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세계적으로 무려 1억 4200만 가구가 시청한 넷플릭스 역대 최고 인기 드라마다. 본편은 물론 유튜브를 통해 올라오는 세계 각국 시청자들의 리액션 영상까지 화제가 될 정도. 특히 '딱지맨' 공유가 '깜짝 출연'한 1회 지하철 장면에서는 해외 시청자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공유는 <오징어 게임> 황동혁 감독이 연출한 <도가니>에 출연한 바 있다).

<오징어 게임>에서 공유를 발견한 해외 시청자들은 <부산행>이나 <도깨비>를 통해 이미 공유라는 배우에 익숙해 있었다(남자 시청자들은 주로 <부산행>, 여성 시청자들은 대체로 <도깨비>를 떠올린다는 차이점은 있지만). 하지만 정작 국내에서 공유 이상의 인지도를 가진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 이정재를 보고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오징어 게임> 전에는 해외에서 알려진 이정재의 흥행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외 시청자들에게 이정재의 젊은 시절 영상이나 사진, 또는 카리스마 있는 캐릭터를 연기했던 <관상>이나 <신세계> 같은 영화를 보여주면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하지만 국내 관객들은 이정재의 찌질한 연기에 어느 정도 훈련(?)이 돼 있다. 이정재는 이미 지금으로부터 22년 전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를 통해 찌질한 연기의 시작을 알렸기 때문이다.
 
 <태양은 없다>는 한창 떠오르는 두 젊은 배우가 함께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가 된 작품이다.

<태양은 없다>는 한창 떠오르는 두 젊은 배우가 함께 출연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화제가 된 작품이다. ⓒ 삼성 픽쳐스

 
<모래시계> 보디가드, '믿고 보는 배우'로 성장

인테리어와 미술 공부를 하던 이정재는 카페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 매니저의 눈에 들어 모델로 데뷔했고 1993년 <공룡선생>을 통해 연기를 시작했다. 이정재는 데뷔 초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와 <느낌>, 영화 <젊은 남자>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는데 그중에서 <모래시계>의 백재희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다. 사실 연기가 부족해 극 중 대사는 많지 않았는데 그것이 오히려 '과묵한 보디가드' 역할에 완벽하게 어울렸다.

<모래시계>를 끝내고 곧바로 방위복무를 하며 병역의무를 마친 이정재는 소집해제 후 <박대박> <불새> <정사> 등 영화 쪽 활동에 집중했다. <비트>로 주가를 높이던 정우성과의 만남으로 화제가 된 김성수 감독의 <태양은 없다> 역시 그 시절에 찍은 영화였다. <태양은 없다>는 두 젊은 미남배우의 만남으로 큰 화제를 모았고 서울에서만 32만 관객을 동원하며 괜찮은 흥행성적을 올렸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김종학 감독의 <백야3.98>을 끝으로 완전히 영화에 전념한 이정재는 <시월애> <인터뷰> <순애보> <선물> <흑수선> 등 많은 작품에 출연했지만 <태양은 없다> 만큼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2003년 이범수와 형제 연기를 펼친 <오!브라더스>가 전국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그나마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이정재는 <태풍> <1724 기방난동사건> 등에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렇게 '작품 고르는 눈이 떨어지는 배우'의 이미지가 굳어지던 이정재는 2012년 <도둑들>과 2013년 <신세계> <관상>을 차례로 만나면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도둑들>과 <신세계> <관상>은 세 편 합쳐 무려 26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이정재 역시 각 작품에서 물이 오른 연기로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관상>에서의 수양대군 등장은 한국영화 역대 최고의 등장신으로 꼽힐 만큼 엄청난 카리스마를 발산했다.

이정재는 이후 <암살>의 임석진, <신과 함께> 시리즈의 염라대왕,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레이를 연기하며 '믿고 보는 배우'로 관객들의 높은 신뢰를 얻었다. 그리고 올해 세계 최고의 화제작 <오징어 게임>의 성기훈을 통해 전 세계 시청자들을 홀리는 찌질한 연기로 단숨에 '월클 배우'로 등극했다. 이정재는 현재 내년 개봉 예정인 연출 데뷔작 <헌트>를 통해 23년 만에 정우성과 같은 작품에 출연할 예정이다.

제목과 달리 태양이 뜨면서 끝나는 영화
 
 이정재(왼쪽)와 정우성은 20년이 넘는 '절친'이지만 여전히 서로에게 존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정재(왼쪽)와 정우성은 20년이 넘는 '절친'이지만 여전히 서로에게 존대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삼성 픽쳐스

 
<태양은 없다>가 개봉했을 때 관객들이 이정재를 바라보는 이미지에는 여전히 <모래시계> 백재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검도의 달인이었던 보디가드 백재희는 조직 폭력배 수십 명이 둔기를 들고 한꺼번에 덤벼들지 않는 이상 절대 쓰러트릴 수 없는 세계관 내 최강자 중 한 명이었다. 따라서 같은 배우인 이정재가 연기한 <태양은 없다>의 홍기가 고작 사채업자 몇 명에게 겁 먹고 도망 다니는 장면은 적응하기 쉽지 않았다.

