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웅천(50‧우언우타) SSG 랜더스 1군 투수코치는 대한민국 야구사에 확실한 족적을 남긴 인물 중 한명으로 꼽힌다. 중간계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 발군의 활약을 펼치며 존재감을 알렸고 선수 생활 내내 불펜투수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이후 후배들이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조웅천이 등장하기 이전 중간계투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형편없었다. 선발 혹은 마무리 투수 경쟁에서 밀린 선수들이 어쩔 수 없이 중간에서 던진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았고, 그러다보니 실컷 고생을 하고도 연봉 협상 등에서 불이익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조웅천은 달랐다. 19시즌 동안 주로 중간계투로 뛰며 무려 1092⅔이닝을 던졌고 3.21의 짠물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탈삼진 920개를 잡아내는 동안 볼넷은 296개에 불과했다. 얼마나 제구력이 좋은 투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점대 평균자책점 4번, 1점대 평균자책점도 2번이나 찍었다.

초대 홀드왕이자 세이브왕 타이틀도 따낸 적이 있으며 현대와 SK에서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주축 투수로 활약했다. 잘 던지기도 했으며 많이 던지기까지한 무적의 고무팔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레전드 중 한명이지만 그러한 위치에 오르기까지 조웅천의 선수 생활은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기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야구부에서 쫓겨난 것을 비롯 연습생 신분으로 어렵사리 프로 무대에 들어왔다. 처음 5년 동안은 매년 언제 방출당할지 몰라 전전긍긍해야 했으며 야구를 못하게 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앞날을 고민하기도 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조웅천의 야구 인생을 파워 인터뷰가 함께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지난 2일 전화통화로 진행됐다.
 
 선수시절 조웅천은 불펜의 전설이었다.

선수시절 조웅천은 불펜의 전설이었다. ⓒ 조웅천 코치 제공

 

- 은퇴 후 별다른 공백없이 쭉 투수코치를 하고 계신 것 같아요.
"다들 좋게 봐주시고 운도 따랐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불러주고 써주시니까 코치도 할 수 있는 것이죠. 개인적으로는 선수들에게 편하게 다가가려고 합니다. 사실 지도자별로 가르치는 것 자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해요. 프로까지 온 선수들이라면 기본적인 자질과 근성은 다 가지고 있어요. 오랫동안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올라온 것이잖아요. 얼마나 이 선수들이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소통을 통해서 그런 부분을 깨워주려고 노력합니다."
 
- 1군 투수코치, 2군 투수코치, 불펜 투수코치 등을 오가셨는데요. 투수코치의 기본은 비슷하겠지만 보직마다 조금씩 차이점도 있을 듯 합니다.
"다르죠. 1군 같은 경우는 일단 이기는데 초점을 맞춰야 되는지라 한게임 한게임 절박한 심정으로 임합니다. 무엇인가를 바꿔주기보다는 편하게 좋은 컨디션으로 마운드에 설 수 있게 신경 써줘야죠. 하지만 2군은 다릅니다. 부족한 것을 채워서 1군에 올라가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기량은 물론 멘탈 등 다방면으로 배울 필요가 있죠. 특히 요즘은 인성에 대한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는 시대인지라 그런 부분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불펜 투수같은 경우 언제 어떤 상황에서 나갈지 모르니 컨디션 유지 등 다양한 준비과정을 공유하면서 훈련을 하죠."
 
