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계춘할망> 포스터

영화 <계춘할망> 포스터 ⓒ (주)콘텐츠 난다긴다

 
해외여행이 그리 많지 않았던 1990년대엔 제주도를 배경으로 제법 많은 영화가 나왔다. <시월애> <자귀모> <쉬리>같은 영화가 한두 장면씩을 제주도에서 촬영했고, <연풍연가>는 아예 영화 대부분을 제주도에서 찍었을 정도였다. 제주도의 아픈 역사를 되짚은 <이재수의 난>도 제주도에서 촬영됐으니 1998년과 1999년 두 해 동안만도 다섯 편의 제법 큰 영화가 제주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하겠다.

2000년대 들어 상황이 급변했다. 제주도는 영화 제작자들에게 별 흥미를 끌지 못했다. 해외여행이 훨씬 수월해졌고 가격도 저렴해진 영향이다. 2015년까지 제주가 조금이라도 나오는 영화 중 그나마 주목받은 건 2004년 <인어공주>, 2009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 2012년 <건축학개론> 정도가 고작이다. 제주도는 빠르게 영화계에서 잊히기 시작했다.

그랬던 제주도가 2016년부터 다시금 주목받기 시작했다. 올레길과 게스트하우스의 유행은 해외여행에 크게 밀려 있던 제주도를 다시금 조명 받도록 했다. 2016년에만 <올레>와 <계춘할망>이 개봉하더니 매년 적어도 한 편씩의 영화는 제주도에서 촬영을 진행한 것이다. 그 내용도 다양해져 어떤 것은 로맨스를, 어느 것은 성장기를, 또 어떤 것은 가족의 소중함을 다룬다.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일본의 홋카이도가 그렇듯 한국에서도 단연 특색 있는 제주도의 경관이 스크린 위에 자주 선보이는 시대가 온 것이다.

제주도가 잠시잠깐 등장한 많은 영화가 있지만 그중 제주도의 영화로 내세울 만 한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다룬 <지슬>과 <이재수의 난> 같은 영화가 있긴 했으나 상업영화로 제주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드문 게 사실이다.
 
 <계춘할망> 스틸컷

<계춘할망> 스틸컷 ⓒ (주)콘텐츠 난다긴다


호평 받은 제주영화, <계춘할망>

<계춘할망>은 제주에서 촬영한 영화 가운데 작품성과 상업성 모두에서 호평 받은 몇 안 되는 영화다. 신파적 요소와 극적 짜임새에 있어 다소간 흠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편안한 연출과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 안정된 전개에 힘입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도쿄국제영화제와 이탈리아 우디네 극동영화제 등 외국에까지 소개된 것도 이러한 영향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는 애지중지하던 손녀 혜지를 잃어버린 해녀 계춘(윤여정 분)의 이야기다. 손녀를 잃고 십여 년을 눈물로 지새운 그녀 앞에 어느 날 갑자기 잃어버렸던 혜지(김고은 분)가 나타난다. 훌쩍 자라 고등학교에 다닐 나이가 된 혜지는 전처럼 곰살궂던 어린 아이가 아니다. 무뚝뚝하고 날카로운 사춘기 소녀로 어딘지 불량하고 의뭉스런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계춘의 주변 사람 중에선 혜지를 경계하는 이도 없지 않지만 계춘만큼은 혜지가 잃어버린 손녀가 맞다고 역정을 낸다.

영화는 혜지가 계춘할망에게 마음을 터놓기까지의 여정이며, 그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까지의 이야기다. 익숙한 흐름을 따라 예고된 감동의 영역에 이르는 전형적 구성이지만 섣불리 감정을 강요하기보다 자연스레 이끄는 솜씨가 제법인 작품이다. 윤여정과 김고은은 그들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좋은 배우인지를 러닝타임 내내 입증한다. 어두움 가운데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빛을 좇는 두 배우의 모습은 서로와 만나 한층 힘 있는 연기를 완성했다.
 
 <계춘할망> 스틸컷

<계춘할망> 스틸컷 ⓒ (주)콘텐츠 난다긴다

 
오스카 받기 5년 전에도 윤여정은 훌륭했다

특히 윤여정의 연기는 영화를 본 모든 이들이 입을 모아 극찬하는 요소다. 손녀를 잃어버린 시점부터 사춘기 손녀와 재회하고, 다시 충격을 받아 서울의 어느 거리를 떠돌기까지 시간은 물론 감정적 낙차가 상당한데 그녀는 이 모두를 위화감 없이 소화한다. 더불어 그 가냘픈 몸에서 뿜어내는 기쁨과 슬픔, 기대와 좌절, 불안과 사랑이 관객에게 온전히 가서 닿으니 이로부터 5년 뒤 오스카를 집어 들기까지의 여정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으로 느껴질 정도다.

제주도의 모습 역시 영화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이끈다. 드넓은 바다와 파도, 해녀와 물질, 숨비소리, 돌담, 똥돼지, 중국인이 사들이는 마을의 상황, 마을 사람들의 끈끈함 같은 것들이다. 제주의 것들이 한곳에 모여 육지에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맛과 멋을 내는데,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마치 제주로 여행을 떠나온 듯한 기분을 느끼기 충분하다.

영화가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는 수준 있는 작품이 된 만큼 이후 제주도를 다룬 영화들에서도 이 영화에 존중을 표하는 작품이 없지 않다. 특히 미술선생 역을 맡은 양익준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2017년 작 <시인의 사랑>에선 <계춘할망> 속 인상적인 대사가 거의 그대로 반복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제주도를 다룬 영화를 연달아 보고 싶은 관객이라면 두 영화를 비교해 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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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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