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베 얀손'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토베 얀손' 포스터 영화 포스터 이미지 ⓒ 영화사 진진

 
1_박제된 위인을 생생한 인간으로 되돌리려는 시도
 
'위인'이라 불리는 이들의 삶은 흔히 후대에 의해 팔다리가 잘리듯 취사선택되곤 한다. 모두에게 무난한 업적과 미담은 틀로 찍어낸 공식처럼 무한 복제되어 전파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려야 해서 머리가 복잡해지는 사안은 의도적으로 장막을 친 것처럼 가려지곤 한다. 그렇게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할 논란은 소거된 채, 무미건조하게 단순화된 '위인'만 남게 된다.
 
헬렌 켈러는 긴 생애를 살았지만 우리는 대개 장애극복의 기적만을 보게 될 뿐 성년이 된 이후 사회주의 운동에 매진했던 긴 시간은 거의 접하지 못한다. 사실상 우리가 아는 헬렌 켈러는 그녀의 인생에서 초반부 1/3에 불과한 것이다. 비슷한 예로 쇼팽은 음악가로, 마리 퀴리는 과학자로 알려졌을 뿐 그들이 당시 러시아 제국 치하에 있던 조국 폴란드의 독립을 열렬히 원하던 우국지사였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단순 편의적이건 난제를 슬쩍 건너뛰기 위함이건 너무나 흔하게 보이는 풍경이다.
 
하지만 그렇게 마치 쇼윈도의 마네킹처럼 이상화된 위인과 영웅에서 후대가 무엇을 배우게 될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논란이 될 일도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고난을 극복하고 새로운 혁신을 시도하는 이들에겐 필연적으로 시행착오와 실패,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고 그 과정에서 편향되거나 뒤틀린 면모를 드러내는 경우도 흔하다. 그런 공과를 골고루 후대에 남겨 토론과 평가를 거치는 게 진정 후손들에게 유익한 귀감이 될 테다.
 
2_핀란드를 상징하는 캐릭터, '무민'의 창조자
 
북유럽 스칸디나비아를 일컫는 '노르딕' 국가군의 일원인 핀란드. 이 나라를 떠올릴 때 우리는 몇 가지 이미지와 상징을 흔히 거론하게 된다. 자일리톨, 사우나, 핀란드식 창의 자율교육 같은 게 쉽게 입 밖으로 나올 법하다. 거기에서 더 깊게 들어가서 정치와 역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전투민족 핀란드인의 무용이나, 현대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보여준 소련과의 겨울전쟁을 줄줄 논할 게다. 좀 더 문화적인데 집중한다면 일본영화 <카모메 식당>이나 거장 칭호가 붙는 아키 카우리스마키 감독의 작품들을 언급하는 이들도 하나둘 나타날 법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가장 보편적인 스타는 세계 50여 개국 언어로 번역된 '무민' 캐릭터가 아닐까? 소설과 동화, 만화는 물론 연극과 실사영화, 애니메이션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고 방대한 컬렉션으로 뻗어나간 '무민'의 창조주가 바로 핀란드의 국민작가이자 위인 반열에 오른 토베 얀손(1914~2001)이다.
 
동화작가라면 대개 우리는 스테레오 타입의 고정관념을 갖고 상상하게 된다. 인자한 표정의 중년 혹은 노년 여성이 안경을 끼고 조곤조곤 친절한 미소와 느긋한 이야기꽃을 피우며 묵묵히 작업하는 그런 풍경. '무민'을 세상에 내놓은 토베 얀손이라면 응당 그런 전형의 상징처럼 등장해야할 터이다. 하지만 '무민'과 토베 얀손의 고국 핀란드의 여성영화인들이 전력을 다한 협동으로 선보이는 <토베 얀손>은 그런 판에 박혀 박제가 되어버린, 안데르센 이후 가장 위대한 동화작가의 반열에 오른 주인공의 상상을 깨부수는 방황과 성숙함이 교차하는 1944-1962년 사이 시간대에 집중한다.
 
영화가 다루는 시간대는 시기적으로는 무민의 Proto-Type 원형이 태동하던 시절부터 세계적 '현상'으로 자리를 잡기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한편 이 시기는 세계사는 물론 북유럽의 소국 핀란드에도 격동의 시간이었다. 1944년은 2차 세계대전의 격랑에 핀란드가 원하지 않게 끌려들어간 난장의 정점이었으며 영화의 도입부는 그런 전쟁의 참화를 조금이나마 묘사하고 있다.
 
당시 핀란드는 '겨울전쟁'으로 무단 침략해 영토를 강탈한 소련군에 맞서 히틀러의 독일과 동맹해 실지 회복에 나섰다가 반격한 소련과 한편이던 독일 사이에 낀 꼴이었다. 자연히 국내 좌/우 논쟁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2차 대전의 전황이 기울면서 결국 핀란드는 소련에게 다시 양보하고 어제의 동맹 독일과 북방의 동토에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런 역사의 파도 속에서 '무민'은 사회주의 계열 잡지의 시사연재만화로 세상에 첫 선을 보였다(이후 편찬된 무민 전집에서 이 시기 작품들은 대개 제외되어 있는 편이다).
 
영화는 주인공의 조국에서 마음먹고 만든 기념작인 만큼 초창기 '무민'의 디자인과 캐릭터가 수정되며 자리잡아가는 과정이 실로 정교하게 재현된다. 관객이 '무민' 작품과 캐릭터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수록 그저 단순히 토베 얀손이 스케치하는 풍경 속 배경만 보더라도 그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다.
 
"토베 얀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토베 얀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3_펄떡펄떡 뛰는 물고기처럼 질주하는 주인공을 보라!
 
