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여수 오동도의 2월 바닷바람은 차다. 봄바람 같지만, 칼날이 스며있는 바람이다. 그즈음 오동도를 가득 채우는 동백꽃! 해풍에 반짝거리는 청록색 이파리가 새빨간 동백꽃과 대조를 이루어 장관을 연출한다. 그런데 동백꽃은 피어 있을 때보다 질 때가 훨씬 처연하고 아름답다. 무궁화꽃처럼 동백꽃도 꽃 모가지가 통째로 툭툭, 떨어진다.
 
여수와 순천의 역사적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동백>이 상영 중이다. 어떤 이들은 '여순반란사건'이라 하고, 어떤 사람들은 '여순항쟁'이라 부르며, 혹자는 '여순사건'이라 말한다. 기존의 국가 공권력 기준에 따르면 반란이고, 민중 기준이면 항쟁이며, 중간 입장을 가지면 사건이 된다. 제주 4.3이 반란과 항쟁, 사건 사이를 맴도는 것과 같다.
 
동백식당 식구들
 
 영화 <동백>의 한 장면.

영화 <동백>의 한 장면. ⓒ 시네마뉴원

 
3대 72년 전통을 자랑하는 여수의 국밥집 '동백식당'이 영화의 공간이다. 사건이 2020년에 진행되기에 동백식당은 1948년 개업한 셈이다. 붓글씨 잘 쓰고 명민했던 아버지와 순하디순한 어머니 사이에서 철없이 자라던 순철. 세월이 흘러 그가 팔순을 목전에 둔 노인이 되고 말았다. 머리에 상고대가 피었지만, 순철은 뻣뻣하기 그지없다.
 
순철은 환갑 다 된 아들이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 베푼 것도 트집을 잡는다. 그런 트집은 공무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돈을 받아낼 때면 그가 꼭 하는 말이 있다.
 
"느그덜이 빨갱이냐?! 공짜 밥을 먹으려고 하니 말이여!"
 
맛은 좋으나 순철의 인심이 박해 동백식당은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 외아들 남식은 아버지의 드센 성정을 이기지 못하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그의 아내 순자도 시부에게 변변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들의 외아들 귀태는 나이 서른이 되도록 앞가림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딴따라다. 이런 네 식구 이야기가 <동백>에 빼곡하게 담긴다.
 
문제적 인물 장연실
 
투자전문회사 대명그룹의 회장 장연실. 연실은 아버지 장태식이 설립한 회사를 이끌고 있다. 태식의 연고가 여수이기에 그녀는 여수에 남다른 감회를 가지고 있다. 그런 연실이 어느 날 동백식당을 찾는다. 손녀 혜지와 함께 국밥을 맛있게 먹는 연실. 혜지는 어린 나이지만 국밥을 뚝딱 해치우고 순철과 숨바꼭질 놀이를 하려 든다.
 
동백식당을 대명과 연결하려는 연실. <동백>은 여기서부터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맞물린다. 있을 법하지 않은 인연과 관계의 실타래가 느닷없이 풀리며 영화는 흑백과 천연색을 교차하며 과거와 현재가 이어진다. 아주 오래 묵은, 그래서 누구나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사건의 한가운데로 영화는 관객을 데리고 간다.
 
그런 까닭에 장연실은 지극히 문제적인 인물이 된다. 아버지 태식과 국밥집 순철의 부친이 얽힌 인연을 밝힘으로써 아버지의 고통을 덜고자 하는 연실. 지옥 같은 시공간을 함께 살아야 했던 두 사람의 악연이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연실. 태식의 죄의식과 무죄를 강력히 항변하는 연실. 하지만 순철은 연실과 생각이 전혀 다르다.
 
그날의 피와 오늘의 진실
 
 영화 <동백>의 한 장면.

영화 <동백>의 한 장면. ⓒ 시네마뉴원

 
깜장 고무신을 신은 아이의 발밑으로 검붉은 피가 천천히 흘러든다. 어쩔 줄 모르고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아이. 잔악한 '백두산 호랑이'는 어째서 아이의 아버지를 죽인 것일까?! 손가락질 한 번으로 삶과 죽음이 교차했던 시대. 아들이 항명했다면, 아버지도 빨갱이가 되어야 했던 연좌제의 시대. 굶주린 인간에게 적선한 사람을 학살한 시대.
 
