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 정조를 다루는 MBC <옷소매 붉은 끝동>은 2007년 MBC <이산>과 비슷한 데가 있다. 여성 주인공이 '홍 반장'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이 그중 하나다. 여자 주인공 성덕임(이세영 분)은 세손인 정조(이준호 분)가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는 홍반장'처럼 해결사 역할을 해내곤 한다.
 
드라마 속의 궁녀 성덕임은 어린 시절에도 남몰래 정조를 도왔다. 할아버지 영조(이덕화 분)가 읽지 말라는 글을 읽은 정조의 행위가 탄로 나기 직전, 어린 성덕임은 서고로 몰래 들어갔다. 그런 뒤 정조가 읽은 책에서 해당 부분을 찢어내 감추어두는 기지를 발휘했다. 영조는 '내가 읽지 말라고 한 부분을 피하려고 그 부분만 찢었구나'라며 오히려 정조를 칭찬했다. 이런 일이 있었지만, 정조는 성덕임이라는 궁녀가 자신을 도왔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성덕임은 소녀에서 숙녀로 변한 뒤에도 세손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있다. 동궁(세자궁)의 서고를 관리하게 되면서 세손과 미운 정 고운 정 들게 된 그는 세손이 금족령에서 풀려나는 데도 결정적 기여를 한다.
 
성덕임은 세손의 젊은 새할머니인 정순왕후를 도운 뒤, 정순왕후가 영조를 설득해 세손에 대한 금족령을 풀어주도록 유도한다. 궁녀치고는 너무 막강한 비현실적 캐릭터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렇게 번번이 세손을 구출해 시청자들을 안심시킨다.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 MBC

 
정조와 성덕임
 
성덕임이 아닌 성송연(한지민 분)이었던 드라마 <이산>의 여자 주인공은 훨씬 더 '비현실적'이었다. 성송연이 정조를 도운 방식은 성덕임을 능가했다. 나이 어린 이산(이서진 분)이 모반을 하려고 무기를 은닉했다는 혐의를 받자, 도화서 다모인 성송연은 우연히 목격한 장면을 기초로 무기의 진짜 소유자를 밝혀내 이산의 혐의를 없애줬다.
 
정적들이 세손을 암살하고자 나례(儺禮, 잡귀 쫓기)를 열었을 때도 그랬다. 성송연은 행사의 의궤(儀軌, 매뉴얼)를 미리 입수해 암살 음모를 입증할 정황 증거를 찾아냈다. 도화서 다모가 아니라 국정원 요원처럼 되어 미래의 개혁군주를 수호했던 것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과 <이산>이 공통적으로 다루는 여성 주인공은 <정조실록> 등에서 성소용(소용 성씨) 혹은 성의빈(의빈 성씨)으로 나온다. 그가 성씨였다는 것만 알 수 있고,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용은 정3품 후궁이고 빈은 정1품 후궁이었으므로, 오늘날 확인되는 인적 사항은 성은 성씨이고 정3품에서 정1품으로 승진했다는 점이다. 그에 더해, 요절한 문효세자와 옹주 하나를 낳았으며, 셋째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정도가 확인될 뿐이다.
 
두 사극에 나오는 성씨는 정조에게 홍반장 같은 인물이지만, 이는 역사 기록과는 무관하다. 그렇다고 그가 홍반장 같은 인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 점은 상상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음력으로 정조 10년 9월 14일자(양력 1786년 11월 14일자)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는 이날 사망한 성의빈을 애도하면서 "지금부터는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구나(從今國事尤靡托矣)"라고 한탄했다.
 
정조가 성의빈에게 국사(國事)를 의탁했었음을 전제로 하는 이 문장을 근거로, 성의빈이 남편의 국정 운영을 많이 보조하지 않았겠나 하는 추론이 생길 여지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국사는 그런 국사가 아니었다. 국정 운영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었다.
 
위 날짜 실록에는 정조가 그의 출산을 매우 기다렸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정승급인 홍낙성이 그의 출산과 관련해 "온 나라의 소망이 여기에 달려 있었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 뒤에 "지금부터는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구나"라는 정조의 한탄이 나온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정조가 말한 '국사'는 다름 아닌 후계자 출산이었다

6년 만에 태어난 아들, 문효세자
 
왕조시대에 왕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대권 주자가 배출되는 일이었다. 이 시대에는 왕자녀 출산이 '국사'의 범주에 포함되고도 남을 만한 중대사였다. 정조가 '국사를 의탁할 데가 더욱 없구나'며 탄식한 것은 조선 후기의 여타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왕실 역시 손이 매우 귀했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만 24세 때인 1776년에 임금이 됐다. 지금의 감각으로 하면, 서른이 넘은 나이에 왕이 된 셈이다. 그런데 그가 첫 아이를 얻은 것은 6년 뒤인 1782년이다. 이때 태어난 왕자가 성의빈의 아들이다. 왕의 후계자가 준비돼 있어야 왕족들이 안정적으로 권세를 유지할 수 있었으므로, 그 6년간 왕실 사람들이 이 문제를 얼마나 예의주시했을지는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특히, 정조와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초조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6년 만에 태어난 왕자는 훗날 문효세자로 불렸다. 세자 생활을 한 뒤에 임금이 됐다면, '세자' 앞에 별도의 칭호가 붙을 필요가 없었다. 사도세자의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임금이 되지 못하고 세자로서 생을 마감했기에 '세자' 앞에 시호가 붙게 된 것이다.
 
그는 문효라는 시호와 더불어, 문희라는 묘호(廟號), 효창이라는 묘호(墓號)를 함께 받았다. 그의 혼을 모시는 사당의 명칭은 문희, 그의 몸을 안치한 무덤의 명칭은 효창이었던 것이다. 효창원으로 불린 이 무덤은 오늘날의 서울 효창공원의 기원이 됐고,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문효세자 무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문효세자 무덤. ⓒ 김종성

 
성의빈의 아들이 태어나고 2년 뒤에 그 딸이 태어났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인 1786년, 성의빈의 아들이 요절했다. 세자가 된 지 2년 만에, 그것도 만 4세에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문효세자의 4년 생애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훗날 정조의 후계자가 된 아들은 순조다. 순조는 1790년에 박수빈(수빈 박씨)의 몸에서 태어났다. 왕자가 하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났기에, 당시 사람들이 받는 충격은 대단히 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문효세자가 떠난 1786년 하반기에 성의빈의 세 번째 출산이 임박했기에 온 나라가 기대를 걸게 됐던 것이다.
 
이처럼, 왕실의 자손이 귀하던 때에 성의빈은 세자가 될 아들에 이어 옹주를 출산하고 세 번째 아이를 임신했다. 새로운 생명들을 거듭거듭 낳았다는 이유로 그는 왕실의 사랑을 받았다. 정조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출현해 도와줬기 때문이 아니라 왕자녀를 세 번이나 임신했기 때문에 당대의 주목을 받았던 것이다.
 
하지만, 성의빈의 삶은 셋째아이의 임신 도중에 끝나고 말았다. 문효세자를 임신하고 정조의 후궁이 된 지 4년 만에 그의 생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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