- SSG 랜더스 창단 첫해 포스트시즌 진출을 노렸지만 아쉽게 무산되었어요. 여기에는 시즌 초부터 계속된 투수들의 부상이 컸던 것 같아요.
"많이 어려웠습니다. 당초 예상했던 1, 2선발을 비롯 3·4·5선발까지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면서 정상적인 로테이션 구축 자체가 쉽지 않았죠. 어느 팀이든지 마찬가지겠지만 선발 투수진에서 부상이 잦아지기 시작하면 운영 자체가 힘들잖아요. 일단 선발투수가 적어도 5이닝 안팎을 소화해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보니 불펜투수들의 등판도 잦아지고 과부하가 걸렸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도 경험이 많으신 감독님께서 선수들을 폭넓게 쓰셔서 어려운 과정에서도 마지막까지 포스트시즌 진출의 희망을 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더불어 중간계투, 마무리 쪽 투수의 활약상이 두드러졌고 새로운 선수들이 다양한 경험을 쌓는 한해가 아니었나 싶어요. 이 자리를 빌려 고생 많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 현재 주목할만한 SSG 랜더스 투수 유망주가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오원석, 최민준, 장지훈, 김건우 등 올 시즌을 통해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보여준 선수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더불어 마무리 투수로서 좋은 투구를 보여주며 앞으로의 기대치를 끌어올린 김택형 선수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한 단계 스탭업 된 것 같아서 내년에도 믿고 쓸 수 있는 클로저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팬분들께서 가장 바라는 것 중에 하나가 '유망주의 성장'이죠. 올 시즌 포스트시즌 진출 무산은 너무 아쉽지만 젊고 가능성 높은 선수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큰 소득이고 앞으로도 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오랫동안 투수코치를 하고 계신 입장에서 나름대로의 지도 철학 등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지도 철학이라고까지 말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요. 제가 운동하면서 중요하게 느꼈던 것, 선수들이 프로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갖춰야 될 것 등 경험 속에서 느꼈던 부분들을 알려주려고 해요. 기량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하고요. 더불어 앞서 말했듯이 인성이라는 부분을 갖추지 못하면 롱런하기 힘든 것 같아요. 인성에는 여러 가지 부분이 있겠죠. 기본적인 예의부터 타인에 대한 배려 그리고 자기관리까지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대착오적인 발상으로 옛날 방식을 강요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유롭고 편하게 하되 기본적인 부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죠. 뭔가를 바꾸려 할 때는 특별한 것이 필요없더라고요. 답은 기본 속에 있습니다. 더불어 제가 투수 파트를 맡고 있다보니 결정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는 편입니다. 투수는 자신만의 확실한 주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투구수도 많아지고 타자를 상대할 때 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천 앞바다 필승 잠수함
 
 SSG 랜더스 1군 투수코치 조웅천

SSG 랜더스 1군 투수코치 조웅천 ⓒ 조웅천 코치 제공

 

- 언제부터 언더핸드로 던지시게 된 것인가요?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내야수를 봤어요. 3학년 올라가기 직전 2학년 겨울방학 때 당시 야구부에 투수가 적었는데 저보고 하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내야수로서 어깨가 강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처음에는 오버핸드로 투수를 시작했어요. 한 두달 정도 했을까요. 투수로서 타자들에게 위협감을 주는 부분도 적고 이래저래 위력이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요. 결과도 별로고요. 그때 감독님, 코치님들께서 팔 각도를 내려서 사이드로 던져보라고 권유하셨어요. 그렇게 던져봤는데 한결 나은거에요. 특히 볼끝의 움직임이 지저분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제가 뭐 일부러 그렇게 던진 것은 아니고 그냥 던진건데 공이 지저분하게 들어간 것 같아요. 투수로서는 고마운 일이죠.(웃음)

- 구속보다는 제구력이 돋보이는 투수 같았어요.
"그렇죠. 제가 체격이 좋거나 힘이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던지라 제구력으로 승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고 있지만 투수의 생명은 제구력입니다. 아무리 좋은 공을 가지고 있어도 원하는 곳에 넣을 수 없다면 몇 번은 몰라도 길게는 절대 통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공의 움직임 무브먼트가 좋아야죠. 저도 투수 생활 초반에는 힘으로만 밀어붙이려고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경험이 쌓이면서 힘을 좀 빼고 제구 위주로 갔고 결정구로 쓸 확실한 변화구도 장착하게 됐습니다.
 
- 가지고 계셨던 무기 중 가장 위력적이었던 구종은 무엇이었을까요?
"서클 체인지업이었습니다. 현대 시절 김시진 투수 코치님의 말씀이 큰 영향을 끼쳤어요. 당시 언론에서는 싱커라고 많이 그랬어요. 하지만 구태여 나서서 '아닙니다. 이것 체인지업입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더라고요. 다들 싱커로 알고 있으니 제가 서클 체인지업을 던지기 더 수월할 것 아닙니까.(웃음) 사이드암 투수가 서클 체인지업을 던지는 경우는 당시에 제가 최초였을 거예요. '설마 서클 체인지업을 던지겠어'라는 생각으로 예상 자체를 못했던 것 같아요.
 
