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중·후반 '개그계의 대부' 이경규의 뒤를 이어 최고의 개그맨으로 명성을 떨치던 김국진은 1999년 건강악화를 이유로 활동을 전면 중단했다. 김국진은 휴식기 동안 골프에 푹 빠져 프로골퍼 테스트 도전을 선언했다. 하지만 김국진의 도전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아무리 본업을 잠시 접고 골프에만 매진한다 해도 취미로 골프를 치던 사람이 갑자기 프로테스트에 합격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처럼 취미로 스포츠를 즐기던 사람이 엘리트 선수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 여성배우는 지난 2013년 취미로 복싱을 시작해 엘리트 선수들을 꺾고 당당히 국가대표 타이틀까지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드라마 역할 때문에 복싱을 배웠다가 생활체육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재능을 인정 받았고 실업팀에 입단해 대표 선발전을 거치며 여성 배우 최초로 복싱 국가대표 타이틀을 따냈던 이시영이 그 주인공이다.

물론 당시 여자복싱의 저변이 매우 얇아 경쟁률이 높지 않았다곤 하지만 취미로 복싱을 하던 이시영이 국가대표까지 선발된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만약 이시영이 2013년에 개봉한 이 영화가 크게 흥행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면 연기와 복싱을 병행하기는 더욱 힘들었을 수도 있다. 2013년 발렌타인데이에 개봉해 마니아 관객들로부터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던 이원석 감독의 <남자사용설명서>다.
 
 <남자사용설명서>는 <7번방의 선물>,<베를린> 등과 동시대에 상영되면서 전국 50만 관객에 그쳤다.

<남자사용설명서>는 <7번방의 선물>,<베를린> 등과 동시대에 상영되면서 전국 50만 관객에 그쳤다. ⓒ (주)쇼박스

 
복싱 국가대표 출신의 여성배우

무명시절 찜질방 매점을 운영하기도 했던 이시영은 2008년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 왕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로 괴롭힘을 받는 시녀를 연기하며 시청자들에게 얼굴을 알렸다. 하지만 이시영을 본격적으로 알린 드라마는 이듬해 'F4' 열풍을 일으켰던 <꽃보다 남자>였다. 이시영은 <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이민호 분)를 좋아해 좋지 않은 방법으로 금잔디(구혜선 분)를 음해하던 오민지를 연기하며 시청자들의 미움과 관심을 동시에 받았다.

이시영은 <꽃보다 남자> 이후 예능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에서 신화 멤버 전진과 가상부부로 출연했지만 얼마 못 가 하차했다. 2010년에는 <부자의 탄생>에서 푼수끼 넘치는 부태희를 연기하며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다(이시영이 본격적으로 복싱을 시작한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이시영은 2011년 송새벽과 함께 출연한 <위험한 상견례>로 25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배우로 떠올랐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위험한 상견례>를 통해 흥행파워를 입증한 이시영은 2013년 유학파 신인감독 이원석 감독의 데뷔작 <남자사용설명서>에 출연했다. <남자사용설명서>는 독특한 웃음코드로 마니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전국 50만 관객으로 흥행에서는 재미를 보지 못했다. 2013년 국가대표 선발 이후 부상으로 복서 활동을 자제한 이시영은 드라마 <골든크로스>, <일리 있는 사랑>, <아름다운 나의 신부>, 영화 <신의 한 수> 등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다.

이시영은 2016년 배우가 아닌 예능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에 출연해 대중들로부터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이시영은 모범적인 군생활(?)로 많은 박수를 받았고 연말 연예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했다. 이시영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라를 지키고 계시는 국군 장병 분들께 드리는 상이라 생각하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부디 군생활 동안 다치지 말고 건강히 제대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개념 수상소감'으로 많은 전·현직 군인들과 가족들을 감동시켰다.

2017년 사업가와 결혼한 이시영은 2019년에 개봉한 <언니>가 엄청난 혹평 속에 19만 관객에 그쳤지만 작년 12월에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홈>에서 특수부대 출신 소방관을 연기하며 또 한 번 시청자들의 극찬을 받았다. 연기도 연기였지만 이시영은 <스위트홈> 촬영을 위해 체지방률 8%대를 유지하며 엄청난 근육질의 몸을 만들었고 거미괴물과의 추격전을 대역 없이 직접 소화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유머와 멜로 적절히 섞인 영리한 로맨틱 코미디
 
 이시영(왼쪽)과 오정세는 116분의 런닝타임 동안 과하지 않은 웃음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이시영(왼쪽)과 오정세는 116분의 런닝타임 동안 과하지 않은 웃음으로 관객들을 즐겁게 해준다. ⓒ (주)쇼박스

까다로운 성격의 감독과 직장동료들 사이에서 온갖 힘든 일을 도맡아하는 CF조감독 최보나(이시영 분)는 무명시절 우연찮은 기회에 만났던 한류스타 이승재(오정세 분)와 촬영현장에서 재회한다. 여느 때처럼 힘든 촬영을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불법 비디오테이프를 파는 노점상을 발견한 보나는 테이프 한 편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Dr.스왈스키(박영규 분)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무려 50만 원을 투자해 '남자사용설명서'를 구입한다.

