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요즘 핫하단다. 소문을 들은 딸애의 제안으로 이 드라마를 보게 됐다. 남편과 딸애는 꽤 흥미진진해했지만 내 소감은 냉정하지만 한마디로 '역겹다'였다. 드라마 중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실격한 게임 참가자에게 무차별 총질을 하는 장면에 기함해 시청을 중단해야 한다고 가족들에게 강하게 주장했지만, 다수결로 밀렸다. 문득, 드라마의 잔혹성을 알면서도 끝까지 시청을 고수하려는 남편과 딸애를 보자, 고개가 주억거려졌다. 아, 이래서 이 잔혹 드라마가 전 세계 넷플릭스 TV쇼 부문에서 일위를 했다는 거구나. 이렇게 자극적이어야 일위를 하는 거구나.
 
드라마는 어느 것 하나 상식적이지 않다. 참가자들이 왜 이런 미친 선택을 하는지, 참가자들이 왜 게임을 중단할 기회를 저버리고 개죽음일 게 뻔한 파국을 향해 치닫는지, 평등함이 게임의 대전제 룰이라지만 무엇이 어떻게 평등하다는 것인지, 무엇도 납득되지 않는다. 단지 돈을 위해서(이조차 게임이 거듭될수록 생존이 우선인지 돈이 우선인지 헷갈린다), 456억이라는 거금을 거머쥐기 위한 탐욕으로 눈이 멀어서, 목숨을 구할 기회를 망실하고 참가자들이 스스로 자폭 조끼 버튼을 누른다고 믿으라는 이 드라마의 의도에 실소하고 말았다.
 
게임에 임하기 전, 이미 인간 실격이었다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 ⓒ 넷플릭스

 
드라마는 경제적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모아 게임에 참가시킨다. 이것으로 드라마는 돈의 추격을 받는 사람들이 돈을 얻기 위해서 물불을 가리지 않고 게임에 뛰어들고, 탈 인간화를 목적한 게임 방식과 무도한 계약 조건에 동의한다고 상정한다. 결국 돈을 차지하기 위한 탐욕이 몰 인간적 게임에 몰입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살아남기 위해 혹은 돈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어, 기꺼이 자신들의 악마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에 처하기 전 참가자들의 삶은 어땠을까? 보다 사람다웠을까? 주인공 기훈(이정재)은 놀음을 일삼으며, 내일 운명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노모의 부양을 받는다(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도 건사하기 어려운 노인이 행상으로 번 돈을 '삥 뜯어' 살아간다. 어떤 미안함도 없이 노모의 밥 수발을 받고, 일고의 부끄러움도 없이 노인의 쌈짓돈을 턴다. 기훈의 몰염치는 점입가경으로, 이혼한 전 부인을 스토킹하듯 찾아가 돈을 요구하고, 찾아오지 말라는 전 부인의 남편에게 자신의 다친 자존심이 애달프다고 으르렁댄다. 이런 기훈에게서 게임 전과 후를 비교할 때, 어떤 인간성의 상실이 있다고 믿어야 하는 걸까? 굳이 어떤 걸 하나를, 더 나쁜 하나를 선택하라면, 가족을 착취하며 살아가는 게임 전의 모습이 더 추악하다.
 
기훈의 동네 친구인 상우(박해수)는 어떠한가? 홀로 아등바등 아들을 키워 서울대에 보내 성공시킨 게 유일한 자부심인 노모를 그는 어떤 곤경으로 몰아넣었는가? 자신을 먹이고 입혔을 기반인 작은 생선 가게마저 노모도 모르게 저당 잡혀 과도한 레버리지를 일으킨 서울대 출신의 증권 맨에게 시청자는 어떤 공감적 이입이 가능한가? 또한 그가 이주 노동자 파키스탄인 알리(아누 팜 트리파티)를 속이고 등치는 모습은 더욱 참담하다. 게임에 임하기 전 그가 알리에게 동정심으로 선의를 베풀었다고 해서, 알리의 임금을 떼먹고 제 배불리기에 급급한 악랄한 사업주의 모습과 상우의 모습에 과연 얼마만큼의 간극이 존재하는 걸까? 게임에 참가한 대부분이 이미 스스로 인간 자격을 폐기했음에도 알리에게 서슴지 않고 "족보 없는 외국인"이라 비하하는 혐오는 알량한 동정심으로 포장된 선의에도 여지없이 배태되어 있었다.
 
