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처음 방영된 MBC 사극 <옷소매 붉은 끝동>은 성의빈(의빈 성씨)과 정조 임금의 사랑을 다룬다. 배우 한지민과 이서진이 주연했던 2007년 MBC <이산>과 색다른 관점에서 이들의 사랑을 그리게 된다.
 
제목으로 쓰인 '옷소매 붉은 끝동'은 홍수(紅袖)라는 한자어를 풀이한 것이다. 이 드라마 홈페이지의 '프로그램 소개'란은 "옷소매 끝을 붉게 물들여 입은 그녀들, 궁녀"라며 "옷소매의 붉은 끝동은 왕의 여인이라는 징표다"라는 설명을 제공한다. 궁녀들이 소매 붉은 옷을 입었으며 그것은 임금의 여성을 뜻하는 징표였다는 해설이다.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 ⓒ MBC

 
비슷한 언급이 지난 12일 제1회 방영분에서도 나왔다. 방송이 31분을 경과할 때 생각시인 성덕임(아역 이설아 분)과 정조 할아버지인 영조(이덕화 분)가 우연히 만나는 장면에서 그것에 관한 대화가 있었다.
 
드라마 속의 영조는 처음 만난 이 견습 궁녀에게 "옷소매 끝동은 몹시 붉고 과인은 그걸 보며 마음이 아팠더랬지"라며 "왜 아팠냐고? 궁녀들이 옷소매 끝을 붉게 물들여 입는 것은 그녀들이 왕의 여인이라는 징표야"라고 말한다.
 
궁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궁녀나 궁인 외에도 나인·항아·홍수 같은 명칭으로 불렸다. 홍수는 항아와 더불어 비공식적인 명칭이었다. 궁녀가 홍수로도 불린 것은 이것이 임금의 여성을 뜻하는 단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드라마의 설명은 역사적 실제와 크게 동떨어진다.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이 단어에 관해 <정선판 일본국어대사전>은 "붉은 소매. 변이되어 부인 의복의 소매. 아름다운 소매(赤い袖. 転じて、婦人の衣の袖. 美しい袖)"라는 설명을 제공한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붉은 소매'를 뜻했다가 나중에는 여성이나 아름다움과 관련된 의미로 전이됐다는 것을 이 설명에서 느낄 수 있다.
 
옛날 한국에서는 이 단어가 아름다운 여성을 지칭하는 데 쓰였다. 홍수가 궁녀를 뜻하기 전에 미인을 의미했다는 점은, 무신정변 2년 전인 1168년에 태어나 고려·몽골 전쟁(항몽전쟁) 초반인 1241년에 세상을 떠난 이규보의 시에도 나타난다.
 
문인이자 문신인 그의 글을 수록한 책이 <동국이상국집>이다. 이 책 제6권에 실린 '18일 말 위에서 (시를) 지어, 동행하는 도사 김지명에게 보이다(十八日. 馬上有作, 示同行道士金之命)'라는 시에도 그런 용례가 나타난다.
 
시 제목처럼 도사 김지명과 단둘이 움직이게 된 과정이 시에서 설명된다. "차마 붉은 소매의 아름다운 여성을 가게 하고(忍敎紅袖佳人去)"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붉은 소매의 아름다운 여성을 돌려보낸 뒤 김지명과 단둘이 가게 됐다는 것이다.
 
이 구절 바로 밑에는 "기생이 따라가고자 했지만 힘써 말렸다"는 주석이 붙어 있다. 홍수로 표현될 만한 외모를 가진 기생이 동행하고자 했지만 사양했던 것이다.

이색의 시에서도 사용된 '홍수'
 
 이규보의 시에 등장하는 ‘홍수’.

이규보의 시에 등장하는 ‘홍수’. ⓒ 퍼블릭 도메인

 
시 속의 기생은 왕의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붉은 소매의 아름다운 여성으로 표현돼 있다. 그가 실제로 붉은 소매가 달린 옷을 입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이 시대에는 붉은 소매나 '홍수'가 미인을 지칭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 기생의 옷소매는 붉지 않았더라도, 그의 외모를 근거로 그런 표현을 썼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규보에게서 나타나는 이 같은 용례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쓰였다는 점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87년 뒤인 1328년에 태어난 목은 이색의 시에도 나타난다. 정도전·정몽주의 스승이자 개혁파 신진사대부의 구심점인 이색의 시에서도 홍수란 단어가 그렇게 사용됐다.
 
