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쌍둥이 오빠를 대신해 여자동생이 오빠의 옷을 입고 세자 역할을 한다는 드라마 <연모>는 여성의 리더십이 조선시대에 용인되지 않았을 거라는 인식을 상당 부분 깔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성은 남자 모습으로 변장하지 않는 한 정치권력을 얻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관념이 이 드라마 속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KBS 사극 <연모>

KBS 사극 <연모> ⓒ KBS

 
이 드라마에서처럼 임금의 직계자손이 공주와 왕자 둘뿐인 상황에서 왕자가 세상을 떠난다면, 일반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임금이 후궁을 들여 후계자 출산을 시도하거나 여의치 않으면 남자 친족을 왕자로 입양하는 일이다. 이런 일은 실제 역사에서 수도 없이 발생했다.
 
하지만 위의 상황에 놓인 공주가 고도의 정치적 의지와 비상한 역량을 갖고 지지 세력을 확보한다면, 이야기가 다소 달라질 수도 있다. 이런 조건들이 갖추어진다면, 이 드라마에서처럼 남장여성으로 살지 않더라도 공주가 정치권력에 접근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남장여성으로 사는 공주가 아닌 여성 정체성을 드러낸 공주가 위와 같은 상황에서 최고권력을 추구하는 드라마가 나온다면, 조선시대의 정치 메커니즘이 훨씬 선명하게 부각될 것이다. 조선시대에도 공주의 정치적 리더십이 불가능하지 않았다는 점이 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텔레비전이나 영화 속의 사극은 좌의정이나 이조판서가 조정 관료들을 거느리고 임금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준다. 이렇게 신하가 임금 이상의 권력을 행사한 사례들은 적지 않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대개의 경우에 그런 신하의 힘은 그 자신이 아닌 조정 밖에서 생기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신하는 임금으로부터 봉급을 받는 사람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임금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처지에 놓인 신하가 임금 이상의 권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그 신하에게 힘을 실어주는 외부 요인이 조정 밖에 있기 때문이었다.

막강한 지주들의 여론

그런 외부 요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선비의 모습을 한 지주들의 여론이었다. 조선 지배층인 이들은 성리학 책을 연구하다 보니 외형상으로는 선비로 보이기가 쉬웠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가족이나 집안 노비들을 내세워 소작농들을 관리하는 지주 가문의 일원이었다. 이런 선비 스타일의 지주들이 사회 여론을 주도했다. 자신이 봉급쟁이임을 잊고 군주 앞에서 고개가 뻣뻣해지는 신하들은 그런 지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사람들인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인 경우에, 선비가 지주 가문의 일원이 되는 게 아니라 지주 가문의 일원이 선비가 되는 것이었다. 선비보다는 지주가 보다 더 본질적 측면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여성의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조선 지배층의 태도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제13대 주상인 명종을 아들로 둔 문정왕후는 아들을 무시하고 최고권력을 행사했다. 1545년에 만 11세로 즉위한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대비의 국정운영)을 시작한 그는 명종이 성인이 되고 수렴청정이 끝난 뒤에도 정권을 내놓지 않았다.
 
명종이 직접 왕권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데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음력으로 명종 20년 4월 6일자(양력 1565년 5월 5일자) <명종실록>에 따르면, 문정왕후는 "너를 왕으로 세운 공로는 나에게 있다", "내가 없었다면 네가 무슨 수로 이렇게 됐겠느냐?"라며 아들을 혼내곤 했다.
 
이때가 명종 20년이었다. 명종이 왕이 된 지 20년이 흐른 뒤였던 것이다. 이때 명종의 나이는 만 31세였다. 지금으로 치면 40세가 훨씬 넘는 나이였다. 이런 명종에게 문정왕후는 꿈도 꾸지 말라며 손으로 정권을 움켜쥐었다.
 
명종이 성인이 된 뒤에도 왕권을 행사하지 못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무서워서만은 아니었다. 명종을 뒷받침해줄 정치세력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남성인 명종의 공식 권력을 지지하는 힘보다 여성인 문정왕후의 비공식 권력을 지지해주는 힘이 훨씬 더 강했던 것이다. 이처럼 문정왕후의 권력 보유를 지지해주는 힘이 더 강했다는 것은 조선 지배층이 무조건 남성만 편들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문정왕후는 친불교 정책으로 유명했다. 불교 교단을 선종과 교종으로 재정립하고, 3백여 사찰을 공인해주고, 승려 등록제인 도첩제를 통해 4천여 승려를 새로 충원하고, 승과 시험을 실시하는 등의 일대 개혁을 단행했다. 이에 대해 선비들은 극렬하게 반발했다. 문정왕후의 불교 대리인인 보우 대사를 죽이라는 상소를 수도 없이 제기했다.
 
유교를 국시로 하는 국가에서 친불교 정책이 그처럼 노골적으로 추진됐다. 국시에 정면으로 반하는 정책들이 추진됐으므로, 요즘 같았으면 정권 퇴진 운동이 벌어졌어야 마땅했다. 문정왕후가 명종의 공식 권력을 무시하고 있었으므로 이 점을 명분으로 삼아서라도 퇴진 운동이 일어났을 수 있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1565년까지 21년간 최고권력을 유지했다. 그의 권력이 1565년에 끝난 것은 그해에 천수를 다했기 때문이었다.
 
문정왕후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또 친불교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정치적 핸디캡을 안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의 정권은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이는 문정왕후의 역량이 탁월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 조선 지배층이 그의 존재를 용인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정왕후의 친불교 정책은 비판하면서도 그의 정권 자체는 건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조선 지배층이 유교를 신봉하는 선비의 입장에서는 문정왕후를 비판하면서 경제를 지배하는 지주의 입장에서는 문정왕후를 용납했음을 의미한다. 지주계급 입장에서는 그가 여성인 점도, 그가 친불교주의자인 점도 궁극적 걸림돌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문정왕후는 비주류세력인 불교를 편들었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었지만, 개혁세력인 사림파(유림파)보다 구세력인 훈구파를 편들었다는 점에서는 보수적이었다. 그는 수도권에 거주하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런 면에서는 보수파였다고 볼 수 있다.

여성 군주의 시대
 
 KBS 2TV 드라마 <연모>의 한 장면

KBS 2TV 드라마 <연모>의 한 장면 ⓒ KBS

 
문정왕후가 국정을 운영한 21년간은 사실상 여성 군주의 시대였다. 그가 남성 왕권을 무시하고 국정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정치가 기득권층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자신들에게 돈을 벌어다주는 지도자를 선호했던 조선 지배층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조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개혁적인 명종보다는 보수적인 문정왕후를 더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명종은 중소 규모 지주들의 이익을 추구한 반면, 문정왕후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이익을 추구했다. 그래서 대토지 소유자들로서는 문정왕후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냐 남자냐는 그다음 문제였던 것이다.
 
여성인 문정왕후가 아들이지만 남성인 명종을 무시하고 최고권력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념을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개혁세력과 달리 실리를 상대적으로 더 중시하는 보수세력의 모습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문정왕후의 사례를 본다면, 하나밖에 없는 남자 형제를 잃은 공주가 남장여성 행세를 하지 않고도 정권을 행사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공주가 정치적 역량을 갖고 있고 지주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다면 실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공주가 아무리 막강하더라도, 세자가 되거나 임금이 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공주로 인해 이익을 얻는 세력이 광범위하다면, 공주가 허수아비 임금을 세워놓고 실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사회적 용인이 충분히 형성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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