<태양은 없다>의 홍기는 마치 <오징어 게임> 성기훈의 20대 시절을 보는 듯한 캐릭터다. 언제나 일확천금을 노리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하며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면서도 어렵게 마련한 돈을 도박에 탕진한다. 홍기를 연기한 배우가 이정재가 아니었다면 아마 홍기는 관객들에게 큰 미움을 받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정재가 평소 가지고 있던 자신의 이미지를 깨고 얄밉고도 찌질하게 홍기를 잘 표현했다는 뜻이다.

반면에 또 한 명의 주인공 도철(정우성 분)은 펀치 드렁크(복싱선수가 주로 입는 뇌세포 손상증)에 시달리는 무명복서로 자신을 이긴 후배와 싸우고 체육관을 나와 홍기와 흥신소에서 일을 한다. 홍기가 자신의 돈을 들고 사라지자 갈 곳을 잃은 도철은 다시 체육관으로 찾아가 마지막 경기를 위해 훈련에 매진한다. 하지만 이미 전성기가 지난 도철은 마지막 경기에서 KO로 패하고 가장 외로운 순간 유일하게 자신을 위로해준 홍기와 다시 의기투합한다.

사실 <태양은 없다>는 철저하게 루저들의 이야기다. 홍기는 돈을 많이 벌어 건물을 사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은 불어나는 사채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언제나 사채업자 병국(이범수 분)에게 쫓겨 다닌다. 도철 역시 대학에 특기생으로 입학할 만큼 촉망 받는 복서였지만 챔피언은커녕 병만 생긴 한물간 복서다. 배우의 꿈을 가진 여주인공 미미(한고은 분)도 오디션에서 번번이 낙방한다.

하지만 실패자들의 이야기 <태양은 없다>는 주인공들이 좌절하고 몰락하는 비극적인 장면이 아닌 두 주인공이 떠오르는 아침 태양을 바라보며 장난을 치고 다시 힘을 내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전작 <비트>에서 이민(정우성 분)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영화를 끝냈던 김성수 감독이 IMF 외환위기 속에서 개봉한 <태양은 없다>에서는 미래를 불안해하는 청춘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던져주며 이야기를 마무리한 것이다.

중견배우 한고은-김영호-류현경의 '루키 시절'
 
 <태양은 없다>는 CF를 위주로 활동하던 한고은(왼쪽)의 실질적인 연기 데뷔작이었다.

<태양은 없다>는 CF를 위주로 활동하던 한고은(왼쪽)의 실질적인 연기 데뷔작이었다. ⓒ 삼성 픽쳐스

 
중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간 재미교포 1.5세 한고은은 1995년 슈퍼 엘리트 모델 선발대회를 통해 데뷔해 광고모델로 활동하다가 <태양은 없다>를 통해 정식으로 연기를 시작했다. 슈퍼모델 출신의 빼어난 외모로 영화 내내 눈에 띄지만 사실 연기에서는 큰 기대를 하기 힘들 정도로 어설프기 짝이 없다. 이 때문인지 김성수 감독의 전작인 <비트>의 히로인 로미(고소영 분)에 비하면 분량이 많지 않은 편이다.

실제로 한고은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해피투게더> <보디가드> <장길산> <꽃보다 아름다워> <봄날> 등 여러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연기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던 2007년 드라마 <경성스캔들>에서 독립투사 차송주를 연기하며 배우로서 인정 받기 시작했고 지금은 여러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올해는 jtbc 드라마 <언더커버>에서 전직 안기부 언더커버 요원을 연기했다.

배우 김영호에게도 <태양은 없다>는 영화 데뷔작이었다. 김영호는 <태양은 없다>에서 정우성이 연기한 도철의 복싱 트레이너를 연기했다. 같은 해 <신장개업>과 <유령>에도 출연한 김영호는 2001년 왁스 2집의 뮤직비디오 <화장을 고치고>와 <사랑하고 싶어>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얼굴을 알렸다. 그리고 2002년 <야인시대>에서 중년 이정재 역을 맡으며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비록 단역이었지만 <태양은 없다>에서는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꾸준히 활동하는 배우 류현경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1996년 SBS의 설날특집극 <곰탕>에서 김혜수의 아역으로 출연하며 배우로 데뷔한 류현경은 <태양은 없다>에서 이정재가 연기한 홍기의 이부남매로 짧게 출연했다. 류현경은 극 중에서 대사 한마디 없지만 홍기가 돈을 전달한 후 건네는 "너 크면 진짜 예쁘겠다"는 칭찬을 듣고 수줍게 웃는 연기를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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