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알고 있던 판소리가 아닌데?"

막이 오르기 하루 전, 어느 국악 공연의 드레스 리허설(본 공연에 앞서 마무리 연습)을 보고 나니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20년 전쯤 판소리는 우연한 기회에 내게 다가왔다.

이때 접했던 판소리를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이 놀라움은 더욱 충격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좀처럼 접하기 어려웠던 '완창'을 들을 수 있었는데, 반나절 이상 같은 좌석에 앉아 들었던 소리라 더욱 그랬나 보다.

대극장 한가운데엔 전통 옷을 곱게 차려입은 소리꾼과 고수만 단둘이 서 있었는데, 아무런 무대장치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직 노래와 북소리만 들릴 뿐이다. 간혹 흥에 겨운 어르신 관객들의 추임새만 거들뿐 공연이 진행되는 내내 청중을 압도하는 오직 한 사람만 대극장을 지배했다. 그랬던 나의 판소리에 관한 기억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초청한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14~17일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를 보고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공연의 제목이 '오버더떼창'이란다. 젊은 관객들의 취향을 고려했는지 참으로 독특하고 참신하다. 영어와 동시대 단어가 결합한 제목을 보니 퓨전 판소리라 짐작했다. 공연 포스터를 보니 하늘과 하얀색의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리따운 여섯 명의 소리꾼이 등장한다.
 
 2021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공연사진

2021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공연사진 ⓒ 김영배

 
박인혜가 중앙에 위치하고 양승은, 이예린, 한아윤, 황지영, 이해원까지 다섯 명의 소리꾼이 합창한다. 이번 작품은 두산아트센터에서 40세 이하의 젊은 예술가를 지원하는 <두산아트랩 2021>에 선정돼 지난 3월에 쇼케이스를 선보인 바 있다. 이후 5월에는 제20회 의정부음악극축제 창작음악극 쇼케이스 'Next Wave'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이번에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 공식 초청되어 정식 초연을 밟고 있다.

공연을 진행했던 어떤 파트에선 이 작품을 연극으로 분류했으며, 실제로 공연을 관람했던 어느 평론가는 박인혜를 배우라 부르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좀처럼 기지개를 켤 수 없었던 2021년에도 쉼 없이 달렸던 이번 작품이 드디어 마지막 퍼즐을 끼워 맞추고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쇼케이스를 거치고 마지막 탑을 쌓지 않았던 후반부를 완성하니 관객들의 기대가 하늘을 찌를 듯하다. 전반부만 공개됐을 때부터 결말을 보지 못해 아쉬움에 몸 달았던 수많은 관객의 목마름이 이제야 풀리게 됐다.
 
솔직히 이번 공연의 장르를 규정짓는 것이 의미 있을까. 공연장을 들어서기 전까진 분명 국악을 상상했지만, 95분에 이르는 여정이 마무리됐을 땐, 한 편의 연극, 아니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뮤지컬 또는 오페라가 맞을 거 같다. 무대의 중앙에 위치한 평상과 떼창의 일원이 된 소리꾼들이 앉을 두 개의 의자만 대칭을 이룬다. 대개 소리꾼 바로 옆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고수는 무대의 오른편에서 북, 징, 장구 등 다양한 악기를 멀티로 지원한다.

하지만 뮤지컬처럼 음악극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이유는 고수의 반대편에서 가야금과 양금 등을 연주하는 악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고수와 악사에 의해 좌우 서라운드 스피커처럼 교차해서 들리는 다채로운 음색은 관객의 귀를 더욱 풍족하게 채운다. 무엇보다 이 공연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박인혜의 표정 연기라고 단언하고 싶다. 95분 동안 1역 다역을 맡은 그는 5명의 소리꾼이 합을 맞춰 장단을 주고받을 때도 무대의 곳곳을 누비며 작은 표정까지 흘리지 않는다. 그가 동시대를 대표하는 소리꾼이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연극적 요소에 물이 올라 공연을 보는 내내 눈과 귀가 호강한 기분이다.
 
