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세계 영화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워낙 커서 아카데미 시상식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권위를 가진 시상식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아카데미 시상식은 할리우드의 영화 시상식에 불과하다. 작년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왜 그동안 한국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 후보를 내지 못했을까요?"라는 기자의 질문에 "오스카는 (그저) 로컬(지역 시상식)이니까요"라고 답한 것도 사실 큰 도발이 아니었던 셈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은 역사상 3번째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자 역대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비 영어권 영화다. 미국의 영화 시상식에 한국배우들이 한국어로 연기한 영화가 당당히 최고의 작품으로 선정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골든글러브 시상식에서 "1인치도 안 되는 자막이란 장벽을 넘으면 여러분은 훨씬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라는 수상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봉준호 감독과 <기생충>은 역대 최초로 비 영어권 영화로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역사적인 작품이 됐지만 사실 <기생충>보다 21년이나 먼저 아카데미의 높은 벽을 무너트린 영화가 있었다. 1998년 칸 영화제의 심사위원대상에 이어 1999년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외국어 영화상과 음악상 그리고 남우주연상까지 휩쓸었던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이 연출과 주연까지 맡은 이탈리아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였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에 이어 역대 북미 흥행 2위를 기록하고 있는 비 영어권 영화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에 이어 역대 북미 흥행 2위를 기록하고 있는 비 영어권 영화다.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비 영어권 영화 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특유의 장난끼 넘치고 익살스런 표정 때문에 쉽게 나이를 가늠하기 힘들지만 1952년생인 베니니는 어느덧 칠순을 바라보는 노장 감독이자 배우다. 1972년 연극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베니니는 로마에서 각종 실험적인 연극들에 참여하며 배우와 연출가로서 활동을 이어가다가 1977년 <베틀링게르 아이 러브 유>의 각본과 주연을 맡으면서 영화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1980년대 <다운 바이 로> <달의 목소리> <지상의 밤> 같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하며 필모그라피를 쌓아가던 베니니는 1991년 <자니 스테치노>에서 감독과 각본, 주연을 맡으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1994년 <미스터 몬스터>의 감독과 제작, 각본, 주연까지 도맡으며 역할이 하나 더 늘어난 베니니는 1997년 그의 인생작이자 1990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명작으로 꼽히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만들었다.

베니니가 감독과 각본, 주연을 모두 맡은 <인생은 아름다워>는 북미관객들에게는 낯설게 느껴질 수 밖에 없는 이탈리아 영화임에도 북미에서 5700만 달러, 세계적으로는 2억 30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국내에서도 아카데미 수상 소식이 알려진 후 입소문을 타면서 서울에서만 22만 관객을 동원했고 2016년에 재개봉해 12만 관객을 추가로 불러 들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1999년 <아스테릭스>에 출연해 코미디 배우로서 매력을 뽐낸 베니니는 2002년 <피노키오>를 만들어 세계적으로 4400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하지만 <인생은 아름다워> 때와 달리 북미 시장에서는 360만 달러로 고전을 면치 못했고 베니니는 2003년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에디 머피와 스티븐 시걸을 제치고(?) 최악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불명예를 안으며 혹평을 받았다.

2003년 케이트 블란쳇과 빌 머레이, 스티브 부세미 등이 출연한 옴니버스 영화 <커피와 담배>에 출연한 베니니는 2005년 <레옹>으로 유명한 장 르노가 출연한 <호랑이와 눈>에서 감독과 각본, 주연을 맡았다. 베니니는 2010년대 들어서 연출과 각본 활동은 자제하고 있지만 2012년 우디 앨런 감독의 <로마 위드 러브>에 출연했고 2019년엔 마테오 가로네 감독의 <피노키오>에서 제페토를 연기하는 등 배우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들의 동심을 끝까지 지켜주려 했던 아버지
 
 로베르토 베니니는 비 영어권 영화로서는 역대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로베르토 베니니는 비 영어권 영화로서는 역대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친구와 함께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온 유태인 청년 귀도(로베르토 베니니 분)는 호텔에서 웨이터로 일하지만 재치 있는 입담과 넉살로 손님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여인 도라(니콜레타 브라스키 분)와 사랑에 빠진 귀도는 도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사랑스런 아들 조수아를 낳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크게 다를 게 없는 이야기 진행이다.