- 잘 던지기도 하셨지만 많이 던지기도 하셨어요.
"첫번째는 건강한 몸으로 태어나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려야죠. 두 번째로는 트레이너분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투수에게 필요한 잔 근육 운동 등 기타 여러 가지 관리에서 신경을 써주셔서 저는 시키는 데로 따라 했고 결과도 좋았습니다. 자잘한 부상은 있었지만 치명적인 큰 부상은 없었기에 20년 가까이 던질 수 있었겠죠.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제가 구속으로 승부하는 유형이 아닌 제구력 위주의 운영형 투수라 체력을 최소화하면서 공을 던질 수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당시에는 술 담배도 안하는 등 신경도 많이 썼습니다. 내 몸은 내가 관리해야죠."

- 일반적으로 투수들이 가장 원하는 보직은 선발이잖아요. 선발투수 욕심은 없으셨을까요?
"실은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선발로 좀 뛰기도 했어요. 기회를 받았었는데 제대로 역할을 못했죠. 체력이 안 되다 보니까 한바퀴, 두바퀴 돌다보면 맞아나가기 시작했어요. 4회 정도까지는 잘 던지다가 5회 벽을 넘지 못하고 승을 놓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중간투수로 보직을 바꾼게 신의 한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구속으로 밀어붙이는 게 아닌지라 타순이 돌기 시작하면 타자들이 적응을 해버렸어요. 짧게 던지고 빠지는 쪽이 어쩌면 저한테는 맞춤형 보직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뒤로는 중간이 천직이라고 생각했어요.
 
- 고향은 광주지만 선수 생활의 전부를 인천에서 하셨어요. 제2의 고향같이 느껴지실 것 같아요.
"제2의 고향을 넘어서 그냥 고향이죠. 선수와 지도자로 인생의 반 이상인 30여년을 지냈으니까 친숙함을 넘어서 한몸처럼 느껴집니다. 저를 여기에 있게끔 해준 게 인천이라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연습생 신화
 

- 야구를 시작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아버님께서 축구를 하셨어요. 운동선수의 길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니까 처음에 반대를 하셨습니다. 본인께서 축구선수로 성공하신게 아닌지라 운수업을 하셨거든요. 불안정한 운동선수의 삶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그 당시에는 동네에서 아이들끼리 야구를 하면서 노는 경우가 많았어요. 친구들과 어울리고 놀려면 야구를 해야만 했어요. 비닐 푸대를 잘라서 손에 낄 수 있게 글러브를 만들어서 서로 던지고 놀았죠.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러다가 다니던 초등학교 야구부에서 부원을 모집한다고 하기에 테스트를 받아서 들어가게 됐습니다. 제가 계속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나중에 '중간에 포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 허락을 받게 되었죠."
 
- 우여곡절이 많으셨어요.
"광주 상고에서 정리대상이 되어서 바로 짤려버렸던 기억부터 납니다. 입학식도 하기 전에 동계 훈련 때 정리되어 버렸어요. 할 수 없이 운동을 못하고 2학년 1학기 때까지 수업만 들었죠. 한창 운동해야 될 시기에 1년 반 정도를 그냥 쉬게 된거죠. 결국 반 포기 상태에 있었는데 아버님께서 절박하게 말씀을 하셔서 순천상고라는 곳으로 전학을 가서 다시 야구를 하게 되었어요. 운이 좋게 야수가 아닌 투수로서의 기회도 부여받았고요. 열심히 노력해서 연습경기 등에서 좋은 모습도 보였어요. 그 결과 관계자들로부터 '해태에 올 생각이 있느냐?'는 소리도 들었죠. 그러다가 악재가 닥쳤어요. 1루베이스 런닝을 하다가 돌부리에 팔꿈치를 다쳐서 그 뒤 1년 동안 투수로서 시합을 나가지 못했거든요. 야수로만 간간이 출전했고요. 가치가 확 떨어져 버릴 수밖에 없었죠.
 
