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이안 감독의 대표작이자 <다크 나이트>의 조커로 유명한 고 히스 레저의 출세작이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2005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비롯해 골든글러브 4개 부문, 아카데미 영화제 3개 부문을 독식하며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동성애라는 소재가 다소 파격적이었지만 관객들은 큰 편견을 갖지 않았다. 장국영, 양조위 주연의 <해피 투게더> 역시 왕가위 감독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긴 대표적인 퀴어 영화로 꼽힌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 성소수자들이 주인공인 영화에 대한 인식이 야박한 편이다. 2005년 동성애코드가 들어간 <왕의 남자>가 1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큰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왕의 남자>를 본격 '퀴어 영화'로 분류하기는 힘들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반면에 커밍아웃을 하며 퀴어 영화를 전문으로 만드는 김조광수 감독이나 이송희일 감독은 한국 영화 시장에서 주류로 활동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1년에도 동성애 코드가 들어간 영화가 개봉해 적지 않은 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을 돌파하며 관객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이 영화가 표면적으로는 동성애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대를 초월하는 애틋한 멜로 영화임을 알아챈 것이다. 고 이은주를 멜로 여왕으로 떠오르게 만든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였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동성애 코드로 논란이 됐음에도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동성애 코드로 논란이 됐음에도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이 극장을 찾았다.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너무 어린 나이에 떠나버린 매력적인 배우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성장한 이은주는 1996년 교복모델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뒤 드라마 <스타트>를 통해 배우로 데뷔했고 <카이스트>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청춘스타로 성장하던 이은주는 2000년, 만19세의 어린 나이로 홍상수 감독의 <오!수정>을 통해 스크린에 데뷔했다. 이은주는 <오!수정>에서 정보석, 문성근 같은 대선배들 사이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당찬 연기를 선보이며 대종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오!수정>으로 충무로의 유망주가 된 이은주는 같은 해 <번지점프를 하다>를 만났다. 사실 <번지점프를 하다>는 1983년과 2000년의 이야기가 절반씩 나눠져 있기 때문에 이은주의 출연 분량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은주는 사랑스런 연기로 존재감을 뽐냈고 <번지점프를 하다>는 서울에서만 5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은주는 2002년에도 <연애소설>을 통해 이 작품에서 절친으로 출연한 손예진과 함께 '차세대 멜로퀸'에 이름을 올렸다.

데뷔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다작을 해온 이은주는 <연애소설> 이후 <하얀 방>, <하늘정원>, <안녕! 유에프오>가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하며 슬럼프가 찾아왔다. 물론 2004년에 개봉한 <태극기 휘날리며>가 천만 영화가 됐지만 <태국기 휘날리며>의 스포트라이트는 이은주가 아닌 장동건과 원빈이 독차지했다. 하지만 이은주는 TV 드라마로 눈을 돌린 2004년 대중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크게 각인시킨 작품 <불새>를 만났다.

이은주는 <불새>에서 파란만장한 삶의 굴곡을 겪은 이지은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영화로 다져진 연기 내공을 마음껏 뽐냈다. <불새>는 시청률 30%를 넘나들며 많은 사랑을 받았고 이은주 역시 영화만 고집하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낮았던 대중적 인지도를 한껏 끌어 올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이은주는 한석규와 호흡을 맞춘 영화 <주홍글씨>에서도 뛰어난 노래실력과 함께 파격적인 연기변신을 선보이며 또 한 번 대중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이은주는 2005년 2월 만24세라는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결국 <주홍글씨>는 그녀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어느덧 이은주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차가운 도시미녀의 이미지와 따뜻한 감성을 두루 갖춘 젊은 배우는 여전히 흔치 않다. 어린 나이에도 독보적인 아우라를 발산하던 배우 이은주를 그리워하는 대중들이 여전히 많은 이유다.

죽음도 갈라놓지 못했던 인우와 태희의 사랑
 
 우산과 비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을 확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산과 비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두 주인공의 사랑을 확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늑대의 유혹>에서 강동원이 이청아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여성 관객들의 마음 속을 흔든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남성관객들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는 없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서인우(이병헌 분)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는 인태희(이은주 분)가 있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남성관객들을 무장해제시켰던 <번지점프를 하다>의 설레는 오프닝 장면이다.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는 죽음도 갈라놓지 못하는 인우와 태희의 '영원한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태희를 보고 첫 눈에 반한 인우는 조소과 강의에 들어가며 태희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제가 태희씨한테 마법 걸었거든요. 물건 쥘 때 새끼 손가락 펴라고요"라는 작업 멘트를 던진다. 사실 유치하기 짝이 없어 보이지만 인우를 연기한 이병헌은 '성공적으로 로맨틱한' 남자이기에 인우의 마법은 먹혀 들고 인우와 태희는 그렇게 사랑에 빠진다.

