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문영이라는 이름 뒤에 자연스럽게 평론가라는 직함이 여전히 익숙하게 느껴진다. 그만큼 1세대 영화 평론가로서 그가 미친 영향력이 크다는 방증이다. 초창기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로, 그리고 부산 영화의 전당 관련 일을 할 때만 해도 그가 집행위원장으로 앞에 설 것이라 상상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서 공식 임기를 시작한 첫해, 벌써 영화제는 후반부로 달려가고 있었고, 집무실에서 만난 그의 얼굴엔 피로감이 가득해 보였다. "초보니까 정신없이 이리저리 다니며 지내고 있다"며 웃어 보이는 모습에서도 어느 정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코로나 19 팬데믹 2년 차에 1200명 규모의 초청 인원과 함께 오프라인 개막식을 치러냈고, 관객과의 대화 및 해외 게스트들도 적극 초청했다. 덕분에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잠시 잊었던 면대면 교류의 소중함을 새삼 실감케 하고 있다.

확대 아닌 확산을 꿈꾸다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 부산국제영화제

 
"말 그대로 사람이 고팠다는 걸 새삼 느낀다. 제가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2000년대 초만 해도 개막식이 끝나며 영화제의 절반이 끝난다는 말을 하곤 했는데 올해는 하루씩 지나는 걸 실감하고 있다. 방역 문제도 있고, 팬데믹 때문에 게스트들이 오가는 것도 변수가 생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부산도 10시면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데 덕분에 역대 영화제 중 게스트들이 영화를 가장 열심히 보는 해로 기록되고 있다(웃음)."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지난 9월 기자간담회에서 부산국제영화제 10개년 계획의 얼개와 방향을 발표한 바 있다. 양적 성장이 아닌 질적 변화를 중심으로, 지역 사회와의 연계도 강화하고, 특별전을 꾸준히 마련해 관객과 소통한다는 취지다.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또한 "무조건 많은 작품을 초청하는 게 아니라 감당할 수 있는 규모로 잘 운영하는 게 좋다"는 생각을 꾸준히 밝혀오기도 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초청작은 70개국, 223편이다. 2019년 직전까지 약 300편 안팎이었다는 걸 기억하면 몸집을 꽤 줄인 편이다. 
 
"생각해보면 2005년 무렵 이미 영화제를 찾는 총 관객 수가 20만 명 수준이었고, 초청작도 300편 안팎이었다. 이걸 더 늘리려면 영화제 일수를 늘리고, 극장을 더 늘리는 방법 뿐인데 그게 무슨 소용일까 싶다. 한 명의 관객이 영화제에 와서 즐길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다. 올해도 월드프리미어(세계 최초 상영)가 90편이 넘는데 한 사람이 90편을 다 못본다. 양적 확대의 한계는 명확한 거지. 적정규모가 중요하다."

올해 진행 중인 '중국영화 특별전', 그리고 여성 영화인 작품을 집중상영하는 '원더 우먼스 무비'는 영화제의 시선을 잘 보여줄 수 있는 행사다.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계속 변하는 세상, 그리고 영화들을 관객분들에게 제시한다는 의미가 있다. 중국에서 2010년 이후 새로운 유형의 감독이 등장하고 있는데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며 "여성 영화 특별전은 부산이 상대적으로 소홀한 것처럼 보였던 여성 영화인 조명을 강화한다는 취지"라 설명했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이고 있는 동네방네 비프 현장.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이고 있는 동네방네 비프 현장. ⓒ 부산국제영화제

 
이런 기존 프로그램과 별개로 올해 가장 눈에 띄는 행사가 커뮤니티 비프와 동네방네 비프다. 부산국제영화제 발원지인 남포동 지역에서 관객 참여형 행사를 진행한다는 취지인 커뮤니티 비프는 올해로 4번째며, 부산 시내 주요 장소 14곳을 선정해 작은 단위로 영화를 상영하는 동네방네 비프는 올해 처음 시도한 행사다. 특히 커뮤니티 비프는 첫날 첫 상영 때부터 관객이 대거 몰리며 흥행 조짐을 보였고, 동네방네 비프에서도 미처 해운대까지 가지 못하는 관객들 사이에서 호평이 나오고 있다. 

"(기자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부산역 광장에서 진행된 건데 만석이었다. 사람들이 야외 계단에 앉아 영화를 보는데 스태프들이 그 광경에 뭉클했다더라. 시민들이 걸어서 5분, 1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에서 함께 영화를 본다는 건 굉장한 체험이지. 이걸 무리하게 확대하지 않으면서 영화적 체험을 확산한다는 취지로 꾸준히 진행할 것이다. 

