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사극 <홍천기>의 주인공은 양명대군(공명 분)이 주최한 그림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뒤 고화원이라는 드라마 속의 국가기관에 특채됐다. 가상의 국가인 단 왕조를 배경으로 하는 이 드라마가 조선 초기를 연상시킨다는 점을 감안하면, 홍천기(김유정 분)가 배치된 관청은 도화서로 개칭되기 이전의 도화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SBS <홍천기>.

SBS <홍천기>. ⓒ SBS

 
홍천기는 이중 임무를 부여받았다. 낮에는 고화원에서 일반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밤에는 비밀리에 선왕의 어진(초상화)을 복원하는 일을 맡게 됐다.
 
홍천기는 이 어진과 인연이 깊다. 홍천기의 출생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가 그린 이 어진에 마왕을 봉인하는 의식이 있었다. 이 의식에 대해 분노한 마왕의 저주로 홍천기는 앞을 볼 수 없는 상태로 세상에 태어났다.
 
그 뒤 기우제 때 그 어진에 불이 났고, 그 틈을 타서 마왕이 봉인에서 해제됐다. 이 여파로 홍천기는 눈을 떴다. 그랬던 그가 아버지를 뒤이어, 마왕을 재봉인하기 위한 어진 제작 작업에 투입된 것이다.
 
죽은 임금의 어진을 보관하는 일은 드라마 <홍천기>에서도 중시되고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훨씬 더 중요하게 다뤄졌다. 모든 경우에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어진에 사고가 생겨 임금이 사흘간 곡을 하는 사례도 있었을 정도다.

강릉 집경전에서 발생한 화재
 
인조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임금이 된 지 8년 뒤인 1631년,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보관하는 장소 중 하나인 강릉 집경전에 화재가 발생했다. 드라마 <홍천기>에서처럼 어진이 불타는 대형 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음력으로 인조 9년 3월 7일자(양력 1631년 4월 8일자) <인조실록>에 따르면, 이 사고는 강릉부사 민응형과 현지 직원들이 필사적으로 진화를 하지 않은 탓에 발생했다. 그래서 강릉 사또에게 관리상의 책임을 묻는 데서 더 나아가, 필사적 진화를 하지 않은 데 대해서까지 책임을 물었다. 건물에 화재가 발생해 이성계 어진이 손상되기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으며 필사적으로 진화 작업을 했다면 어진이 불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왕조국가에서 임금은 신의 대리인이었다. 이런 임금이 죽으면, 국가적 차원의 신으로 숭상됐다. 종묘에서 죽은 왕들에게 제사를 지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신의 형상을 담은 것이 어진이었다. 그래서 어진이 불타는 것은 대단한 변고가 아닐 수 없었다.
 
죽은 임금은 살아 있는 임금의 정통성을 담보했다. 금상(今上)의 권위는 선왕과의 혈통적 연관성에 뿌리를 뒀다. 그래서 죽은 왕의 초상화가 불타는 것은 금상의 이미지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비상사태 하에서 인조는 예조 관청의 수습책을 받아들였다. 예조는 "<예기>에서는 선인(先人, 죽은 조상)의 집이 불타면 사흘간 곡을 한다고 했습니다"라며 조상을 모신 집이 불탄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임금이 백관들과 함께 종묘에 나아가 사흘간 곡을 할 것을 건의했다.
 
위안제(慰安祭)로 불린 이 의식을 위해 인조뿐 아니라 왕후도 소복을 입고 고기·생선 없이 식사를 했다. 또 조정의 업무는 물론이고 시장도 쉬도록 했다. 언제나 항상 이랬던 것은 아니지만, 왕조국가에서 어진 훼손이 얼마나 중대한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어진의 '은밀한' 보관
 
 SBS <홍천기>.

SBS <홍천기>. ⓒ SBS

 
 SBS <홍천기>.

SBS <홍천기>. ⓒ SBS

 
그렇게 소중한 어진을 항상 감추어 두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어진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 정치적 효과를 추구하기도 했다. <홍천기> 속의 왕실 사람들은 어진의 '은밀한 보관'에만 주목하고 있지만, 실제의 왕실 사람들은 그것의 '공개적인 이송'에도 주목했다.
 
왕조시대 대중들이 볼 때, 어진의 이송은 신(神)의 이동 비슷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실 사람들은 어진의 공개적인 이송이 갖는 정치적 기능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첩의 아들이라는 이유에 더해 첩의 장남도 아니고 차남이라는 이유로 말도 못 할 콤플렉스를 겪었던 광해군 역시 그것의 정치적 효용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에 있던 태조 어진 중 하나를 이성계의 본관인 전주로 옮길 때도 광해군은 그 효용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어진 이송이 있었던 1614년(광해군 6년)은 선조 임금의 적장자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이 광해군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해다. 양력 3월 19일(음력 2월 10일), 영창대군이 살해당한 그해에 광해군 정권은 태조 어진을 함경도에서 전라도로 이송했다. 서얼의 측근 사람들이 적장자를 죽여 서얼 임금의 정통성 문제가 부각됐던 시기에 임금의 권위와 직결되는 어진의 이송이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 6년 7월 29일자(1614년 9월 2일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어진 이송을 위해 만반의 주의를 기울였다. 의례에 사용되는 물품을 청결히 하라고 지시했을 뿐 아니라 최종 목적지인 전주 경기전까지 어진이 통과할 역(驛)들을 깨끗이 청소할 것까지 당부했다. 그런 뒤 음력 9월 9일(양력 10월 11일) 한양 서대문 밖 서교(西郊)로 나가 어진을 영접하고 직접 제사까지 지냈다.
 
광해군이 단순히 정성만 들인 게 아니라 정치적 효과까지 염두에 뒀다는 점은 어진 이송에 맞춰 기획한 행사들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6월 30일 발행된 <대동문화연구> 제114집에 수록된 유재빈(劉宰賓) 홍익대 교수의 논문 '움직이는 어진 - 양란(兩亂) 전후 태조 어진의 이동과 그 효과'는 이렇게 설명한다.
 
태조 어진의 영향력은 한양에서뿐 아니라 경기전이 있는 전주와 어진 행차 노정 중에도 행사되었다. 전주에서는 어진이 봉안된 후 시재(詩才)를 내려보내 과거시험을 시행하였고, 그 결과 4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어진의 행차 노정 중에는 백성들의 상언(上言)과 격쟁이 뒤따랐다. 마치 어가 행렬처럼 백성들이 길가에 나와 장첩(狀帖)을 바치기도 하고 전북 고산에서는 현감을 고발하려고 억울한 백성들이 길에서 호소하고 산에 올라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다.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고 백성들이 탄원을 하고 사또를 고발하는 갖가지 일들은 백성과 임금을 연결해주는 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런 일들은 군주에 대한 백성들의 의존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시조신(神)인 이성계의 어진이 광해군 정권의 호위를 받으며 이송되는 동안에 백성들과 광해군을 연결시키는 이벤트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위 논문은 "광해군에게 태조는 전쟁의 승리자이자 왕실의 시조로서 자신의 전란 극복을 선전하고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존재였다"며 "광해군은 태조 영정 의례와 봉안 장소를 직접 조정함으로써 이를 정치적인 행사로 활용하고자 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런 사례들에서도 나타나듯이, 옛날 왕실은 죽은 왕의 어진을 은밀히 보관하는 일뿐 아니라 세상에 드러내 공개적으로 이송하고 이를 통해 '대통령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옛날 사람들이 볼 때, 어진이 이송되는 과정은 왕조의 수호신들이 움직이는 모습과 비슷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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