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공연 장면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공연 장면 ⓒ 골든에이지컴퍼니

 
[기사 수정 : 28일 오후 1시 46분]

"여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

첫머리에 등장하는 외침은 100분을 이어갈 연극에서 아주 중요한 복선으로 다가온다. 본격적인 사건이 터지기 전부터 '반역할 수 없는' 명제를 미리 서두에 깔면서 시작한 셈이다. 하지만 연극은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이 명제와 처절한 신경전을 벌이는 '성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그것도 여성이 사랑하는 여성의 이야기.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물과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진다. 
 
2018년 산울림소극장에서 첫 선을 보였고 올해는 지난 21일부터 11월 21일까지 서울 대학로 브릭스씨어터에서 공연한다. 이 공연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을 새롭게 각색한 <줄리엣과 줄리엣>(창작집단 LAS·골든에이지컴퍼니 제작)이다. 지금까지 고전에서 파생된 수많은 작품들을 보아왔지만, 이번 공연이 색다르게 다가온 이유는 "작가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펼쳐질까?"라는 호기심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각색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대학생 풋내기 시절부터 모든 것을 공유할 정도로 가까운 13년 지기인 작가(한송희)와 연출(이기쁨)이 들려주는 제작 동기는 의외로 소박하다. "우리는 그저 저작권료를 감당할 돈이 없었고, 아무도 모르는 우리에게 선뜻 자신의 작품을 내어줄 작가도 없었어요."
 
2009년(창단해)부터 줄곧 자신의 저작권을 고집하는 이유가 분명(?)했던 '창작집단 LAS'는 이름에서 그러하듯 라이선스가 아니라 창작을 위한 열정으로 똘똘 뭉쳤다. 하지만 <줄리엣과 줄리엣>은 나의 가족, 연인, 친구들이 평상시에 사용하는 말을 대사를 구성한 현대극이다. 고전을 모티프로 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유격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을 만큼 완벽하게 동시대성을 반영했다. "우리가 있는 세계, 우리가 겪은 이야기, 우리가 하는 말들, 그리고 그것을 공감하는 관객들은 '창작집단 LAS'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것도 누구나 한 번은 들어봤을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비틀면서.

작품을 보는 내내 이것이 고전에 근간을 두었다는 사실을 감쪽같이 잊을 수 있었던 비결도 연출노트에서 힌트를 얻었다. "세계 최고의 시인에게 짓눌리고 있다는 망상에 괴로워하던 나날 중 대본을 던져놓고 내 연인과 카카오톡을 뒤적거리고 있었어요." 그가 연인에게 던진 속삭임은 셰익스피어의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며. 아니, 오히려 말로 내뱉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녔단다. 16세기 베로나에서 셰익스피어의 고백은 21세기 한국에서 뜨거운 사랑앓이에 빠진 연인에게 전염됐다. 하지만 우리는 콩깍지가 씌운 작가와 같은 하늘 아래 숨 쉬고 있기 때문에 고전 이야기는 나의 숨겨진 일기장 속 고백처럼 점차 신기루에 빠져들었다.

줄리엣만 두 명. 원작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니 작가는 발상의 전환을 제목에서 공개했다. "당신에게 단 한 번의 비틈을 허락하니 여기에 모든 것을 담아보시오." 이런 미션이 작가에게 주어졌는지 모른다. 모든 것을 쏟아붓기 위해 영혼에 빨대까지 꽂을 정도로 모든 상상력을 동원했다. 원작과는 비슷한 점도, 다른 점도 분명하다. 하지만 이야기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한 가정법에서 출발한다.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공연 장면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공연 장면 ⓒ 골든에이지컴퍼니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공연장면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 공연장면 ⓒ 골든에이지컴퍼니

 
몬테큐와 캐플렛, 두 원수 가문의 젊은 남녀가 사랑을 하고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원작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선 로미오의 누나로 등장하는 또 다른 줄리엣이 주인공이다. 몬테규 가의 줄리엣과 캐플렛 가의 줄리엣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연극에서 많은 부분이 할애된 것은 커밍아웃하는 과정에서 주위 사람들과 충돌하는 고통의 순간들이다. 아주 세밀하게, 바로 나의 눈앞에서 펼쳐지듯 작은 심리도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는다. 직접 겪어보기 힘든 역사적 사실을 완벽하게 고증하기 위해서 수많은 자료를 쌓듯 이들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상상했을까.

한 번도 보지도 못했는데, 내 눈앞에 펼쳐진 느낌이 신기할 뿐이다. 그것은 한 여자가 사랑하는 연인이 남자가 아니라 여자임을 밝히는 고통은 후반부로 갈수록 강도가 세진다. 동성애 누나를 이해하는 동생, 가장 옆에서 끔찍하게 아꼈던 가족도 결국엔 사회가 정해놓은 울타리를 벗어나지 말라며 주인공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고집부리지 마. 상처만 남을 거야." "누나를 이해하지만 결국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어... (중략) 누나를 바라보는 가족도 생각해주면 안 돼?"

여기엔 작품을 주도하고 있는 '퀴어' 외에도 다양한 소수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우선 기독교가 주름잡던 16세기 유럽에 중생을 구원하는 스님이 중재자로 나선다.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맞지는 않지만 주류에 맞서는 종교적 소수자의 등장은 이야기를 한층 풍성하게 만든다. "해하거나 거짓말하거나, 탐욕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그것이 성별을 구분 짓지는 않는다"는 불교의 논리로. 덧붙여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해 본 적도 없는 무성애자인 하녀(네릿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중성적 매력을 자아내는 승려는 반드시 남녀의 이분법적 논리에서 벗어난 소수자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볼 부분은 앞선 '거역할 수 없는 명제'에 대한 선입견을 경계하는 오브제다. 무대에서 연기하는 두 주인공뿐 아니라 모든 등장인물은 마지막 순간을 제외하곤 하얀 옷을 입는다. 물론 마지막엔 두 주인공만 다른 색을 허락했지만. 왜 그랬을까. 공연을 보는 내내 혼란스러웠다. 짐작컨대 색깔이 던져주는 선입견을 원천부터 차단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리고 "왜 파란과 빨강이 아니지?"라고 기대했던 관객들의 뒤통수를 보기 좋게 차 버리듯 의외의 색이 등장한다. 당신이 예상하는 진부함은 허락하지 않아. 그러니 하얀색에 당신이 생각하는 색을 채워 넣는 게 마음 편할 거야. 공연장을 나오면서 "연출자에게 물어볼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역시 안 묻길 잘했어. 고정관념에서 파생된 단연한 것은 가장 경계해야 할 존재니. 그것은 가면도 비슷한 의미일 테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온라인극장 공식 블로그에 동시 게재됩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줄리엣과 줄리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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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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