하지만 조수아의 5번째 생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귀도와 조수아는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독일군 수용소로 끌려 간다. 도라 역시 유태인이 아니었음에도 남편과 아들을 따라 수용소행을 자처한다. 귀도는 겁을 먹고 있는 아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수용소 생활이 탱크를 얻기 위한 단체 게임이고 1000점을 얻으면 장난감 탱크가 아닌 진짜 탱크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고 '착한 거짓말'로 둘러댄다.

독일군은 노동을 할 수 없는 노인과 어린이들을 가스실에 가두고 학살하는데 평소 샤워를 싫어하던 조수아는 현장에서 몰래 빠져 나오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다. 귀도는 고된 수용소 생활 도중 웨이터 시절 안면이 있던 레싱 박사(호르스트 부흐홀츠 분)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을 받아 수용소 탈출을 노린다. 하지만 독일 장교인 레싱 박사는 여전히 수수께끼에만 열을 올릴 뿐 귀도와 가족들의 안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전쟁이 막바지가 되면서 패색이 짙어진 독일군은 수용소 폐쇄를 결정했고 귀도 역시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조수아를 안전한 곳에 숨기고 아내 도라를 찾아나선 귀도는 독일군에게 잡힌다. 독일군에게 끌려 가던 중 귀도는 숨어 있던 조수아와 눈이 마주치고 이 모든 게 게임인줄 알고 있는 조수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우스꽝스런 걸음으로 걸어 나간다. 그리고 아침에 텅 빈 수용소를 나온 조수아의 눈 앞에 '1등 상품'인 미군 탱크가 들어온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미국의 로튼 로마토 관객점수 96%, 국내 N 포털사이트 네티즌 평점 9.38점을 받은 작품이다. 심지어 까다롭기로 유명한 국내 기자와 평론가들에게도 8.34점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도 감정 변화가 없다면 아버지의 사랑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 그만큼 <인생은 아름다워>는 전쟁의 비극을 웃음과 눈물, 감동으로 승화시킨 걸작이었다.

실제 아내와 멜로 연기를 펼친 베니니
 
 대부분의 관객들은 조수아의 윙크를 보는 순간부터 결말을 예측하고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조수아의 윙크를 보는 순간부터 결말을 예측하고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 씨네그루(주)키다리이엔티

 
베니니가 연출한 영화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자니 스테치노>를 시작으로 <미스터 몬스터> <인생은 아름다워> <피노키오> <호랑이와 눈>까지 그가 연출한 5편의 영화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모두 같다는 점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니콜레타 브라스키라는 배우인데 그녀는 다름 아닌 로베르토 베니니의 실제 아내다. 베니니와 브라스키는 1991년 결혼해 현재까지 부부의 연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속에서 귀도는 도라를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공주님"이라는 인사를 빠짐 없이 한다. 심지어 수용소에서 독일군이 없는 틈을 타 스피커를 통해 안부를 전할 때도 여지 없이 귀도의 첫 인사는 "안녕하세요 공주님"이었다. 비록 귀도는 시골에서 상경한 가난한 남자지만 이토록 도라를 공주처럼 대하며 사랑했기 때문에 도라 역시 수용소도 따라갈 만큼 귀도에 대한 마음이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전반부가 귀도와 도라의 러브스토리에 집중돼 있다면 후반부는 귀도와 아들 조수아의 수용소 생활에 집중돼 있다. 조수아는 불편하고 더러운 것을 싫어하고 틈만 나면 엄마를 찾는 평범한 5살 꼬마지만 1등 상품인 탱크를 따내기 위해 수용소 내 3가지 규칙을 잘 지킨다(울지 말 것, 엄마를 찾지 말 것, 간식을 달라고 하지 말 것). 게다가 조수아는 좁은 곳에서 장시간 버틸 수 있는 지구력까지 갖췄다.

다양한 표정 연기로 조수아 역을 야무지게 소화한 <인생은 아름다워>의 아역배우 조르지오 깐따리니는 놀랍게도 <인생은 아름다워>가 영화 데뷔작이었다. 깐따리니는 <인생은 아름다워> 이후 2000년 리들 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에서 막시무스의 아들로 출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이탈리아 영화 <얼리 버드 캐치 더 웜> 출연을 끝으로 배우 활동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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