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아워 포스터

▲ 해피 아워 포스터 ⓒ (주)트리플픽쳐스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거닐던 길 위에서, 그와 주고받던 대화에서, 그 울림 가운데서 모두 행복이 있었다. 나와 상대의 무게가 맞물려 서로를 북돋던 때가 언젠가는 분명히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에 행복했음을 지나쳐서야 알았다.

기차가 선로를 내달리면 주변의 풍경이 쉭쉭- 하고 스치며 지나간다. 아무리 애틋해도 그 풍경을 멈춰서 세워놓을 수는 없다. 때로는 그저 흘러가 잡아둘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사랑이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라 반박한다. 눈앞에 지나쳐가는 모든 것을 억지로라도 잡아 세우려는 것, 무리임을 알면서도 손을 뻗으려는 것이야말로 곧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찌 그것만을 사랑이라 할까. 지나가는 것을 그대로 놓아두고서 홀로 남아 감당하는 것도 누군가의 용기이며 사랑일 수 있는 것이다. 서로의 이마에 머리를 대고, 코를 부비고, 뱃속의 소리를 듣던 그 모든 순간들이 사랑이었듯 말이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찍어낸 무려 5시간 17분짜리 영화 <해피 아워>가 말하는 것도 그러한 것이다.
 
해피 아워 스틸컷

▲ 해피 아워 스틸컷 ⓒ (주)트리플픽쳐스

 
5시간 17분, 초장편 인생영화

영화의 주인공은 30대 후반의 여성들이다. 친구 사이인 아카리(다나카 사치에 분), 사쿠라코(기쿠치 하즈키 분), 후미(미하라 마이코 분), 준(가와무라 리라 분)으로, 저마다 바쁜 가운데서 틈틈이 만나 서로를 북돋는 우애 좋은 관계다.

문화센터에서 일하는 후미는 여러 행사를 기획한다. 때로는 행위예술이고 때로는 문학이며 때로는 연극 같은 행사들인데, 후미의 친구들도 이따금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곤 한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어느 행위예술가가 진행하는 워크숍을 찬찬히 담아낸다. 어찌나 가까이서 차근히 보여주는지 마치 보는 이가 워크숍에 직접 참여한 듯한 인상을 줄 정도다.

이날의 강사는 젊은 사내다. 태풍이 몰려온 뒤 떠내려 온 물건들을 해안가에 기묘하게 세워두어 명성을 얻었다는 인물로, 의자를 기묘하게 세우는 것으로 이날의 워크숍을 시작한다. 수강생들이 세우려는 의자가 우수수 넘어지는 가운데서 강사는 거뜬하게 의자를 세우는 데 성공한다. 의자는 능숙한 발레리나처럼 기묘한 형태를 거뜬히 유지한다. 그가 말한다. 모든 사물엔 중심이 있다고, 이리 저리 의자를 흔들면서 그 중심을 느껴보라고 말이다.
 
해피 아워 스틸컷

▲ 해피 아워 스틸컷 ⓒ (주)트리플픽쳐스

 
모든 것엔 중심이 있다, 그 중심을 바라보라

다음은 몸이다. 그는 사람들을 둘씩, 셋씩, 마침내는 수강생 모두의 몸을 뒤로 맞대게 하여 서로에게 의지하도록 한다. 서로에게 기대고 맞대어 몸을 함께 일으키도록 하는 작업이다. 이때 주의할 건 서로에게 제 몸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를 제대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함께 일어설 때 서로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 다음 그는 사람들을 서로 마주보게 한다. 사람마다 중심을 가르는 선이 있다며 그 선과 제 선을 맞추라고 한다. 사람들은 둘씩, 셋씩, 마침내는 여럿이 서로 돌고 돌면서 저들의 중심선을 맞춘다. 평소에는 가까이 바라볼 일 없던 서로를 서로가 깊고 진지하게 바라본다. 없던 마음도 싹틀 관심주기와 관심받기의 향연이 지속되며 그들은 서로에게 조금씩 다가선다.

제 중심을 찾고 상대의 중심을 바라보고, 서로 힘을 합해 그들 사이의 중심을 찾아내는 것이 이날 워크숍의 목표다. 낯선 이들조차 집중해 다가서면 해낼 수 있는 그 작업을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이들 사이에서도 좀처럼 해내려 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을 잃고 행복을 잃는 과정이 늘 그렇다.
 
해피 아워 스틸컷

▲ 해피 아워 스틸컷 ⓒ (주)트리플픽쳐스

 
중심을 찾고, 사랑을 찾고, 행복을 찾는

영화는 네 인물이 각자의 중심을 찾는 과정을 그린다. 그 과정엔 사랑이 있고, 사랑을 잃는 순간도 있고, 또 사랑을 되찾는 순간이 있다. 수많은 실수와 실패 가운데서 뒤늦게나마 문제를 직면하고 제가 누구인지를 알리는 노력이 있다.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뒤를 쫓으며 누군가는 이별을 구하고 또 누군가는 희망을 얻는다. 삶은 공평하지 않지만 적어도 노력할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고 영화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영화는 전문 배우가 아닌 이들을 전면에 기용했다. 그러면서도 이들이 쏟을 수 있는 모든 역량을 스크린 위에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로카르노 영화제가 이례적으로 주연배우 네 명에게 공동 여우주연상을 준 건 이 영화가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낯설면서도 진실한 연기로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삶의 굴곡을 내보이고 그 문제들을 직면하려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 건 기록할 만한 성취다.

다섯 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 버겁고 지루하게 느껴지는 대신 차분하고 진지하게 느껴지는 건 영화의 자세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워크숍과 소설낭독, 그 뒤의 뒤풀이신은 거의 다큐멘터리와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 진지한 관찰 속에서 감독이 진짜로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우러난다. 극중 인물들이 그러했듯 삶을 변화시키는 한 순간을 관객이 이 영화로부터 마주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는 그저 기대만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그 순간이 보는 이를 사랑과 행복으로 인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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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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