하지만 아이는 아버지의 상실과 절망과 좌절을 뼛속 깊이 새겼지만, 아버지의 피에 담긴 의미는 모른 채 살아왔다. 그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철심처럼 박힌 것은 빨갱이에 대한 사무치는 분노와 원한이었다. 더욱이 시간과 더불어 아버지의 피가 자신을 옥죄고, 다시 자기 아들까지 옴짝달싹하지 못하도록 하는 현실의 모든 원죄는 '빨갱이'였다.
 
칠흑처럼 어두웠던 당대의 시대상과 과잉의 이데올로기, 그것에 편승한 이승만의 악행을 연실이 외치지만 순철은 막무가내다. 72년 전의 비극적인 사건과 흑역사는 이제 잊어버리라는 사람들의 말에 치를 떠는 순철. 그는 사무치는 표정으로 고함친다.
 
"왜 다들 잊으라고 하는 거야. 잊으라고 하기 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너희는 죄가 없어'라고 말해야 하는 것 아니야. 아무 죄도 없다고 말이야."
 

아버지의 죽음을 잊어버리라고 하기 전에 그것을 잊도록 하는 최소한의 장치가 아버지의 무죄를 인정하는 일이라고 순철은 절규한다. 문제는 연실이 그런 순철의 요구를 들어줄 처지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동백>은 <지슬>처럼 군과 민의 문제가 아니라, 민과 민의 문제를 주목한다. 공권력의 이름으로 죽임을 당한 여수와 순천의 사람들!

1948년 10월 19일
 
 영화 <동백>의 한 장면.

영화 <동백>의 한 장면. ⓒ 시네마뉴원

 
한국군을 동원하여 제주 4.3사건에 진압군을 파견하려는 이승만과 그것을 추인하는 미군 수뇌부. 여수에 주둔하던 제14연대는 이런 결정에 불복한다. 그들은 무고한 제주 민간인을 학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항명한다. 이에 이승만은 미군의 허락을 받고 여수와 순천을 잔인하게 진압한다. 그리하여 씻을 수 없는 국가범죄인 여순사건이 일어난다.
 
<동백>은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을 최초로 다룬 영화다. 영화 <꽃비>(2010)와 <지슬>(2013)은 제주 4.3을 다룬 영화다. 현기영의 <순이 삼촌>이 제주 4.3을 처음으로 다루었다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여순사건을 정면으로 포착한다. 재일교포 작가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는 양자를 엮어 드넓은 역사적인 시야를 펼쳐 보인다.
 
그 사이 국회는 2021년 7월 20일 '여순사건 특별법'을 공포했다. 이로써 2022년 1월 21일 이후 '여수·순천 10.19사건'의 진상 규명과 희생자 명예 회복의 길이 열리게 됐다. 제주 4.3 사건과 비교해 상당히 늦었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여순사건의 본질과 진상 규명을 통해 역사적 진실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1만 1131송이 동백꽃 지다
 

살기 위해 국밥을 내준 사람과 살기 위해 총을 든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동백>. 한편에는 살기 위해 내준 국밥 한 그릇 때문에 죽어간 사람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한평생 업처럼 짊어진 사람이 있다. 국밥 한 그릇의 악연으로 이어진 14연대 군인과 국밥집 주인의 한 맺힌 삶과 인연과 대물림의 비극을 다룬 영화 <동백>.
 
영화 끄트머리에 동백꽃 한 송이가 화면을 채운다. 피어 있을 때처럼 붉디붉은 선혈의 동백꽃. 이어지는 흑백 사진 속의 잔인한 장면들이 객석을 죽음처럼 무거운 침묵으로 인도한다. 저런 잔인무도하고 잔악한 살상이 이 나라 여수와 순천에 있었구나. 무려 1만 1131명의 생명을 앗아간 여순사건이 실체적 진실 규명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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