로 출연해 <샤인>과 <셰익스피어 인 러브>로 유명한 제프리 러쉬와 부부로 호흡을 맞췄다. 

감정유발자들에게서 증거품으로 압수한 책을 읽다가 절친한 동료 프레스턴에게 처형 당하는 비운의 캐릭터 패트리지를 연기한 배우는 '할리우드의 김갑수'로 불리는 숀 빈이다. 나폴레옹 전쟁을 소재로 한 드라마 <샤프> 시리즈를 통해 얼굴을 알린 숀 빈은 <반지의 제왕>에서 고로미르, <왕좌의 게임>에서 에다드 스타크를 연기한 배우로 유명하다. 출연하는 작품마다 유난히 죽는 연기가 많은 숀 빈은 2014년까지 무려 25편의 영화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2000년대 중반 '석호필 열풍'을 일으키며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를 즐겨 본 사람이라면 시즌2부터 등장하는 냉철한 FBI요원 알렉산더 마혼을 기억할 것이다. 알렉산더 마혼을 연기한 윌리엄 피츠너는 <이퀼리브리엄>에서 반군의 지도자 유르겐 역을 맡았다. 2008년에는 <다크나이트>에서 조커에게 당하는 은행장을 연기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물론 배트맨을 연기한 크리스찬 베일과 만나는 장면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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