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홍천기> 한 장면.

SBS <홍천기> 한 장면. ⓒ SBS

 
군주를 소재로 하는 글이나 드라마에서 자주 강조되는 것은 어질고 현명한 후계자를 선택해 자리를 물려주는 일의 중요성이다. 이른바 택현(擇賢)의 가치가 높은 평가를 받는다. 단순히 첫째 왕자라는 이유로 또는 강성한 왕자라는 이유로 왕위를 넘겨줘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자주 강조되고 있다.
 
지난 12일 방영된 SBS 사극 <홍천기> 제12회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세자의 건강이 악화돼 후계자를 새로 선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성조(조성하 분)가 제2왕자인 주향대군 이후(곽시양 분)가 아닌 제3왕자 양명대군 이율(공명 분)과 단둘이 만나 밀담을 나누는 자리에서도 택현의 가치가 언급됐다.
 
성조가 양명대군에게 "너를 세자로 책봉할 것"이라는 뜻을 표시하자 양명대군은 "아바마마, 그 말씀을 거두어 주시옵소서"라며 "강건한 둘째 형님이 버젓이 있는데 어찌 이러시옵니까?"라며 겸양을 표했다.
 
성조는 "후는 총명하고 강건하나 어질지 못하다"라는 말로써 자신의 의지를 재차 강조했다. 주향대군 이후는 어질지 못해 군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대화를 엿듣고 분노한 주향대군은 때마침 아버지가 병들어 눕게 되자 동생을 제치고 실권을 행사했다. 성조와 양명대군의 밀담이 공식 문서에 담기지 못했기 때문에, 양명대군이 아버지의 뜻을 내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주향대군은 동생을 유배 보내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조치는 성공하지 못한다. 양명대군을 따르는 신하들이 그를 빼돌려 한양으로 은밀히 귀환시켰기 때문이다.
 
위로 형이 있는 왕자에게 '어질다'는 이유로 왕위를 물려주는 일은 위 드라마 장면만큼이나 힘든 일이었다. 어진 아들이냐 아니냐를 떠나, 가장 나이 많은 왕자를 제치고 여타 왕자에게 왕위를 넘겨주면 유혈 정쟁이 일어나거나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잡음이라도 발생했다.
 
선조가 두 번이나 보여준 저울질의 위험성 

조선이 세워진 1392년에 태조 이성계는 공로가 많은 이방원을 제치고 어린 이복동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어린 이방석을 선택한 것은 그가 어질기 때문이기보다는 신덕왕후 강씨(이방석 어머니)와 정도전이 그렇게 하도록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이 조치는 이방원이 6년 뒤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방석과 정도전을 살육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로부터 200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는 서얼 중의 장자인 임해군을 제치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런 뒤 광해군에게 세자의 역할뿐 아니라 미니 조정인 분조(分朝)의 소(小)군주 역할까지 맡겼다.
 
선조의 선택은 광해군이 어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전쟁 시국에 조정을 이끄는 데는 광해군이 임해군보다 낫다고 봤기 때문이다. 또 선조 자신보다도 낫다고 판단했기에 소군주 역할까지 맡겼다고 볼 수 있다. 이 조치 역시 훗날 분란을 낳았다. 이는 선조가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왕이 된 이듬해인 1609년에 임해군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됐다.
 
이런 상황을 선조는 일생 동안 두 번이나 만들어냈다. 눈을 감기 2년 전인 1606년, 그는 후궁이 아닌 인목왕후에게서 적자인 영창대군을 얻었다. 이때부터 선조는 31년 차이 나는 광해군과 영창대군을 저울질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광해군을 불안케 만들었다. 광해군의 세자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듯한 의중을 내비친 것이다. 선조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고 영창대군이 너무 어려 세자를 바꾸지는 못했지만, 선조는 끊임없이 상황을 불안케 만들었다.
 
이 역시 불행을 초래했다. 선조의 행동은 광해군이 왕이 된 지 6년 뒤인 1614년에 영창대군이 만 8세 나이로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부모가 자녀들의 서열을 바꾸거나 자녀들을 저울질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선조가 두 번씩이나 보여준 것이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음력으로 태종 18년 6월 3일(양력 1418년 7월 6일), 이방원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는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난(亂)의 근본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처럼 왕자들 중의 연장자를 제치고 어린 왕자를 후계자로 세우면 거의 대개의 경우에 분란이 일어났다. 형이 아우를 공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우가 형을 공격하는 일이 거의 언제나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거의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다. 드물지만, 예외적인 사례도 있었다.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난의 근본'이라고 말한 원경왕후의 아들들이 그런 이례적인 사례를 만들어냈다.
 