영화의 후반부는 태희가 세상을 떠난 후 교사가 된 인우와 제자 임현빈(여현수 분)이 갈등하고 재회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 현빈의 담임 선생님이 된 인우는 현빈에게서 태희의 흔적을 발견하고 혼란스러워한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그런 인우를 동성애자로 취급하고 현빈 역시 인우를 알아보지 못한다. 결국 인우는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고 뒤늦게 인우의 존재를 깨닫게 된 현빈은 17년 만에 두 사람이 만나기로 했던 용산역으로 찾아간다.

<번지점프를 하다> 최고의 장면은 역시 인우와 현빈이 뉴질랜드에서 줄 없이 번지점프를 하는 라스트씬이다. 남자 둘이 마주보며 그윽한 미소를 짓는 모습을 보면 전형적인 동성애 영화 같지만 현빈은 남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태희'였다. 그리고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이병헌의 내레이션과 함께 김연우의 <오,그대는 아름다운 여인>이 흐르며 영화의 여운을 이어준다.

<번지점프를 하다>는 배우들의 인상적인 연기 만큼이나 탄탄한 시나리오가 돋보였던 작품이다. 실제로 각본을 쓴 고은님 작가는 <번지점프를 하다>를 통해 대한민국 3대 영화제(대종상, 청룡 영화제, 백상예술대상)의 시나리오상을 모두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고은님 작가는 이후 영화 <아유레디>, 드라마 <첫사랑> <환생-NEXT>, <혼>, <장난스런 키스> 등의 각본을 썼지만 <번지점프를 하다>의 충격(?)을 대중들에게 다시 선사하진 못했다.

동성애 아닌 동성애 같은 연기를 한 여현수
 
 중간에 이병헌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홍수현(왼쪽)과 여현수는 예쁜 커플로 남았을 것이다.

중간에 이병헌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홍수현(왼쪽)과 여현수는 예쁜 커플로 남았을 것이다.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현빈은 '태희가 남자로 환생한 캐릭터'다. 하지만 현빈 역을 맡은 여현수는 185cm의 장신에 기골이 장대한 '상남자'에 가까운 배우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인지하기 전까지 여현수는 여느 고등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뒷자리에 앉은 키 크고 장난끼 많은 남학생처럼 현빈을 표현했다. 오히려 인우 역의 이병헌이 현빈 앞에서 흔들리고 눈물을 흘리는 등 여성스런(?) 연기를 펼친다.

2000년의 고교생 임현빈과 1983년의 여대생 인태희를 넘나드는 복잡한 캐릭터를 소화한 여현수는 2001년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며 일약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2002년에는 <남자, 태어나다>에서 정준, 홍경인과 함께 주연을 꿰차기도 했다. 하지만 비슷한 또래의 조인성, 김래원 등에 비해 활약이 미미했던 여현수는 2016년을 끝으로 배우 활동을 접고 현재는 재무설계사로 변신했다.

사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가장 불쌍한 캐릭터는 국어 선생님에게 남자친구를 빼앗긴 어혜주(홍수현 분)다. 화이트데이에 속옷을 선물하며 장난치는 현빈의 애정공세에 애써 싫은 척 내숭을 떨던 혜주는 현빈과 친하게 지낸다는 이유만으로 국어시간에 인우에게 국어책을 읽는다며 연기지적(?)을 당한다. 특히 현빈의 마음이 떠났음을 알게 되고 눈물을 흘리는 연기는 홍수현이라는 신인배우의 잠재력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번지점프를 하다>를 통해 주목을 받은 홍수현 역시 연기에 정체를 보이며 꽤 오랜 기간 배우로서 확실한 입지를 굳히지 못했다. 하지만 10여 년 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간 끝에 2011년 <공주의 남자>에서 비운의 왕녀 경혜 공주 역으로 주목을 받았고 2012년 <샐러리맨 초한지>에서도 차우희 역으로 매력을 뽐냈다. 현재는 드라마 <경찰수업>에서 경찰대학의 유도교수를 연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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