그동안 필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가 주는 판소리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앞서 오래전에 경험했던 오리지널 판소리가 20년 넘게 뼛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다양한 요소가 더했다고 이 공연의 본(本)은 판소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억지인 듯하다. 수많은 음악, 무대, 연출 기법이 더해졌고, 배우들의 연기와 떼창이 이루어졌지만, 무대의 메인스트림은 판소리가 이끈다.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드레스리허설 현장사진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드레스리허설 현장사진 ⓒ 이규승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드레스리허설 현장사진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드레스리허설 현장사진 ⓒ 이규승

 
연출과 배우 등 모든 것을 이끄는 소리꾼 박인혜는 판소리를 스승으로부터 도제식으로 배웠다고 고백했는데, 이번 공연은 지금껏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판소리의 시작을 알리는 순간이다. 스토리가 공연을 이끌어가며,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무대의 배경엔 친절한 대사가 자막으로 서비스된다. 노래는 스무 개 남짓 이어지는 단막으로 구분되면서 연극적 요소를 더했으며, 공연은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진다. 아마도 상반기에 선보였던 쇼케이스까지 전반부로 구성됐다면 박인혜의 고민을 거쳐 마지막이 완성되지 않았을까.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공연을 되짚어보자.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는 판소리의 새로운 영역을 열어갈 '오버더떼창: 000'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란다. 아마도 후속으로 다른 내용이 판소리 합창으로 공개되나보다.

아무튼 이번 '문전본풀이'에 대한 배경을 다시 한번 짚어보면, 공연의 앞부분과 마지막을 강타하는 대사에 "본을 풀어 봅세"가 자주 등장한다. 본(本)풀이. 원래는 무속의례인 굿에서 무당에 의해 구송되는 고전 신화를 뜻한다. 특히, 제주도에서 전승되고 있는 무속신화에서 유래됐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문전본풀이'는 집안의 곳곳과 함께 대문을 지키는 문전신 등 가택신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물정 모르고 젊잖게 책만 읽은 가부장적인 아버지(남선비)와 생활력이 강한 어머니(여산부인)는 슬하에 일곱 아들과 함께 남선마을에 살고 있다.

가난한 이들에 어느 날 아버지의 친구(전상아재)가 찾아와 남선비에게 무곡장사를 권하니 아들이 만들어준 배를 타고 신비의 섬(오동국)으로 떠난다. 여기서 한 여자(노일저대)를 만나 내기 장기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그녀의 꾐에 빠져 두 눈을 잃게 된다. 한편 3년이 지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어머니는 오동국으로 떠나 남편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여산부인은 노일저대에 밀쳐 우물에 빠져 죽게 된다. 앞을 보지 못하는 남선비는 여산부인 행세를 하는 노일저대와 함께 남선마을로 돌아와 아들들과 상봉한다.

그러나 돌아온 이후에도 일곱 아들의 간을 먹어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속임수를 부리지만 막내아들의 지혜로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결국 모든 것이 들통 난 이후 죽은 어머니는 환생하고 노일저대는 도망가다가 변소에서, 남선비는 정주목에서 죽음을 맞는다. 이렇게 섬에 갇혀 살며 집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제주도의 이야기는 죽은 이후에도 집안의 대문 곳곳에 가택신의 존재한다는 믿음을 담은 제주도의 지리적 특성과 연관이 깊다.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드레스리허설 현장사진

<오버더떼창: 문전본풀이> 드레스리허설 현장사진 ⓒ 이규승

 
공연은 두산아트센터 쇼케이스에 공개됐던 전반부와 아마도 풀리지 않았던 이야기를 매듭지었던 후반부로 나뉜다. 두 개의 큰 장막을 구분하는 데에는 극 중 한 편의 영상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중간에 인터미션이 주어지지는 않지만 출연했던 인물들이 제주도의 한 고택에서 대사를 읊조리면서 주고받는 영상이다.

마치 여행을 간 동갑내기 친구들이 소설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내뱉는 그들만의 생각이 공연 중간에 잠깐의 휴식으로 다가온다. 또한 공연을 마지막에는 퇴장하는 배우들의 뒷모습과 함께 어느 노인의 음성이 나지막하게 들리는데 여기에서 아쉬워하는 관객들은 쉽게 발길을 떼지 못한다. 이전에 경험할 수 없었던 파격적인 요소는 공연의 여기저기에 배어난다.

박인혜는 "(무곡장사는) 요즘 말로는 무역을 뜻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또한 고전설화와는 다르게 이야기를 여성의 시각에서 전개함으로써 등장인물의 섬세한 심리를 묘사하는 것이 돋보인다. 하물며 한 가정을 쑥대밭이 되게 만들었던 악역도 "왜 그의 입장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를 생각하게 하는 연민을 베풀었다.

"위드 코로나 시대에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공연을 만들었다"는 박인혜의 설명처럼 이번 공연은 무너져버린 가정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마지막 대사가 가슴을 메아리친다.

"속 나누고 사십시다. 비가 내린다. 타닥 탁 타닥 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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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문화재단 홍보팀장과 문화예술 월간지 <문화+서울>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 신문사(https://bit.ly/2M2J5y5)에서 '주간추천 전시/공연'과 '사람in예술' 코너의 글을 쓰고 있다. sortir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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