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 KBS

 
11일 밤부터 배우 주상욱이 연기하는 KBS 1TV <태종 이방원>이 주말마다 방영중이다. 이방원이란 인물은 그동안 수많은 사극에 등장했다. 1996년부터 2년간 KBS <용의 눈물>에서 배우 유동근이 연기한 이방원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있다.
 
이방원은 존경받는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면서도 세종대왕·연산군·광해군·정조·고종 등과 더불어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설에 자주 등장한다.
 
내년이면 그가 사망한 지 정확히 600년이다. 그는 상왕이 되고 네 해가 흐른 음력으로 세종 4년 5월 10일(양력 1422년 5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사라진 지 599년이 흘러간 지금까지도 역사 기록이나 문학작품을 통해 대중의 눈에 나타나고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콘텐츠의 힘이 대단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묘호보다는 '이방원' 이름으로 불리는 왕

대부분의 조선시대 군주들은 죽은 뒤에 부여된 세종·영조·정조 같은 묘호(사당 명칭)로 주로 불린다. 하지만 조선 제7대 주상은 세조라는 묘호보다는 수양대군이라는 대군호(왕자 칭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그가 수양대군 시절에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라이벌 김종서를 죽인 계유정난이라는 쿠데타가 후세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줬기 때문이다.
 
수양대군은 이유(李瑈)라는 이름을 갖고 있지만, 그 이름으로는 잘 불리지 않는다. 이는 그가 역사의 주목을 받을 만한 행적을 남긴 것이 수양대군 시절부터였기 때문이다.
 
정조 임금은 이산이란 이름으로도 불리지만, 이는 그가 이산이라는 자연인 시절에 주목할 만한 활동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MBC 드라마 <이산>의 인기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산이란 이름으로 역사적 발자취를 남긴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이름의 생명력은 그리 길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이방원은 태종이란 묘호로도 불리지만, 이방원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왕이 되기 전에 정안대군으로 불린 시절도 있었지만, 이 대군호는 후세 사람들에게 친숙하지 않다. 그는 태종이란 묘호보다도, 정안대군이라는 대군호보다도, 이방원이라는 자연인의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는 그가 왕이 되기 전부터, 대군이 되기 전부터 역사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왕자가 되기 전부터 역사무대에서 활약했다는 바로 이 점은 이방원이라는 이름이 가장 강하게 기억되는 이유를 알려준다.
 
그가 생존한 시대는 세계적인 격변기였다. 출생한 해인 1367년은 세계 최강 몽골(원나라)이 동아시아 신흥 강국 명나라에 쫓겨 몽골초원으로 달아나기 1년 전이었다.
 
원·명 교체로 불리는 이 사건은 몽골초원과 중국 대륙뿐 아니라 한국과 일본·오키나와 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서는 1392년에 고려가 조선으로 대체됐고, 같은 해에 일본에서는 일왕(천황)이 두 명이나 공존하던 남북조 시대가 종결됐고, 오키나와에서는 1406년에 삼국통일이 일어났다. 원·명 교체로 인한 진동이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퍼져나갔던 것이다.

대격변 시대에 그가 보여준 행보
 
 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KBS 1TV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 KBS

 
이런 대격변 시대에 이방원은 이성계와 정도전을 도와 고려왕조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세우는 데 가담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사적인 이성계나 정도전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정몽주 암살 같은 극단적 테러를 감행해 반대파의 기를 질리게 만들었다.
 
왕씨 고려를 배신하는 데 참여한 그는 이후에도 배신을 되풀이했다. 조선 건국 6년 뒤인 1398년에는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전복하고 권력을 찬탈했다. 냉혹하고 비정하게 14세기 후반과 15세기 초반의 격동기를 살아나갔던 것이다.
 
그는 권력을 향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집념과 의지를 보여줬다. 이런 모습이 임금이 된 뒤에나 왕자가 된 뒤에는 물론이고 일반인 이방원 때도 강렬하게 나타났으므로, 태종이나 정안대군보다 이방원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기억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정치적 영역뿐 아니라 인간적 영역에서도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가족이나 친척을 상대로도 거리낌 없이 권력투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주저하며 망설일 수도 있는 일을 그는 무조건 밀어붙여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쿠데타를 통해 과거의 동지인 정도전을 죽였을 뿐 아니라 아버지 이성계마저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이 과정에서 이복동생 이방석도 저세상으로 보냈다. 또 형인 이방과(정종)를 임금으로 올렸다가 그마저도 2년 뒤에 밀어냈다.
 
그는 권력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처가인 민씨 가문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마저도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임금이 된 뒤 민무구·민무질을 비롯한 처남들을 죽여 민씨 가문을 정치적으로 짓밟아놓았다. 은혜를 무기로 권력을 요구할 가능성을 차단해놓은 것이다.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왕으로 만든 직후에는 충녕의 장인이자 자신의 사돈인 심온마저 가차 없이 죽였다. 자신의 왕권, 혹은 후계자의 왕권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될 만한 인물에 대해서는 눈곱만큼의 인정도 두지 않았던 것이다.
 
태종 이방원,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의 삶은 아침 드라마 소재로도 어울릴 만하다. 새어머니 강씨와의 관계가 특히 그렇다. 그는 새어머니 강씨(훗날의 신덕왕후)를 친어머니 한씨와 다를 바 없이 대했었다. 어머니처럼 누나처럼 친구처럼 대했었다. 새어머니에게 헌신적인 면도 보여줬었다. 1388년에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정부군 지도자인 최영 장군은 강씨를 체포하려 했었다. 이때 강씨를 구출해 함경도로 피신시킨 것도 이방원이었다.
 
그랬던 그는 조선 건국 뒤에 세자 책봉 문제를 놓고 새어머니와 갈라섰다. 새어머니가 이복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려 하는 것을 그는 참지 못했다. 그의 분노는 새어머니가 죽은 뒤 이방석을 살해하는 일로 귀결됐다. 새어머니에 대한 인간적 의리를 결국 철저히 짓밟은 것이다.
 
그는 '나쁜 남자' 정도가 아니라 '못된 남자'의 기질도 발휘했다. 연인관계 여하를 떠나 여성들에 대해 비정한 행동을 많이 범했다. 정치적 조언자였던 새어머니 강씨와 아내 민씨에 대해 보여준 행동, 며느리 심씨 가문에 대해 보여준 행동은 그가 가까운 여성들에게도 조금의 인정을 허용하지 않는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이처럼 이방원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유능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적으로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런데도 후세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이는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 그가 걸은 발자취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줄 만한 위치에 서서 중요한 행적을 남겼고 비정한 면모도 보여줬다. 그러면서 거의 매번 승리했다. 사망 599년이 된 금년까지도 그는 역사 이야기의 고전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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