이런 면에서 기훈과 상우의 비극은, 극단적 상황으로 내몰릴 때 나타날 수 있는 몰 인간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스스로 폐기한 인간다움을 모른 체함에 있다. 기훈이 게임 참가자 노인인 일남(오영수)에게 노인에 대한 예의로 선의를 보일 때, 시청자는 그를 끄들겨 묻고 싶어진다. 대체 "뭣이 중한디?" 자신의 노모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은 마음 씀을 타인인 노인 일남에게 보인다고 해서 기훈에게 더 나은 인간 자격이 주어질 수는 없다. 그래서 일남이 기훈에게 받은 호의를 가긍히 여기고 그에게 기회를 준다는 설정에서 시청자는 끝 모를 배반감에 휩싸인다. 비록 젊은이와 노인 사이라도, 남자들끼리 주고받은 의리가 아름답지 않느냐고 되묻는 듯한 드라마의 질문에 전혀 공감이나 동의를 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듯하지 않는 여성 캐릭터들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 ⓒ 넷플릭스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면면도 참으로 상식적이지 않다. 캐릭터를 짐작할만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지 않는 선에서 드라마가 그리는 위기에 처한 여성은 지나치게 뻔하다. 동두천에서 한가락 했음을 짐작하게 하는 미녀(김주령)를 보자. 드라마는 동두천=직업여성이라는 공식을 무람없이 대입하며, 이런 여자이기에 돈을 차지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리낌 없이 몸을 제공한다고 믿고 있는 여성 혐오적인 상상력을 보라. 절체절명의 순간에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고작 남자, 그것도 게임 참가자 중 가장 신뢰할 수 없는,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조폭에게 자신의 명운을 건다고 믿으라지 않은가.
 
또 다른 여성 인물인 새벽(정호연)과 지영(이유미)을 보자. 새벽은 '탈북민'이고 지영은 가정폭력의 피해자다. 이들은 기훈이나 상우와 달리, 살아갈 권리를 빼앗긴 이등 시민 신분이다. 새벽은 탈북 과정에서 흩어진 가족을 다시 집으로 데려와야 하는 과중한 의무감을 어깨에 지고 있다. 그렇기에 새벽은 돈을 만들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의 범죄보다 더 극악한 건 새벽을 등치는 브로커며, 이런 범죄를 방치하는 사회 구조다.
 
게임에 참가하기 전 기훈과 얽힌 사연은 게임 끝까지 새벽을 기훈에게 빚지게 만든다. 기훈은 게임 전 이미 인간 실격이었음에도 드라마는 끝까지 그를 지킬 가치가 있는 인물로 지켜 나가며, 새벽으로 하여금 "아저씨 그런 사람 아니잖아"라며 그의 폐기된 인간다움을 수호하는 자리에 위치시킨다. 여기서 시청자는 묻게 된다. 목숨을 걸고 탈북한 소녀 새벽이, 희망을 좇아 남쪽으로 왔지만 디스토피아가 된 비극적 현실에서 발버둥치는 새벽이, 왜 자신의 안위를 위해 노모를 등치는 남쪽 남자 기훈의 수호천사가 되어야 하는가 말이다.
 
지영은 이 드라마에서 게임에 참가할 이유를 가장 납득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성직자인 아버지에게 어려서부터 성폭행을 당해왔고, 오징어 게임보다 더 극단적인 상황이 벌어진 그 사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트라우마에 갇혀있다. 그런 그가 출소했지만 갈 곳이 없어, 딱히 살아갈 의미가 없어, 이다지도 몰 인간화된 게임에 선뜻 참여한다고 드라마는 믿으라고 한다.
 
기훈과 상우가 시민으로 살다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게임에 참가한 반면, 새벽과 지영에겐 이런 참담한 선택을 하게 한 이유를 찾기 어렵다. 비록 인간이기를 작파한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그야말로 극단적 게임이라는 초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선택한 누구에게나 짧게 살았건 길게 살았건, 여자건 남자건, 그 선택엔 나름의 당위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게다 마침내 이 두 여자의 게임이 종국에 이르러서, 지영이 "나랑 (게임)해줘서 고마워"서 새벽을 위해 자신의 생존 기회를 기꺼이 양도한다는 설정은, 살벌한 생존 게임이 벌어지는 현장의 두 여자에게 돌연 우정이라는 낯선 감정을 들이대며, 그녀들의 절박한 상황을 밑도 끝도 없이 낭만화하고 있다.
 
참가자를 죽여야만 살아남는 서바이벌 '데스 게임'이라고 해서, 드라마의 본령인 메시지는 아예 포기하고 이토록 자극적인 재미만 좇아도 되는 걸까? 애초 노모 등을 치고 살아가는 지질한 루저 기훈이 게임장에서 돌연 타인을 배려하는 그럴듯한 인간상으로 캐릭터가 붕괴될 때부터, 이 드라마가 서사는 포기했구나 싶었지만, 좀 너무 갔다 싶다.
 
'돈'은 인간을 비굴하게 만들고 인간을 인간이 아니게도 만든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돈에 의해 침몰된 신자유주의의 처참한 인간상을 그리려 했다면, 최소한 돈의 노예가 되기 이전에는 인간다움을 지키려 노력했거나 혹은 몰 인간화되었더라도 최후의 보루로 남겨진 알고 보니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들의 인간 실격의 선택에 비극적이나마 절반의 동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해서, 돈을 차지하기 위해, 강자(부자)가 아닌 약자끼리 죽고 죽이는 싸움판을 즐기자며 판돈을 걸 수는 없다. 강자가 단지 낄낄거리는 관람을 위해 깔아 놓은 비극 행 도박판에, "여기는 희망이라도 있"다며 베팅을 할 수는 도저히 없다. 약자의 마지막 무기인 연민과 연대마저 씨를 말리고 나면 대체, 무엇이 남는다는 것인가.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포스터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포스터 ⓒ 넷플릭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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