'택현'의 명분

태종 이방원은 각종 스캔들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문제적 인물인 세자 이제(李禔)를 폐위한 뒤, 이제의 작은 동생인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때까지 '세자'로 불렸던 이제는 폐세자 이틀 뒤부터 양녕대군으로 불리게 됐다.
 
이때 이방원이 세자 교체를 단행한 명분은 '충녕대군은 어질다'는 논리였다. 드라마 <홍천기> 속의 임금처럼 이방원 역시 '택현'을 명분으로 내세운 것이다. 또 드라마 속의 임금처럼 태종 역시 첫째아들의 대타로 둘째 효령대군이 아닌 셋째 충녕대군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어진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 자체는 칭송받을 만했지만, 살아 있는 첫째와 둘째를 제치고 셋째를 후계자로 책봉하는 것은 원경왕후의 말처럼 분란을 자초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원경왕후만 반대한 게 아니라 처음엔 이방원 자신도 주저주저했다. 이방원 역시 동생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것에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킨 전력이 있으므로, 그런 염려를 품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인지 양녕대군을 폐한 직후에 이방원이 택한 후계자는 충녕대군이 아니라 양녕대군의 아들이었다. 위 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이 처음 내린 왕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제(禔)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 나이 많은 쪽(원문은 長年)은 다섯 살, 그 다음 나이는 세 살이다. 나는 제의 아들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처럼 이방원은 양녕의 두 아들 중 하나를 세손(후계자인 손자)으로 임명하겠다는 의사를 공식적으로 표시했다. 일부 신하들은 이에 찬성했지만, 이들의 주장은 충녕대군을 지지하는 신하들에게 묻혔다. 충녕을 미는 신하들이 내세운 논리는 '택현'이었다. 이런 논리가 결국 이방원이 왕명을 바꿔 충녕대군을 책봉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사실, 양녕의 아들을 책봉한다는 왕명을 내릴 때도 이방원의 진짜 의중은 충녕대군에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태종실록> 속의 이방원이 세자 교체를 단행하기 전에 주목한 대상은 세자의 아들들이 아니라 충녕대군이었다.
 
그는 세자와 대비되는 충녕의 자질에 주목하고 그의 성품과 능력에 만족감을 품던 상황에서 교체를 단행했다. 대안도 없이 교체할 수는 없으므로 이방원이 다섯 살밖에 안 된 양녕대군의 아들을 염두에 두고 결단을 내렸으리라고 보기는 힘들다.
 
위의 왕명에서도 그런 정서를 느낄 수 있다. 양녕의 어느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겠다고 명확히 밝히지 않고 두 아들을 다 열거한 뒤 "제의 아들로 대체하고자 한다"며 모호하게 언급한 것도 이방원의 의중이 이쪽에 있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신하들이 이 왕명을 반대할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방원은 신하들의 뜻을 거듭거듭 확인한 뒤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그는 이 조치가 자신의 뜻이 아닌 신하들의 주청에 의한 것임을 강조했다. 형을 제치고 동생한테 자리를 넘겨주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 연합뉴스

 
이렇게 이방원의 염려 속에 단행된 세자 교체는 뜻밖에도 상당히 '해피엔딩'의 결과를 낳았다. 단순히 두 왕자 중에서 동생을 세자로 고른 것도 아니고, 세자였던 형을 폐하고 동생을 세자로 교체했는데도 별다른 파국이 일어나지 않았다.
 
일반적인 경우였다면, 양녕은 아버지 이방원이 세상을 떠난 1422년 이후에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양녕대군은 그런 일을 겪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임금이 된 동생보다도 12년을 더 산 뒤 1462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는 칼자루를 쥔 세종이 큰형을 보호했기 때문인 동시에 양녕대군 역시 현실을 인정하고 행동을 조심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세종은 한글 창제나 과학개발뿐 아니라 이런 면에서도 괄목할 족적을 남겼다. 택현을 근거로 장남 아닌 왕자를 선택한다고 해서 반드시 형제 살육이 일어나는 것은 아님을 그는 몸으로 증명했다. '대왕' 이상의 호칭으로 불러야 마땅할 임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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