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KBS <연모> 제12회에서는 세자(박은빈 분)가 폐위돼 출궁당하는 장면이 묘사됐다. 죽은 쌍둥이 오빠를 대신해 남장여인으로 살면서 세자 역할을 대신해오던 공주가 불명예스럽게 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여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폐세자된 것은 아니다. 횡포한 왕실 숙부인 창운군(김서하 분)이 세자와 인연이 있는 여성 노비를 살해했다. 이 일에 분노한 세자가 숙부를 징계한 일이 사건의 발단이 된 것이다.
 
세자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노비의 무덤에 사죄의 절을 올린 창운군이 그 뒤 유서와 함께 변사체로 발견되고, 조카한테 모욕을 당한 왕족이 자결했다는 소식이 널리 퍼졌다. 그러자 정치적 사주를 받은 유생의 인솔 하에 선비들이 궁궐 앞으로 몰려가 세자 폐위를 요구했다. 이로 인한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임금(이필모 분)이 폐세자를 단행했던 것이다.
 
정치적 이유 등으로 자리 빼앗긴 세자들    
   
 KBS <연모>의 한 장면.

KBS <연모>의 한 장면. ⓒ KBS

 
27명의 임금이 배출된 조선왕조 518년 동안에 주상의 공식 후계자는 총 31명이었다. 이 31명은 주로 세자로 불렸지만 세제나 세손으로도 불렸다. 임금의 아들이냐 동생이냐 손자냐에 따라 명칭이 갈렸지만, 중요한 것은 자(子)·제(弟)·손(孫)이 아니라 세(世)였다. 현직 주상의 후계자라는 점이 중요했지, 자냐 제냐 손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세자·세제·세손을 전부 세자로 통칭해도 무방하다.
 
27명 중에 제6대 단종, 제8대 예종, 제24대 헌종, 제25대 철종은 세자(세제·세손 포함)가 없었다. 임금 23명에게서 세자 31명이 배출됐던 것이다.
 
그중에서 <연모>의 세자처럼 명확히 폐세자 처리된 인물은 네 명이다. 폐세자 하면 떠오르는 양녕대군을 포함해 연산군의 아들인 이황, 광해군의 아들인 이지,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폐위를 당했다.
 
양녕대군은 각종 스캔들과 자질 문제 때문에 자리를 잃었지만, 이황·이지·사도세자는 정치적 이유로 자리를 빼앗겼다. 이황·이지은 아버지의 실각과 함께 폐세자를 당했다. 사도세자의 경우에는 개인적 비행도 어느 정도 문제가 됐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기득권과의 충돌에 있었다. 기득권층과 타협하지 않는 그의 태도가 영조의 국정 운영에 부담을 초래해 임오년인 1762년의 임오화변(사도세자 참극)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연모>의 세자는 양녕대군처럼 비정치적 이유로 폐위됐다. 조선시대의 윤리 관념으로 보면, 양녕대군의 폐위 사유보다 <연모>의 폐위 사유가 훨씬 중대하다. 2021년의 윤리 관념을 기준으로 하면 양녕대군이 더 중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왕족이자 숙부가 죽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관점으로 보면 <연모>의 세자가 더 패륜적이었다.
 
하지만, 양녕대군이나 <연모>의 세자처럼 비정치적 이유로 폐위를 당하면, 적어도 목숨은 보존할 길이 있었다. 어느 시대건 도덕 윤리를 위반하는 것보다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 더 중한 일로 취급됐기 때문에, 이황·이지·사도세자처럼 정치적 승자나 기득권층의 배척을 당한 세자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었다.
 
양녕대군이 충녕대군(세종)에 의해 대체되고도 충녕보다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양녕이 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충녕이 형을 보호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녕이 정치적 이유로 폐위되지 않았다는 점도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연모>의 세자가 폐위되고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 같은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상당히 불안했던 세자의 지위
 
 KBS <연모>의 한 장면.

KBS <연모>의 한 장면. ⓒ KBS

 
한편, 순종황제의 황태자인 이은도 넓은 의미의 폐세자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아버지 고종이 황제였을 때 대군(大君)급인 영친왕이 됐다가 형 순종이 황제가 됐을 때 황태자(엄밀히 말하면 황태제)가 된 이은은 1910년 대한제국 멸망과 함께 이(李)왕실 세자로 격하됐다.
 
일본은 한민족 대중을 식민지 민중으로 격하시키면서도 대한제국 귀족·대지주와 더불어 황실의 지위만큼은 보장했다. 그래서 제후급인 이왕실로 격하되기는 했어도 대한제국 황실은 기존의 지위를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런 속에서 황태자 이은은 세자 이은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일본으로부터 기존 지위를 상당 부분 보장받기는 했지만, 황태자 지위를 잃게 됐다는 점에서 이은 역시 넓은 의미의 폐세자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폐세자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세자 신분을 유지한 상태에서 '죽임'을 당해 내쳐진 사람들도 넓은 의미의 폐세자 범주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방원이 주도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목숨을 잃은 세자 이방석도 본질적으로 보면 폐세자나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
 
이방석처럼 피살을 당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지만, 그런 의심을 사는 사례들이 있다. 아버지 인조와 갈등하다가 독살로 추정되는 최후를 맞이한 소현세자가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폐세자시켜 내쫓는 것이나 독살시켜 내쫓는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시대의 기득권세력인 안동 김씨에 맞서다가 만 21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난 효명세자 역시 유사한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죽음 역시 결과적으로 폐세자와 다를 바 없는 정치적 결과를 낳았다.
 
총 31명의 주상 중에서 23명이 공식 후계자를 뒀고 그 23명에게서 31명의 세자가 배출됐으며, 31명 중에서 양녕대군·이황·이지·사도세자는 폐위되고 이은은 황태자에서 제후급 세자로 격하되고 이방석은 피살됐다. 소현세자는 독살로 추정되는 의문사를 당하고 효명세자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이들은 31명 중에서 여덟 명이다.
 
이 외에도, 세자가 됐지만 왕이 되지 못한 사례들은 더 있다. 세조의 아들인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 영조의 아들인 효장세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의소세손, 정조의 아들인 문효세자가 이에 포함된다. 이들은 정치적 사유와 관계없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31명 중에서 다섯 명이 해당한다.
 
31명 중에서 13명이 왕이 되지 못한 채 죽거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절반에 가까운 세자들이 불행을 겪은 것이다. 정치적 이유든 건강상 이유든 세자의 지위가 상당히 불안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사람인 사도세자나 효명세자는 조선 세자의 지위가 그처럼 불안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 수 있는 시대적 위치에 있었다. 조선 세자가 정치적으로 마찰을 일으키면 쫓겨날 수도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기득권 세력에 용감이 맞섰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세자들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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