유치하고 무의미해 보이던 테이프 속 지침들은 거짓말처럼 하나, 둘 맞아 떨어지고  보나는 톱스타 승재와 점점 가까워진다. 보나와 승재는 잔뜩 술에 취해 함께 밤을 보내게 되고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보나는 혼자 한류스타와의 연애를 꿈꾸며 설렌다. 하지만 승재는 여전히 보나를 육체적인 관계로만 보게 되고 보나는 설명서 속 가르침대로 실수와 고의가 뒤섞인 밀당으로 점점 한류스타 승재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보나는 업계에서도 인정 받는 CF감독이 되지만 보나와 승재 사이에는 또 다른 스타배우 오지훈(김준성 분)이 등장하고 승재는 보나와 지훈 사이를 의심하며 속앓이를 한다. 보나 역시 새 CF 촬영현장에서 제작자로 만난 옛 연인 성철(김정태 분)에게 망신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승재가 등장해 보나를 위기에서 구하고 "나는 바보.. 너 밖에 모르는 바보.. 너는 바보.. 내 맘도 모르는 바보.."라는 닭살 돋는 대사로 사랑을 고백한다.

<남자사용설명서>는 이시영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데뷔 이후 첫 주연을 맡은 오정세의 열연도 매우 돋보이는 작품이다. 밑바닥에서 올라와 한류스타가 된 이승재를 연기한 오정세는 노출연기도 마다하지 않는 열연으로 영화의 웃음을 책임졌다. 특히 보나와 지훈의 사이를 의심한 승재가 보나의 집에 찾아와 보나의 문 앞에서 두 사람의 동침 여부를 반복해서 묻는 연기는 단연 압권이었다.

<남자사용설명서>로 좋은 평가를 받은 이원석 감독은 2014년 한석규와 고수, 박신혜, 유연석, 마동석 등 호화 캐스팅이 돋보이는 제작비 72억 원이 투입된 <상의원>을 연출했다. 하지만 <상의원>은 '의복만 예뻤다'는 혹평 속에 79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2017년 단편 영화 <랄라랜드>를 선보인 이원석 감독은 이선균과 이하늬 주연의 <킬링로맨스> 촬영을 마친 후 개봉시기를 조율하고 있다.

현실과 가상 넘나드는 연애 일타강사 박영규
 
 <남자사용설명서> 속 음침한 노점상은 예능프로그램 <SNL코리아>에서도 패러디됐다.

<남자사용설명서> 속 음침한 노점상은 예능프로그램 에서도 패러디됐다. ⓒ (주)쇼박스

 
90년대 중반까지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선역과 악역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진중한 연기를 선보였던 배우 박영규는 1998년 레전드 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 미달이 아빠 역을 맡으며 이미지가 완전히 바뀌었다. 1999년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과 2002년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로 코믹한 이미지를 완전히 굳힌 박영규는 2014년 <정도전>의 이인임을 연기하기 전까지 코미디 배우의 이미지를 10년 넘게 이어갔다.

2013년에 개봉한 <남자사용설명서>의 Dr. 스왈스키 역시 박영규의 코믹한 매력을 십분 강조한 캐릭터다. 초창기 보나에게 비디오를 파는 판매원으로 등장한 스왈스키는 비디오 안에서도 일타강사로 등장하고 심지어 보나의 현실 속에서도 시시때때로 나타나 보나에게 조언을 건넨다. 특히 패스트푸드점 계산대에서 보나에게 강의를 하다가 햄버거를 먹으러 온 단역들과 시비가 붙는 장면은 관객들의 많은 웃음을 자아냈다.

남자 시청자들에게는 <야인시대>의 구마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원종은 <남자사용설명서>에서 홀로 아방가르드한 예술혼에 사로잡힌 CF감독 육봉아 역을 맡았다. 교통사고로 촬영현장에 나타나지 못한 사이 보나가 마무리한 결과물에 광고주가 만족해 하니까 보나의 공을 그대로 가져가 버리는 나쁜 상사 역할이다.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영화 속에서 몇 차례 등장하지만 언제나 2개의 코드(A마이나, E마이나)만을 사용한다.

<친구>의 도루코, <해바라기>의 김양기, <간기남>의 서형사 등 영화 속에서 깡패나 건달, 형사를 주로 연기했던 김정태는 <남자사용설명서>에서 보나의 옛 남자친구 우성철 역을 맡았다. 보나와 헤어진 후 광고 제작사의 대표로 성장해 역으로 보나를 감독으로 캐스팅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촬영하도록 갑질을 하는 역할이다. <남자사용설명서>에서는 코믹하거나 무서운 역할을 주로 맡았던 김정태의 흔치 않은 진지한 엘리트 연기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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