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여름> 포스터

<늦여름> 포스터 ⓒ 하준사

 
그런 영화가 있다. 힘 빡 준 영화들 사이에서 홀로 느긋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작품 말이다. 저마다 시대를 관통할 작품이 바로 나라며 아우성치는 가운데서 그냥 이야기를 빚고 찍어내면 그게 영화 아니냐고 되묻는 영화가 가끔은 있는 것이다. 조금은 심심하지만 그대로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내는 영화다. 이런 영화가 때로 당기는 건 그만의 분위기가 마음을 편하게 해주어서일 것이다.

조성규 감독의 <늦여름>이 바로 그런 영화다. 제주도에서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내외와 그곳에 숙박하는 손님들 간의 이야기가 러닝타임 내내 차근히 흘러간다. 영화는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한 편의 소동극이라 스스로를 소개하고 있는데, 우연에 우연이 겹치며 예기치 못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한바탕 소극으로 이해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늦여름>은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 많지 않은 영화 가운데서도 오로지 제주도 안에서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소수의 영화다. 제주도를 다룬 대부분의 영화가 제주를 잠시 잠깐 소품처럼 등장시키는데 만족하는 반면, <늦여름>은 손님들이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는 며칠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2년 앞선 2016년 개봉한 <올레>가 게스트하우스를 찾은 세 남자의 이야기를 다루었으나 <늦여름>은 아예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세워 차별화를 꾀한다. 제주로 떠나온 이들만이 아니라 제주에 정착한 이들을 주요하게 다룸으로써 얻게 되는 효과는 분명하다. 제주가 여행의 공간을 넘어 삶의 터전이 되는 것이다.
  
 <늦여름> 스틸컷

<늦여름> 스틸컷 ⓒ 하준사

 
게스트하우스에서 빚어진 뜻밖의 만남

영화는 제주도 게스트하우스에 막 입실한 인구(전석호 분)와 게스트하우스 주인 정봉(임원희 분)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게스트하우스 투숙객은 두 달째 머물고 있는 까다로운 소설가(조선문 분) 한 명 뿐인데, 이날 드디어 인구와 두 여성 손님이 새로 예약한 참이다.

먼저 도착한 인구에겐 감춰진 사연이 하나 있다. 인구는 몇 년 전 만나던 여자가 갑자기 사라져 마음에 상처를 입었는데, 겨우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알아낸 상태다. 그를 떠난 여자의 이름은 성혜(신소율 분), 그는 인도여행 중 만난 정봉과 아예 제주도에 살림을 차리고 몇 년 째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다.

뒤에 도착한 두 여성 손님도 뜻밖의 사연을 가졌다. 두 친구 중 채윤(정연주 분)이 몇 년 전 정봉과 함께 은행에서 근무했던 후배인 것이다. 성혜는 채윤에게서 남다른 인상을 받는데 역시나 채윤과 정봉은 단순한 선후배 관계만은 아닌 것이다.

이후 영화는 청춘 남녀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미묘한 감정에 주목한다. 결혼한 남녀의 과거와 그들의 현재를 침범하는 순간들, 그 안에서 싹트는 감정들을 살뜰히 살핀다. 여느 멜로물처럼 전격적이진 못하지만 선선하고 느긋하게 이야기를 풀어간다.
 
 <늦여름> 스틸컷

<늦여름> 스틸컷 ⓒ 하준사

 
제철 방어처럼 신선한 이야기

영화의 배경이 명확히 등장하진 않지만 대사들로부터 살펴볼 때 모슬포 인근의 한적한 마을로 추정된다. 초겨울이 제철인 방어와 갈치조림 같은 음식이 대화의 소재로 등장해 맛집이 많은 모슬포의 장점을 충실히 살렸다. 특히 겨울 횟감을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방어와 관련해서 모슬포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다. 최남단방어축제가 열리는 11월이라면 더욱 그렇다.

모슬포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제철 아닌 방어를 이야깃거리로 쓰는 건 흥미로운 대목이다. 통상 제주도의 가장 화려한 때를 조금은 지나친 늦여름을 영화의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점도 그렇다. 극중 인물들의 과거와 현재가 엇갈린 상황은 이 같은 영화의 배경과 맞물려 남다른 인상을 자아낸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버린 것도 같지만 더 나은 계절이 반드시 올 거란 걸 영화가 일깨우고 있기 때문이다. 방어와 모슬포가 가장 빛나는 철은 여름이 아닌 겨울이고, 늦여름은 여름은 지났으나 겨울엔 더 가까운 계절이란 걸 관객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영화는 사랑을 놓친 것 같은 인물들의 청춘이 어쩌면 이제부터 시작일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끔 한다. 좋은 파도도 방어의 제철도 기다리면 마침내 오고야 말리라는 믿음을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11월은 1년 중 모슬포가 가장 아름다울 때다. 제주도 모슬포에서 이달 30일까지 최남단방어축제가 열린다. 지금이 아니면 1년을 기다려야 하는 제철축제를 <늦여름> 한 편 보고난 뒤 방문해 보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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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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