이색은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추앙됐다. 조선 건국 4년 뒤인 1396년에 세상을 떠난 그가 홍수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를 살펴보면,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 초기까지도 이 단어가 어떻게 활용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목은시고> 제9권에 실린 '직강 집 소녀가 파를 주다(直講家小娃送蔥)'라는 시는 성균관이나 세자부 혹은 왕자부에서 직강 벼슬을 하는 사람의 심부름으로 자기 집을 찾아온 소녀를 보고 이색이 느낀 감정을 표현한 시다. 시는 "소녀의 붉은 소매가 실바람을 일으켜라(小娃紅袖動微風)"라는 대목으로 시작한다. 소녀가 실제로 붉은 소매 옷을 입었는지는 알 수 없다. 소매가 붉지 않았더라도 외모를 보고 홍수를 연상했을 수도 있다. 소녀를 본 이색의 마음에서 실바람 같은 변화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홍수란 단어가 외모에 관한 평가를 담고 있다는 점은 다음 구절에서 확인된다. 이색은 "아름다운 외모라, 속마음도 착할 것 같다"고 읊는다.
 
소녀와 이색의 사이에는 서로 가까이 하기 힘든 엄연한 차이가 존재했다. 그래서인지 소녀는 들고온 파를 이색에게 직접 건네지 않았다. 그래서 소녀를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이색은 그가 자기를 힐끗 쳐다보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한다. "푸른 파를 주고 잠시 모여 앉아/ 백발 늙은이를 한번 힐끗 돌아본다"며 이색은 시를 끝맺는다.
 
이규보나 이색 같은 저명한 문인들의 글에서도 나타나듯이, 홍수는 미인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왕의 여자를 지칭하는 어휘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게 미인을 뜻하는 글자로 쓰이다가 조선시대 들어 궁에서 일하는 여성을 지칭하는 의미로 전이됐던 것이다. 이 글자가 왕의 여자를 뜻하기 때문에 궁녀를 지칭하는 데 쓰인 것이 아니라, 미인을 뜻하는 글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주고자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옷소매 붉은 끝동>은 붉은 소매는 임금의 여성이라는 증표였으며 궁녀들이 소매 붉은 옷을 입고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궁녀들의 옷소매가 반드시 붉었던 것은 아니다. 정순왕후 김씨와 영조의 결혼식을 담은 당시의 그림이나 역사학자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연구>에 수록된 구한말 궁녀들의 사진을 보면, 궁녀들의 소매가 붉었기 때문에 홍수로 불린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구한말 궁녀들의 사진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속의 궁녀들.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속의 궁녀들. ⓒ 퍼블릭 도메인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속의 구한말 궁녀들.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속의 구한말 궁녀들. ⓒ 퍼블릭 도메인


궁녀는 왕이 사는 곳에서 일하고 왕에게 최고의 충성을 바쳤다. 그런 의미에서는 왕의 여자로 불릴 만했다. 하지만, 법적인 개념으로 말하면, 그들은 왕후의 여자 혹은 왕비의 여자였다. 그들은 내명부라는 조직에 속했고 이곳은 왕후가 관리했다. 임금이 궁녀에게 처분을 내리려면 왕후의 결정이 필요했을 정도다.
 
왕후는 오늘날의 대통령부인과 달리 실권을 갖고 있었다. 대통령부인의 취임식은 없지만, 왕후의 책봉식은 있었다. 오늘날에는 국가 비상시에 총리나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지만, 왕조시대에는 왕후나 대비들이 임금의 권한을 대행했다. 경우에 따라 이들은 차기 군주를 지명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막강한 왕후들이 홍수가 그런 의미로 사용되도록 놔두었겠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 속의 영조가 얼마나 엉뚱한 말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전인 <대전회통>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궁녀들은 공노비(관노) 중에서 선발됐다. 왕실에서 공노비를 궁녀로 선발하고 왕후가 이들을 관리한 것은 이들에게 궁궐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지, 이들을 왕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궁녀들이 왕의 여자라는 의미에서 홍수로 불렸으며 그런 취지로 붉은 소매 옷을 착용했다는 이 드라마의 설정은 궁녀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데 방해가 된다. 일평생 궁궐에서 중노동을 하면서 살았던 그들에 관한 잘못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는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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