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벼르다가 영화관을 향한다. 앞쪽 하늘이 온통 시커멓다. 비 예보가 생각나 발걸음을 빨리 한다. 관람 후 상영관을 나선다. 길바닥이 젖어 있다. 하늘은 해맑기까지 하다. 영화 <당신얼굴 앞에서> 속 대비되는 시간 장면이 떠오른다. 꽃들이 만개한 빛투성이 낮 공원과 세차게 내리는 빗속 밤거리 같은. 나는, 상옥(이혜영 분)이 보려 한, 빗속(궂은 날)에 감춰졌던 햇살(좋은 날)을 본 거다.
 
<당신얼굴 앞에서>는 제목부터 궁금증을 유발한다. 띄어쓰기를 안 한 "당신얼굴"이. 그런데 보고 나니 더 궁금하다. 내가 "당신얼굴"을 제대로 읽고 있는지가. 상옥을 연기하는 배우 이혜영은 느리나 명료한 어투로 형이상학적 기도문을 간절하게 읊조린다. "이제는 제 얼굴 앞을 보게 하소서." 그 심정을 헤아리며 "당신얼굴"과 "제 얼굴" 사이를 나는 몇 번 오간다.
 
"당신얼굴" 앞을 보는 것과 "제 얼굴" 앞을 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꿀팁은 영화 속에 있다. 상옥이 17살에 보았다는 누추한 남자의 얼굴 앞에 펼쳐진 빛나는 일상(세상)이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지만, 상옥은 그 빛의 천국을 제 얼굴 앞에서도 보고자 하는 거다. 그 남자의 '당신 얼굴'에 역지사지하면 "제 얼굴" 앞에도 그 빛나는 세계가 있을 것임을 역설하듯.
 
주관적 늪에 빠진 '당신 얼굴'에 객관적 내다보기 하는 "제 얼굴"을 오버랩하면, '당신 얼굴'이 곧 "제 얼굴"이 된다. 거기에 방점을 찍은 홍상수 감독의 연출이 띄어쓰기 없는 "당신얼굴"이다. 관객 또한, 고통 없는 지금 이 순간을 은총이라 말하는 시한부 인생 상옥의 심정에 공감할 때, "당신얼굴"을 "제 얼굴"로 볼 수 있다. 그렇듯 순간에 충실한 일상은 행복하다.
 
모처럼 밝은 영상을 선보인 홍상수 감독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관련 이미지.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포스터 ⓒ 영화제작전원사

 
상옥은 떡볶이 국물 자국이 떨어진 옷을 닦다가, 갈아입으려다가, 그냥 약속장소로 향한다. 조카 승원(신석호 분)이 선물한 지갑을 다시 펼친 택시 안에서도 그 얼룩을 확인하고 어릴 적 살던 이태원 옛집을 찾는다. 옛집 새 주인(김새벽 분)의 호의로 들어선 실내에서, 관객에게는 뒷모습만 보이는, 아이(김시하 분)를 만나 오래 안아준다.
 
옛집 새 주인의 말처럼 인천이 집이랬다가 옛집이 집이라는 아이는 어둔 과거 속 어린 상옥이다. 홍상수 감독의 연출 의도가 그나마 확연하게 드러나는 복선이다. 늦었지만 상옥은 17살에 자살하겠다고 맘먹게 한 어둔 과거와 화해한 거다. 관객이 품었을 울고 있는 아이도 그렇게 호명된다. 그런 관점에서 홍 감독은 모처럼 밝은 영상을 선보인 셈이다.
 
초연함과 처연함을 아우르는 시니컬한 열린 결말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관련 이미지.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 스틸 ⓒ 영화제작전원사

 
"얼굴 앞에 있는 것만 제대로 보면 된다"는 상옥의 믿음과 연계해볼 만한 장면이 있다. 상옥은 바짝 다가가 잠든 정옥을 들여다본다. 영화 초입과 말미에 삽입된 두 장면에서 나중 것은 "너 꿈꾸고 있니?"를 덧보탠다. 장자의 '나비의 꿈'이 생각난다. 흘러가는 삶의 무엇에 대해서든 집착하지 말라는 인식 세계다. 상옥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도 그런 차원일까.
 
유부남 감독 재원의 영화 촬영 여행 제안을 선선히 받아들인 상옥은 이틑날 아침 약속 불이행 음성메시지를 받는다. 내처 두 번 들으며 크게 헛웃음 치는 상옥을 보다가 나는 불현듯 홍 감독의 파안대소를 느낀다. 관객에게 돌출된 상옥의 그 처연함은 짐짓 일상 속 천국을 강조할수록 삶의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존(들)을 부각시킨다.
 
그렇게 보면, 상옥을 헛웃음 짓게 하는 건 재원이기보다 안팎이 일치하지 못하는 상옥 자신이다. 내가 화낼 때, 대개 그 화가 나를 향하듯. 초연함과 처연함을 아우르는 시니컬한 열린 결말에서 홍 감독 특유의 미장센이 빛을 발한다. 배우 이혜영이 아니었으면 이루지 못했을 경계다. 두 예술가의 만남을 축하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유경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https://brunch.co.kr/@newcritic2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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