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극장'에선 처음 또는 다시 볼 만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작품부터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까지 다양하게 다루려고 합니다.[편집자말]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핑크 클라우드> 영화 포스터

▲ <핑크 클라우드> 영화 포스터 ⓒ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주)

 
어느 날 접촉 후 10초 안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분홍구름'이 전 세계에 퍼지자 정부는 바깥으로 나오지 말라는 계엄령을 내린다. 하룻밤을 같이 보냈던 웹디자이너 지오바나(르나타 렐리스 분)와 척추치료사 야구(에두아루도 멘도카 분)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꼼짝없이 집에 갇힌다. 하루 이틀이면 끝날 줄 알았던 격리 생활이 해를 넘기자 둘은 아이를 낳고 부모로 생활하며 새로운 삶을 맞이한다.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꾼 코로나19의 고통이 햇수로 3년째 계속되는 상황이다. 코로나 19 시대를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한 영화도 잇따라 제작되는 중이다. 코로나23 출현을 상상한 <송버드>(2020), 격리 상황에서 강도 행각을 벌이는 커플이 등장하는 <락 다운>(2021), 코로나19로 인한 자가격리와 랜선미팅을 호러 장르에 녹인 <호스트: 접속 금지>(2020), 바이러스가 창궐한 후 과학자들이 치료법을 찾아 깊은 숲 속으로 갔다가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땅속에>(2021)가 대표적인 '팬데믹 시네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치명적인 '분홍구름'으로 인해 사람들이 실내에 격리된 채 살게 되는 세상을 그린 브라질 SF 영화 <핑크 클라우드>는 누구나 코로나19 발생 '이후'에 제작한 작품이라 생각하기에 십상이다. 감염과 고립이 초래한 두려움, 외로움, 무기력함 같은 감정, 스마트폰, 인터넷, SNS, 가상현실을 이용한 소통, 비대면이 주를 이루는 뉴노멀 일상 등 영화 속 상황이 작금의 현실과 닮았기 때문이다.

분홍구름이 퍼지는 도시
 
<핑크 클라우드> 영화의 한 장면

▲ <핑크 클라우드> 영화의 한 장면 ⓒ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주)

 
이울리 제르바지 감독의 데뷔작 <핑크 클라우드>는 놀랍게도 코로나 19 발생 '이전'인 2017년에 시나리오를 작업하고 2019년에 촬영을 마쳤다. <핑크 클라우드>는 관객의 오해를 불식시킬 요량으로 첫 화면에 "이 영화는 2017년에 쓰였습니다. 실제 사건과 닮은 건 순전히 우연입니다"란 문구를 넣었다. 미확인 생명체에 감염된 사람들이 인류를 위해 스스로 격리되는 선택을 하는 <씨 피버>(2019)를 연상케 하는 놀라운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핑크 클라우드>는 도입부에서 분홍구름이 퍼지는 도시 풍경과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이 분홍구름이 몸을 감싸자 갑자기 쓰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정부는 집에 있다면 모든 창문과 문을 닫고 바깥이라면 가까운 건물로 대피하라고 방송한다. 무척 황당하다. 창문이나 문을 닫는다고 분홍구름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설정이 말이 되는가. 

이외에도 과학적, 논리적으로 보면 이상한 것투성이다. 정부는 바깥출입이 불가능해지자 원격 조종 드론을 이용해 집 창문에 진공 튜브를 설치해 매일 생필품을 공급하기 시작한다. 생필품 생산은 어떻게 할까? 전기, 가스, 수도 공급이 원활한 까닭은 무엇인가? 방호복을 왜 만들지 않나? 그러나 <핑크 클라우드>는 세부적인 설정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분홍구름에서 내부는 절대 안전하다는 설정을 세운 다음 끝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의 시간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찰할 따름이다.

분홍구름에 맞서는 지오바니
 
<핑크 클라우드> 영화의 한 장면

▲ <핑크 클라우드> 영화의 한 장면 ⓒ 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주)

 
분홍구름으로 인해 집안에 갇히게 된 지오바나와 야구는 하룻밤 상대에서 동거하는 커플 사이, 종국엔 부부로 관계가 변화한다. 아이도 가진다. 때론 다투다 위아래층으로 따로 지내는 별거 생활도 한다. 영화의 전개 자체만 본다면 여느 연인들이 부부로, 그리고 아빠와 엄마로 변하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외피가 일반적인 드라마가 아닌, SF 장르라 낯설 뿐이다.

지오바나와 야구의 분홍구름이 야기한 뉴노멀에 대한 뚜렷한 시각차를 갖는다. 야구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 자신의 아이를 갖길 원한다. 반면에 지오바나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삶에 갇혔다고 느낀다. 결혼, 임신, 육아로 인해 독립된 여성으로 사는 인생을 포기하게 되는 지오나바에겐 사회가 요구하는 가족 안에서 자유를 잃어버리는 <비바리움>의 젬마(이모겐 푸츠 분)가 겹쳐진다. 

<핑크 클라우드>를 여성의 시각으로 읽으면 여성을 상징하는 색깔인 '분홍색'이고, 구름은 결혼이나 가족 같은 전통적인 가치에 우선하라는 주위의 압력이자 강요된 여성성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분홍구름에 맞서는 지오바나는 개인의 개성, 욕망, 자기 결정권을 갖길 바라는, 남성 중심의 사회가 정의한 여성을 거부하는 페미니즘 투쟁이다.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온전히 자신을 위한 선택을 내리는 지오바나의 모습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핑크 클라우드>는 뛰어난 연기, 영리한 각본, 놀라운 공간 활용이 돋보이는 인상적인 데뷔작이다. 코로나 19 시대를 담은 흥미로운 우화이며 동시에 SF 장르를 활용한 독특한 페미니즘 영화다. 여러모로 현실감과 공감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제37회 선댄스영화제 월드시네마 드라마틱 경쟁 부문 초청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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