그리고 팬데믹 상태가 좀 진정되면 아시아 지역 동시 상영도 주요하게 진행하려 한다. 부산영화제가 아시아의 중심을 표방하며 이어졌고, 실제로 아시아 영화인들 사이에서 인정받으며 성장했다. 동네방네비프와 아시아 동시 상영이 같은 맥락이라고 본다. 탈중심적 문화 향유와 거점의 확대라고 생각한다. 2030년 무렵이면 아마 마을영화 섹션이 따로 생기지 않을까.  

현재 영화제 주요 프로그램은 공급자 주도형 이벤트다. 우리 프로그래머, 기획자들이 행사를 구성해서 수요자에게 제시하는 건데 커뮤니티 비프 등은 수요자 주도형이다. 관객 참여형 이벤트의 집결지로 보면 된다. 동네방네비프는 수요자와 공급자의 경계에 있는 셈이고. 그 경계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게 목표다. 함께 영화를 만들고, 얘기하고 즐기는 상태가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지점이다."


"갈등 봉합하고, 독립성 보장받아야"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허문영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 부산국제영화제

 
청사진 이야기에 한층 설렐 수 있지만 부산국제영화제는 2014년 <다이빙벨> 상영 이후 부산시와 당시 보수 정권 정부의 압력을 받은 역사가 있다. 독립성을 지키고자, 조직위원 중심 체제에서 민간 이사회 체제로 체질을 개선해왔는데 이 과정에서 영화제 산파 역할을 해온 초기 멤버들의 갈등이 수면 위로 불거지기도 했다. 26년간 조직 자체가 노쇠했다는 지적도 이어지고 있다. 허문영 집행위원장에겐 안으론 갈등의 해소와 밖으론 영화제 독립성 및 창의적 에너지 확보가 주요 과제로 주어진 셈이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다. 어떤 조직이든 20년이 넘어가면 경화가 생기는 것 같다. 부산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질적 변화를 위해선 조직도 젊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근데 무조건 개편하는 게 답은 아닐 것이다.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역동성을 불어넣기 위해 고민하는 게 있다. 

이번에 개막식에서 개막 선언을 박형준 시장과 함께 하는 모습에 일각에서 우려하는 것도 알고 있다. 근데 개막 선언은 전부터 집행위원장과 (당연직으로 부산 시장이 맡게 되는) 조직위원장이 해왔다. 물론 오거돈 시장 때는 민간 이사장 체제라 조직위원작 직함이 없었지만 무대에 함께 올라 개막 선언을 했었다. 전 그때 영화제엔 없었지만, 그런 선택의 이유를 잘 안다. 시장이 바뀔 때마다 영화제가 흔들린다는 우려의 시선이 있었는데 이렇게 대외적으로 부산시장의 정파와 상관없이 영화제를 지원한다는 자세를 보이는 거지. 박형준 시장도 그런 상징적 의미로 모신 것이다. 제가 한 건 아니지만 그 판단이 적절하다고 본다." 


OTT 플랫폼의 성장과 여러 플랫폼의 등장으로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에 근본적 질문이 나오는 요즘이다. 영화제의 수장으로서 영화의 미래를 그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극장에서 함께 영화 보는 행위는 결국 위축되고 말 것인가. 이것은 영화의 위기라는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허문영 집행위원장은 "비평가로 계속 남아 있었다면 비관적이거나 우울한 전망을 했을지도 모른다"며 말을 이었다.

"영화제를 하고 있어서인진 모르겠지만 비관하지 않는다. 극장이 잘 될지 판단할 전문가는 아니지만 OTT의 번성을 극장 산업의 위기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 같다. 좀 더 넓게 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많은 영화감독, 스태프들이 영화와 드라마 현장을 오가고 있다. 이들이 OTT 업체와 일하는 건 영화 밖의 일일까. <킹덤>이 OTT에서 공개되고 있지만 드라마가 아닌 한 편의 영화로 봐도 손색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영화의 확장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싶다.

OTT 플랫폼은 방송가와 기존 영화사보다 창작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기회를 주고 있다. 영화의 지분을 뺏어가는 게 아닌 공생할 파트너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OTT 업체들이 문화를 위한 게 아닌 자본을 위해 일하고 있다 하더라도 영화와 문화를 다양하게 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이게 욕먹을 수도 있는 말이지만, 질문을 피하지 않고 영화제도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답을 내리는 게 아닌 함께 질문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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