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축구 K리그 포항 스틸러스가 또 한번의 기적을 만들어냈다. 김기동 감독이 이끄는 포항은 20일 전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1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ACL) 4강 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5-4로 승리했다.

포항은 울산 윤일록에게 후반 7분 선제골을 내줬으나 후반 44분 그랜트가 천금같은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리며 승부를 원점으로 돌렸다.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리지 못한 양팀은 결국 승부차기에 돌입했고, 선축한 울산의 첫 번째 키커 불투이스의 슛이 크로스바를 넘어갔다. 반면 포항은 마지막 키커 강상우까지 다섯 명의 선수가 모두 슛을 성공시키며 극적인 승리를 따냈다. 이로써 포항은 세르히오 파리아스 감독이 이끌었던 2009년 ACL 우승 이후 무려 12년만에 다시 결승 무대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사실 포항 팬들마저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결승행이었다. 포항은 K리그 5회 우승에 빛나는 전통의 명문이지만 모기업의 지속적인 투자 축소 속에 K리그 우승은 2013년이 마지막이었고 전력을 꾸준히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나마 구단의 탄탄한 육성 시스템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좋은 선수들은 지속적으로 발굴되었지만 이들을 오래 지켜내지는 못했다.

올시즌을 앞두고 포항은 리그 3위와 최다득점을 이끌었던 일류첸코(전북), 팔로세비치(FC서울)등이 모두 경쟁팀으로 이적했다. 여름에는 송민규까지 전북으로 떠나는 과정에서 팬들의 거센 반발을 자아냈고 구단이 결국 공식 사과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구단은 재정 건전성을 이유로 현장과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민규의 이적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팬들 사이에서는 포항이 우승을 다투던 명문에서 '셀링클럽'으로 전락했다는 자조의 목소리가 나왔다. 심각한 전력누수 속에 포항은 올시즌 K리그에서 7위까지 떨어지며 고전하고 있다.

ACL을 앞두고도 기대는 높지 않았다. 최대한 가용 가능한 선수들을 끌어모아 나선 김기동 감독의 현실적인 목표는 16강이었다. 하지만 토너먼트에 접어들며 16강에서 세레소 오사카, 8강에서 나고야 그램퍼스(이상 일본)를 연이어 물리쳤고, 4강에서 숙명의 라이벌 울산과의 '동해안 더비'마저 넘어서는 이변을 연출했다.

포항은 나고야를 상대로는 조별리그에서 만나 1무 1패로 열세였고, 울산에게도 국내 리그에서 1무 2패로 밀렸다. 특히 4강전을 앞두고 골키퍼 강현무의 부상, 신진호-고영준의 경고누적으로 베스트 11을 짜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이 모든 불리함을 보란 듯이 극복하고 드라마를 썼다. 객관적인 데이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명문 포항만의 저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돌이켜보면 포항은 항상 불리하다고 평가받는 상황에서 기적같은 반전을 이뤄낸 바 있다. 플레이오프 제도가 있던 2007년에는 정규리그에서 5위에 그치고도 토너먼트에서 상위권 팀들을 연파하며 우승을 이뤄냈다.

2009년 ACL 8강전에서는 부뇨드코르(우즈벡)에 1차전에서 1-3으로 완패하고도 2차전에서 4-1로 대승을 거두며 1, 2차전 및 연장 합계 5-4로 극적인 대역전승에 성공했고 우승까지 차지했다. 2013년에는 외국인 선수를 한 명도 쓰지 않고 K리그와 FA컵 2관왕에 성공했다. 특히 반드시 이겨야 했던 울산과의 최종전에서는 경기 종반까지 팽팽한 승부를 이어가다가 후반 추가시간에 터진 김원일의 '극장골'로 드라마틱한 우승을 차지한 장면은 '포항 드라마'의 화룡점정이었다.

공교롭게도 포항 드라마의 가장 빈번한 희생양이 된 팀이 하필 동해안 더비 라이벌인 울산이었다. 울산은 2013년을 비롯하여 2019년과 2020년에도 시즌 막바지 포항과의 마지막 대결에서 번번이 덜미를 잡혀 우승을 놓친 바 있다. 홍명보 감독이 부임한 올시즌에는 모처럼 포항과의 상대전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접하며 명예를 회복하는 듯 했지만, 이번엔 ACL 우승 길목에서 또다시 발목이 잡히며 대회 2연패와 트레블(3관왕)의 꿈이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위기의 선수단을 하나로 묶은 김기동 감독의 지도력도 빼놓을 수 없다. 김 감독은 포항에서 선수 시절 주장으로 활약하며 전성기를 이끌던 구단의 레전드 출신이기도 하다. 2019년 4월 최순호 감독의 뒤를 이어 포항의 지휘봉을 잡은 김 감독은 유연한 형님 리더십과 맞춤형 용병술을 앞세워 무너질뻔한 팀을 재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철저한 분석을 통하여 한번 당한 상대에게 쉽게 또 당하지 않는 뒷심, 강한 상대를 만나서도 여간해서 뒤로 물러서지 않는 공격적인 스타일이 김기동 축구의 트레이드 마크다.

포항은 이날 강력한 압박으로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선다는 평가를 받았던 울산을 괴롭혔다. 비록 후반 원두재의 퇴장으로 인한 수적 우위라는 행운도 있었지만, 포항은 이미 전반에도 점유율과 슈팅 숫자에서 우위를 점할만큼 경기력에서 전혀 밀리지 않으며 승리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동아시아 권역에서 결승에 오른 포항의 결승 상대는 알 힐랄(사우디아라비아)이다. 두 팀은 다음달 23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우승컵을 놓고 격돌한다. 포항은 ACL 전신인 아시아클럽선수권대회에서 1996년, 1997년 두 차례 우승했고, 2002년 지금의 ACL로 재편된 이후로는 2009년에 이어 구단 역대 두 번째 우승을 노린다. 12년 만에 결승에 오른 포항은 준우승 상금인 200만 달러(약 23억5100만원)를 확보했으며 우승시 상금은 400만 달러(약 47억200만원)까지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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