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연모>의 한 장면

KBS 2TV <연모>의 한 장면 ⓒ KBS

 
KBS 2TV 드라마 <연모>는 지난 1일과 2일 방영분에서 명나라 사신의 횡포를 묘사했다. 조선 출신의 환관 수장인 명나라 태감(박기웅 분)은 7회 방영분에서 음식이 변변찮다며 세자 이휘(박은빈 분)에게 불평을 늘어놓고, 세자와의 언쟁 중에 시녀인 김 상궁(백현주 분)을 폭행하고 머리카락을 잘라버린다. 8회 때는 칼 든 무사를 시켜 세자를 위협하고 호위무사 김가온(최병찬 분)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한다.
 
극악무도한 이 장면들은 물론 드라마 속의 설정이지만, 명나라 사신들이 실제로 물리적 행패를 부리는 일은 자주 있었다. 이 때문에 세종대왕이 골머리를 앓았을 정도였다.
 
음력으로 세종 11년 8월 12일자(양력 1429년 9월 10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만 32세 된 세종은 이런 중국인은 처음 봤다며 명나라 사신 이상(李相)을 비판했다. 그는 신하들과 함께한 자리에서 "사신 이상은 심히 못난 사람이다"라며 "가는 데마다 번번이 사람을 때린다"고 탄식했다. 이상에게 얻어맞은 사람들 중에는 조정 관료들도 있었다.
 
'심히 못난'이란 말을 표현할 때 사관은 불초(不肖)라는 한자어를 썼다. 어버이를 닮지 못한 자식이라며 스스로를 나무랄 때 쓰는 '불초'란 글자를 사용한 것이다.
 
세종이 직접 '불초'란 한자어를 언급한 것인지, 아니면 세종은 '심히 못난'이라고 말했는데 사관이 '불초'로 번역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이 자기 부모한테도 제대로 못하는 불효자일 거라는 뉘앙스를 풍길 만한 표현이다. 이상에 대한 미움과 분노를 상당히 절제된 감정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세종 입장에서는 조선 백성을 함부로 때리는 사신 이상의 행동이 세종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더 마음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세종은 사신 이상을 언급한 직후에 또 다른 명나라 사신인 창성(昌盛)을 거론했다. 창성은 도벽이 심각했다. 조선 관청에서 은그릇과 의자 등을 거리낌 없이 빼앗아갈 뿐 아니라 민가에 가서 말을 빼앗기도 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강대국 외교관이 한국 국민들의 고급 승용차를 빼앗아 가는 식의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조선 조정을 괴롭힌 명나라 사신
 
 KBS 2TV <연모>의 한 장면

KBS 2TV <연모>의 한 장면 ⓒ KBS

 
명나라 사신들은 폭행·약탈뿐 아니라 뇌물 요구로도 조선 조정을 괴롭혔다. 양국 정부 간에 공식적으로 이뤄지는 조공과 회사(回賜, 답례) 형태의 물물교환과 관계없는, 명나라 사신들의 개인적인 뇌물 요구가 고민거리를 안겼던 것이다.
 
세종 11년 6월 19일자(1429년 7월 20일자) <세종실록>에 따르면, 세종은 악질 사신인 창성에 대한 나름의 대책을 생각해냈다. 그런 뒤 정승급인 맹사성과 황희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 2가지 중에, 창성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그 두 가지는 '그냥 참아야 하느냐' 아니면 '꾸짖어줘야 하느냐'였다. 세종 같은 인물이 생각해낸 아이디어치고는 다소 싱겁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32세 된 군주의 물음에 대해 69세 맹사성과 66세 황희는 앞의 것을 선택하라고 건의했다. 그냥 꾹 참으시고 잘 대우해서 보내라는 것이었다. 창성이 명나라에 가서 거짓 보고를 하게 되면 시시비비를 해명하기 힘들어 조선 조정만 근심을 안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세종이 겪었던 이 같은 상황은 조선 전기의 대명(對明) 사대주의를 반영한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한국 역사상 최악의 사대주의를 나타내는 장면 중 하나에 해당한다.
 
