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2일 일요일 오후 (미국 현지시각) US 오픈 테니스 대회 남자부 단식 결승전을 지켜보기 위해 2만여 명이 넘는 구름관중이 뉴욕 아서 애쉬 스타디움에 운집했다. 세계 1위(노박 조코비치)와 세계 2위(다닐 메드베데프)간의 맞대결을 넘어 이 경기 결과에 따라 1969년 로드 레이버(호주) 이후 첫 캘린더 그랜드 슬램 (1년 안에 4대 메이저 대회 - 호주 오픈, 프랑스 오픈, 윔블던, US 오픈을 모두 석권) 달성의 위대한 순간이 탄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장에는 1969년 캘린더 그랜드슬램의 장본인인 로드 레이버 외에도 브래드 피트, 브래들리 쿠퍼, 벤 스틸러, 알렉 볼드윈, 라미 말렉, 스파이크 리 등의 헐리우드 스타 배우, 감독들과 마리아 샤라포바, 앤디 로딕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테니스 스타들도 직접 새로운 역사의 탄생을 관전하기 위해 아서 애쉬 스타디움을 찾았다.

새로운 역사는 탄생되었다. 하지만 아서 애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2만여 관중 대부분의 바람대로 캘린더 그랜드 슬램이 아닌 차세대 스타로 각광받는 메드베데프가 생애 첫 그랜드슬램 타이틀을 거머쥔 것이다. 예상을 뒤엎는 3-0 (6-4, 6-4, 6-4) 완승이었다.

이번 대회에서 조코비치는 3라운드 경기서부터 연속으로 1세트를 내주었지만 2세트부터 반전하여 경기를 역전했다. 이날 결승에서도 조코비치는 2세트 초반 메드베데프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 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러나 메드베데프는 긴 다리를 이용한 넓은 수비범위와 강력한 스트로크까지 장착하여 조코비치에게 역전의 틈을 내주지 않았다.

준결승에서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와 풀세트까지 치른 후 조코비치에게 회복의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2세트부터 반격이 충분히 가능했을 텐데 메드베데프는 이번 대회를 앞두고 작심하고 나온 모습이었다. 조코비치의 샷을 마치 AI 로봇처럼 예상하고 쉽사리 조코비치의 노림수에 말려들지 않았다.

적어도 이날 결승전에서만큼은 메드베데프는 2000년대 초반 초절정의 완벽한 전성기를 구사하던 로저 페더러(스위스)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였다. 3세트 메드베데프는 조코비치의 서브게임을 내리 브레이크하면서 5-2로 확실하게 승기를 잡았다. 

5-2로 앞서던 상황. 자신의 서브게임에서 메드베데프는 챔피언십 포인트까지 다가섰다. 그러나 조코비치의 캘린더 그랜드 슬램을 강력히 염원하던 팬들의 야유는 점점 더 커져갔고 메드베데프는 집중력을 잃으며 흔들리는 모습이었다. 결국 더블 폴트에서 샷 미스를 범하면서 조코비치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서브게임을 내주었다.

조코비치는 자신의 서브게임까지 따내면서 4-5로 바짝 추격하였다. 4-5로 추격한 후 맞이한 브레이크 타임에서 조코비치는 알 듯 말 듯한 오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거의 자신이 낭떠러지로 내몰렸는데 아서 애쉬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팬들의 멱살잡이에 가까운 하드캐리 덕분에 극적으로 생환한 상황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 듯싶었다.

메드베데프는 5-4로 앞선 상황에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챔피언십 포인트를 모두 삭제시키고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 메드베데프는 코트에 혓바닥을 내밀며 옆으로 드러눕는 퍼포먼스를 선보인다. 기쁨과 탈진의 기분을 모두 표현하는 퍼포먼스였다.

경기 종료 직후 조코비치는 새로운 승자 메드베데프에게 다가가 진심으로 축하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였고, 이에 메드베데프는 조코비치를 격하게 끌어안으면서 기쁨과 미안함이 교차되는 모습을 보였다.

시상식 인터뷰에서도 두 선수는 상대를 서로 치켜 세우면서 치열했던 승부에서 쌓인 감정의 골은 전혀 없었음을 증명하였다. 특히 메드베데프는 그동안 한 번도 주변사람들에게 얘기하지 않았는데 오늘에서야 얘기하게 된다면서 조코비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존경을 표했다.

조코비치는 북받친 감정을 잠시 억누르고 아서 애쉬 스타디움에서 열광적인 성원을 보내준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만약 조코비치가 우승했다면 캘린더 그랜드 슬램과 더불어 Big 3 로저 페더러(스위스), 라파엘 나달(스페인) 등과 동률인 그랜드 슬램 우승경쟁에서 21회 우승으로 한 발짝 앞서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은 조코비치에게 더 이상의 추월을 허용하지 않았다. 10년 넘게 남자 테니스를 지배한 Big 3에게 각각 20회의 그랜드슬램 우승이라는 경력이 동일하게 매겨지게 되었다. 조코비치는 캘린더 그랜드 슬램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프로선수 참가가 허용된 1968년 이후 오픈 시대에서 같은 해에 펼쳐진 4대 메이저 대회 중 첫 3개 대회를 우승한 세 번째 선수로서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그 전에 조코비치와 동일한 기록을 달성한 선수는 1984년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미국-체코), 2015년 세레나 윌리엄스 등이 있다.

1984년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프랑스오픈 우승 - 윔블던 우승 - US오픈 우승 - 호주오픈 4강 (당시에는 호주오픈이 매년 11월에 개최되었다. 1986년 대회를 건너 뛴 후 1987년부터 매년 1월에 개최되고 있다.)

2015년 세레나 윌리엄스: 호주오픈 우승 - 프랑스오픈 우승 - 윔블던 우승 - US오픈 4강

2021년 노박 조코비치: 호주오픈 우승 - 프랑스오픈 우승 - 윔블던 우승 - US오픈 준우승

만약 아쉬운 가정법이지만 조코비치가 도쿄올림픽에 참가하지 않고 처음부터 US오픈에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확실히 결승전에서 힘이 부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모든 스포츠에 만약은 존재하지 않는다. 둥근 공만큼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스포츠의 묘미이다.

메드베데프는 2000년 마라트 사핀 이후 러시아 남자 선수로는 두 번째로 US오픈 타이틀 홀더가 되었고, 메이저대회 통틀어서는 역시 2005년 호주오픈의 마라트 사핀 이후 16년 만에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다.

이번 US오픈을 통해 10년 이상을 지배해온 남자 테니스의 Big 3(페더러, 나달, 조코비치 - 나이 순)의 아성을 위협할 만한 새로운 신진세력들의 파워가 증명되었다. 우승자 다닐 메드베데프(러시아)를 비롯해 4강에서 조코비치와 대접전을 펼친 알렉산더 즈베레프(독일), 캐나다 선수로는 최초로 4강에 오른 펠릭스 오거 알리아심(캐나다), 10대 돌풍을 일으킨 카를로스 알카라즈(스페인), 3라운드에서 조코비치와 대등한 접전을 펼친 젠슨 브룩스비(미국) 등이 새로운 활약을 예고하였다.

내년도 호주오픈에 페더러, 나달, 조코비치가 모두 참가하고 새로운 라이징 스타들과 맞붙어서 어떤 결과를 일궈낼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남자 테니스 세력 구도에 서서히 변화의 조짐이 불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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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티스토리 블로그 베남의 dailybb에도 실립니다.
테니스 US오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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