그런 정교한 미쟝센의 매력도 무척 돋보이지만 무엇보다 본 작품의 독창성은 우리가 몰랐던 대작가의 열등감과 방황, 불꽃처럼 타올랐던 연애의 풍경화를 강렬한 색감과 음악, 실제 인물과의 높은 싱크로로 구현해낸 영화 속 당대 상황에서 단연 돋보인다.
 
토베 얀손이 저명한 예술가인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늘 열등감에 주눅 들어 있던 시절, 다른 주변 사람들은 '무민'의 탄생에 주목하고 관심을 보이지만 정작 창조주인 작가 자신은 순수 회화로 명성을 얻지 못하는 처지에 절망하며 몸부림치던 참이다. 유년시절부터 창작해온 무민트롤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가다듬는데 혼신을 기울이면서도 그런 이중적 심리와 열패감에 혼란을 겪는 참이다.
 
부모의 예술가 혈통을 이어받아 자유분방하고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를 가진 토베 얀손은 좌파 계열 의원인 아토스 비르타넨과 20대말 30대초 시절 사실혼 수준의 열애에 빠지기도 하지만 범성애(양성애)적 성향의 소유자이던 그는 문화계 모임에서 만난 '용', 핀란드 수도 헬싱키 시장의 딸이자 무대 연출가인 비비카 반들레르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무민'이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온전한 형태로 완성되기까지의 십여 년은 토베 얀슨이 자유로운 이성애에서 격렬한 동성애로, 다시 감정과 애욕에서 동반자를 구하는 상태로 변화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런 대작가의 (특히 국내에선 출판사의 은폐 시도로 몇 해 전 크게 논란이 될 만큼) 알려지지 않은 사생활이 정교하게 재구성된 무민트롤 이야기의 변천사와 어우러지며 하나둘 공개되는 과정을 관객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만나게 될 터이다. 초반에 부모의 그늘에 질식된 살리에리 콤플렉스를 겪으며 가난한 예술가의 데카당스한 삶을 살던 주인공이, 정작 본인은 그저 소일거리나 부업으로 간주했던 '무민'의 성공을 올곧게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전기물에 수록될 법한 수준으로 충실하게 재현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과를 외면하는 듯 보였던 아버지가 작고 후 딸에게 남긴 스크랩북의 짠한 부성애와 늘 주인공을 격려해온 어머니와의 순간들, 작업량이 너무 늘어나 매너리즘을 피하고자 남동생에게 그림을 가르쳐 업무를 분담하게 하는, 말 그대로 '가업'의 탄생 순간들이 쏠쏠한 재미를 더한다.
 
4_위대한 선배 여성예술가를 기리는 후대의 빛나는 노력
 
"토베 얀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토베 얀손"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영화는 그렇게 대작가의 탄생과 기원을 정교하게 축조해 나가면서도 영화 내에서 토베 얀손의 변화 과정을 상징하는 그녀의 자화상이 부각된다. 토베 얀손이 자신의 형상이라 주장하는 이미지는 계속 변해간다. 그 바뀌어가는 과정이 그녀의 격동적 심리상태와 연계해 상징화된다.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어왔던(국내에서만 유독 소개가 안 되었을 뿐 자국 포함 유럽과 서구권에선 아는 사람은 다 알지만) 위의 해당 부분은, 이제 너무나 유명해져 '위인 급' 존재가 된 주인공의 업적들과 팽팽하게 영화 속 분량 점유율 다툼을 벌인다. 핀란드라면 시사상식 급일 테고, 전 세계 어디에서든 검색하면 다 나올법한 전기적 내용과 엇박자를 낼 위험이 상당한 모험인 셈이다.
 
앞에서 살짝 언급하긴 했지만 <토베 얀손>의 자이다 베리로트 감독과 각본가 에바 푸트로, 촬영감독 린다 바스베르그 등 대부분의 관계자 및 스태프는 여성들이 담당한다. 심지어 주연배우 알마 포위스티는 그녀의 조부모가 실제 영화 속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는 '무민' 연극 초연에 참여했을 만큼 실제 작가의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근접성에 힘입어 영화는 어떤 난코스도 가뿐하게 돌파해버린다(각본가도 주요 배역을 겸해 이중삼중으로 활약한다!).
 
그런 섬세하고 치밀한 접근이 16mm 필름 핸드 헬드 촬영의 수고와 주인공의 감정 선을 그대로 선율로 옮긴 듯 음악의 적절한 활용을 덧붙여 정사와 야사의 치고 빠지듯 유려한 호흡을 적절히 조율해낸다. 무엇보다 '무민' 캐릭터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변해가는 치밀한 고증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의 거장을 향한 경외심과 정성을 신뢰할 수 있다. 전기영화의 전형성을 딱 적당히 비틀면서 본체는 고스란히 보전해낸 성공적 시도의 표상 같은 작업이다.
 
<작품정보>
 
토베 얀손 Tove
2020|핀란드, 스웨덴|드라마
2021.09.16. 개봉|102분|15세 관람가
감독 자이다 베리로트
주연 알마 포위스티(토베 얀손 역)
출연 크리스타 코소넨(비비카 반들레르 역), 샨티 로니(아토스 비르타넨 역),
요안나 하르티(툴리키 피에틸라 역), 카이사 에른스트(시그네 '함' 얀손 역),
로베르트 엔켈(빅토르 '파판' 얀손 역), 야콥 외르만(삼 반니 역),
에바 푸트로(마야 반니 역), 리이시 탄데펠트(란들로르드 역)
수입 및 배급 영화사 진진
 
2021 예테보리국제영화제 스벤 닉비스트 촬영상
2021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토베 얀손 무민 자이다 베리로트 감독 알마 포위스티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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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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