막막한 상황에서 고등학교 은사님의 권유로 김성근 감독님이 계시던 태평양 돌핀스에 투수로 테스트를 받으러 갔어요. 그런데 아무런 연락이 없는 거예요. 답답하죠. 직접 구단으로 찾아갔어요. '결과를 기다릴 수 없어서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합격 불합격 얘기도 없이 일단 합류해서 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유니폼도 없이 아마 때 입었던 옷 걸치고 같이 훈련했어요. 당시 89년도가 프로야구 활성화를 위해 2군 리그를 시작하던 시기거든요. 그래서 선수가 적어가지고 연습 경기때 투수로 나가게 됐죠. 지금으로 보면 일종의 테스트 기간이었던 것 같아요. 당시 잘했어요. 그러던 중 농협팀에서 '프로랑 계약을 안하고 있으니까 우리팀으로 오라'고 말하더군요. 그 얘기가 나오기 무섭게 다다음날 갑자기 태평양에서 '우리와 계약하자'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프로야구와 인연을 맺게 된거죠. 제가 생각해도 정말 소설 같아요."
 
- 정말 어렵게 프로에 입성하셨네요. 그 다음부터는 어느 정도 안정감을 얻으셨을 것 같아요.
"아니요.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웃음). 프로 지망생들도 명심해야 될 것이 입단만하면 당장이라도 성공할 것이다는 생각을 버려야 돼요. 진짜 경쟁은 그때부터니까요 저는 입단 후 5년간 부진했어요. 매년 정리대상 명단에 올랐죠. 문제(?)는 정리할만하면 잘 던졌다는 거예요. 제가 체력이 약해서 여름에 많이 고전했어요. 그러다가 날씨가 선선해질 가을 무렵에는 또 잘 던졌어요. 오죽하면 관계자께서 '너는 왜 내보내려고만 하면 가능성을 보여서 헛갈리게 하냐?'고 말하셨을 정도예요.

자존심이 상하더라구요. 그래서 평소 성격과 달리 '내년에도 그러면 그때는 구단에서 잡아도 나가겠다고 말해버렸어요. 이후 정말 야구를 그만두면 아버지와 함께 트럭으로 배추장사라도 하려고 운전면허 보통 1종도 따고 다른 인생을 준비했어요. '모 아니면 도다'는 마음이였죠. 이전에는 타자한테 안 맞으려고 소심하게 투구를 했어요. 하지만 그만두면 말지라는 생각을 한다음부터는 공격적으로 덤볐어요. 이판사판이다는 심정이었는데 결과적으로 확 바뀌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습니다."
 
-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으셨나요?
"단 한번도 없었어요. 힘든 시절은 너무너무 많았죠. 하지만 어떻게 시작한 야구인데 포기할 수 있겠어요. 아버님과 그렇게까지 굳게 약속했는데 지켜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부친은 축구, 조웅천 본인은 야구 그리고 아들 조승원은 농구를 하고 있다.

부친은 축구, 조웅천 본인은 야구 그리고 아들 조승원은 농구를 하고 있다. ⓒ 조웅천 코치 제공

 
- 아들도 운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야구는 아니에요. 경희대학교에서 농구를 하고 있어요. 이름은 조승원이고 포지션은 가드, 신장은 182cm정도 됩니다. 내년에 4학년 올라갑니다. 아빠 마음에서는 이왕 운동하려면 야구를 하길 바랐지만 농구에 더 관심이 많더라고요. 처음에 먼저 시작한 것은 야구였어요. 하지만 유소년 야구팀에서 재미있게 운동하다가 엘리트 야구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이런저런 과정이 힘들었나봐요. 

일찌감치 포기하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중학교 올라가서 즐길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을까 해서 유소년 농구 교실을 보내봤죠. 재미를 느끼고 즐거워 하더라고요. 지도하시던 조성훈 감독님께서도 '재능이 있다. 선수 한번 시켜볼 생각 없냐'고 말씀하시구요. 언젠가 저희 아버님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을 앉혀놓고 얘기했죠. 포기만 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밀어주겠다고. 어쩌다보니 할아버지는 축구, 아들은 야구, 손자는 농구를 하게 됐네요.(웃음)"
 
- 마지막으로 선수 조웅천을 지금도 기억해주시는 팬분들께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야구로서 팬분들에게 인사드릴 수 있다는 점에서 너무 감사하고요. 선수로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는데 코치로서 좋은 선수를 발굴해서 보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야구로 받은 사랑, 야구로 돌려드리고자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인천야구 파이팅! 대한민국 야구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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