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매력은 예측할 수 없는 이변에서 나온다. 작은 변수가 승부의 흐름을 바꾸기도 하고,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반전이 나오기도 한다. 특히 단판 승부에서는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 그리고 축구는 스포츠에서도 이변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종목 중 하나로 꼽힌다.
 
K리그의 자존심 포항 스틸러스가 '다윗의 기적'에 도전한다. 포항이 넘어야 할 '골리앗'은 중동의 강호 알 힐랄(사우디아라비아)이다. 포항과 알 힐랄은 24일 오전 1시(한국시각)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킹파드 국립경기장에서 2021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결승전을 치른다.
 
포항과 알힐랄과 나란히 3회 우승으로 ACL 최다 우승 공동 1위에 올라 있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두 팀중 어느 팀이 승리하든 최초의 ACL 4회 우승팀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다.
 
알 힐랄은 중동 특유의 '오일머니'를 바탕으로 막강한 선수단을 구축하며 모든 면에서 아시아 최강의 전력으로 꼽힌다. 베스트 멤버들이 대부분 사우디 국가대표 출신이다. 사우디는 현재 진행 중인 2022 카타르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B조에서 5승1무로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며 본선진출을 거의 확정지은 상황이다.
 
여기에 알 힐랄 외국인 선수들의 기량 역시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브라질 출신 미드필더 마테우스 페레이라, 프랑스 국가대표 출신 바페팀비 고미스, 말리 출신 무사 마레가 등이 강력한 공격진을 구축하고 있으며, 수비에는 한국 국가대표 출신이었다가 제명된 장현수가 아시아쿼터로 포진해있다.
 
이들을 이끄는 레오나르도 자르딤(포르투갈)은 올림피아코스-스포르팅-AS모나코 등 유럽의 여러 명문팀을 이끈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올해 6월부터 알 힐랄의 지휘봉을 잡았다. 선수단 가치만 무려 822억 원으로 집계되며 아시아에서는 역대급 규모다. 알 힐랄은 최근 8년간 무려 4번이나 ACL 결승에 오르며 강한 면모를 보였다.
 
이에 맞서는 포항은 그야말로 '언더독의 신화'를 연출하며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승행을 이끌어냈다. 포항은 이번 대회에 참가한 K리그 4팀 중 가장 전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지난 달 8강에서 J리그의 나고야-4강에서는 K리그1의 대표적인 라이벌이자 작년 ACL 우승팀 울산을 승부차기 끝에 격파하는 이변을 연출하며 다시 한번 우승 기회를 얻었다. 포항이 ACL 결승에 오른 것은 세르히오 파리아스 감독이 이끌던 2009년 우승 이후 무려 12년 만이다.
 
포항의 선수단 가치는 144억 원으로 알 힐랄과 비교하면 6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그나마 가진 최상의 전력을 쏟아부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데, 설상가상 결승전을 앞두고 차포까지 떼는 악재가 겹쳤다. 시즌 중 송민규라는 전도유망한 공격수가 전북으로 이적했고, 주전 골키퍼 강현무와 타쉬, 김현성 등이 줄줄이 부상을 당했다. ACL에서 그나마 포항의 최전방을 이끌었던 이승모마저 병역 봉사활동 문제로 해외출국을 불허되며 이번 원정에 함께 하지 못한다. 포항은 올시즌 K리그에서도 하위스플릿으로 추락하며 중위권인 7위에 그치고 있다.
 
더구나 ACL 결승전이 열리는 킹 파흐드 경기장은 사우디의 홈구장이며 무려 6만8천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곳이다. 가뜩이나 열세인 포항은 원정에서 사우디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까지 극복해야하는 절대 불리한 조건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가까워보이고, 대부분의 전문가들도 당연히 알 힐랄의 승리를 유력하게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포항은 그만큼 잃을 것도 없다. 포항은 클럽의 역사를 돌아봐도 항상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을 만들어냈던 저력이 있다. PO제도가 있던 2007년에는 정규리그 성적은 5위에 그치고도 토너먼트에서 상위권 팀들을 업셋하며 K리그 역사상 가장 낮은 순위로 우승을 차지하는 기록을 세웠다.

2009년 ACL 8강전에서는 당시 우즈베키스탄의 강호 분요드코르에게 1-3으로 패하고도 2차전에서 4-1로 극적으로 승부를 뒤집었고 결국 대회 우승까지 차지했다. 2013년에는 외국인 선수 한 명도 없이 국내 선수만으로 우승경쟁을 펼친 끝에 울산과의 최종전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터진 극장골로 드라마틱한 역전우승을 달성했다. 당시에도 포항을 우승후보 1순위로 꼽았던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현재 포항의 지휘봉을 잡고있는 김기동 감독은 포항 축구사의 산 증인이다. 김 감독은 선수로서 2007년부터 2009년까지 포항의 K리그-FA컵-ACL 제패를 함께했고, 2019년부터는 감독직에 올라 다시 한 번 팀을 ACL 결승까지 이끌며 포항축구의 자존심을 살렸다.
 
김 감독은 2020년에는 화끈한 공격축구로 포항을 3위에 올리며 우승-준우승팀 감독을 제치고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올시즌에는 일류첸코-팔로세비치-김광석-송민규 등 핵심선수들이 줄줄이 팀을 떠나는 악재 속에서도 특유의 변칙적이고 유연한 용병술로 강팀들을 잡아내는 실리축구를 선보였다. 만일 김 감독이 올해 ACL 우승을 차지한다면, 한국인으로서는 신태용 인도네시아 대표팀 감독에 이어 두 번째로 선수와 감독으로 모두 우승을 차지하는 인물이 된다.
 
또한 많은 팬들이 포항의 선전을 응원하는 또다른 이유는 단지 우승 가능성 때문만은 아니다. 자본의 힘과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대의 축구판에서 포항은 '돈으로 살 수 없는 명가의 클래스'를 결과로서 보여주고 있다. 1973년에 창단한 포항은 K리그 우승 5회, FA컵 4회, 챔피언스리그 3회 등 화려한 역사를 자랑하며 이회택, 최순호, 홍명보, 황선홍, 이동국 등 무수한 스타들을 배출한 팀이지만, 2010년대 이후 현재는 모기업의 투자 규모가 줄어들며 K리그 중위권팀 수준에 그치고 있다.
 
매년 시즌을 마치고 나면 좋은 활약을 주축 선수들이 리그내 경쟁팀이나 아시아 타 리그로 이적하며, 우승을 노리는 명가에서 셀링클럽이 되었다는 자조섞인 평가도 나온다. 올시즌중 송민규 이적 사태로 팬들이 극도로 분노하고 프런트가 성난 여론에 놀라 사과문까지 올린 것이 불과 몇 달전의 일이다.
 
그랬던 포항이 지금은 K리그를 대표하여 아무도 기대하지 못했던 ACL 결승까지 올랐다. 한국축구가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독일을 격침시킨 '카잔의 기적'을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축구에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우승에 실패할 수도 있고, 설사 우승한다고 해도 모기업의 사정상 축구에 대한 투자는 당장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21년 포항의 우승 도전은 그 자체로 축구단이 이어온 전통의 가치와  자부심을 다시 일깨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앞으로 구단 운영에 대한 인식과 방향성을 바꾸는 데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다. 수많은 고비 속에서도 포항은 포항만의 길을 지켜왔듯이, 스틸러스 웨이(Steelers Way, 포항축구의 슬로건)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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