명나라는 동맹국들 중에서 조선을 가장 우대했다. 이 점은 무역관계에서도 상징적으로 표현됐다. <연모> 제8회에서는 명나라에 대한 조공이 일방적인 공물 제공인 듯 언급됐지만, 명나라는 조선으로부터 받은 조공보다 더 많은 회사(回賜)를 조선에 제공했다.
 
조선의 조공보다 명나라의 답례가 관례상 더 많았기 때문에, 조선이 조공을 하면 할수록 명나라는 계속 적자를 봤다. 명나라 행정법전인 <대명회전>에 따르면, 명나라는 이런 적자무역을 해마다 3번씩 하다가 나중에는 4번씩 했다.
 
유구왕국(오키나와)과는 2년에 1회, 베트남·태국과는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했다. 명나라가 대외무역 측면에서 조선을 얼마나 우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조선을 우대하면서도 사신들의 횡포를 방치해 조선 조정을 심란하게 만든 것은 명나라 정부가 사신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선을 조명동맹의 틀 속에 단단히 묶어두려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명나라는 여진족을 무서워했다. 이 당시에는 힘이 별로 없었지만 과거에는 금나라를 세워 동아시아를 제패했던 민족이다. 그런 여진족의 발호를 견제하자면 여진족과 인접한 조선의 협력이 필수적이라고 명나라는 판단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선을 자기편으로 묶어두고 싶어 했다. 무역특혜를 제공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명나라는 조선을 의심했다. 그 같은 명나라 황실의 의심이 사신들의 태도에도 어느 정도 반영됐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폭력적 방법을 동원해 조선 조정을 심리적으로 제압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조선이 최대 동맹국이었으므로 조선에 대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어야 마땅했다. 세종이 왕이 되고 3년 뒤인 1421년에는 명나라 수도가 북경(베이징)으로 옮겨져 여진족과 한층 가까워졌기 때문에 조선을 더 부드럽게 대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도 명나라 사신들이 안하무인 식의 행동을 하고 명나라 황제들이 이를 묵인한 것은 그렇게 해도 조명동맹이 위태로워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선을 묶어두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방원의 정치적 콤플렉스
 
 KBS 2TV <연모>의 한 장면

KBS 2TV <연모>의 한 장면 ⓒ KBS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을 함부로 대하고 조선의 사대주의가 한층 심해진 데는 또 다른 원인도 있었다. 이방원 이래의 정치적 콤플렉스가 바로 그것이다.
 
이방원은 자주성을 표방하며 명나라에 맞선 이성계-정도전 정권을 전복했다. 이 정권에 대한 이방원의 쿠데타가 쉽게 성공한 요인 중 하나는 명나라의 지지였다. 명나라는 이방원에 대한 호의를 표시함과 동시에 정도전 정권에 외교적 압박을 가함으로써 정도전 주변에 세력이 형성되는 것을 견제했다. 또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위에 언급된 무역특혜를 제공함으로써 이방원 정권을 안정시켰다.
 
상당부분은 명나라의 힘을 빌려 정권을 차지하고 안정시켰다는 점은 명나라에 대한 이방원의 의존성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는 그 이후의 조선 정부가 여진족에 대해 좀더 독자적인 정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명나라에 끌려 다니는 원인이 됐다.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무역 특혜를 받는 대신, 명나라의 요구에 이끌려 여진족 토벌작전에 군사력을 허비해야 했다.
 
이방원이 건국시조이자 아버지인 이성계를 배반하고 정권을 차지했다는 약점 역시 강대국에 대한 이방원의 의존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아버지를 배반한 일로 인한 정통성 부족을 조명동맹을 통해 보충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의 아들인 세종이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를 어쩌지 못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했다.
 
명나라 사신들의 횡포 때문에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마땅한 대책을 수립할 수 없는 세종대왕의 모습은, 여진족 견제를 위한 조명동맹을 유지하고자 조선에 무역특혜도 제공하고 조선을 압박도 하는 명나라의 전략과 더불어, 정도전 정권이 축출된 이후로 점점 더 명나라에 의존해갔던 조선 왕실의 처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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