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연출한 양영희 감독.

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연출한 양영희 감독. ⓒ Emi Naito

 
올해로 13회를 맞이한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의 개막작이 좀 특별하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의 현실을 직시하며 평화와 소통, 생명의 가치를 구현한다는 기치에 비춰볼 때 양영희 감독의 <수프와 이데올로기>만큼 잘 어울렸던 작품이 또 있었을까. 재일조선인으로 살며 가족의 삶을 오롯이 담아온 양 감독은 이번 작품으로 "의도치 않았지만 가족 다큐 3부작이 돼 버렸다"고 운을 뗐다.

1996년 <흔들리는 마음>을 시작으로 재일조선인의 혼란스러운 정체성에 주목한 양영희 감독은 <디어 평양>(2005)과 <굿바이, 평양>(2009)으로 제주 출신 재일조선인이며 조총련 활동가로 여생을 바친 아버지, 그리고 북한 지도부를 위해 가족과 생이별하며 북한으로 떠나야 했던 양 감독의 형제 이야기를 담아냈다. 해당 작품들은 베를린영화제 등 유수의 해외 영화제에서 인정받아왔지만, 유독 한국에서만큼은 정치적 이데올로기 등을 이유로 제대로 평가받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양영희 감독 어머니에 대한 영화다. 스스로 아나키스트라 칭하며 남한과 북한의 정치 이념을 한쪽에 접어두고 살았지만, 왜 대체 어머니가 남한을 그토록 미워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감독은 고백했다. "제주 4·3 때 말이야. 나도 거기에 있었어"라던 어머니의 외마디에 충격을 받았고, 그제야 그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는 양 감독의 어머니가 치매를 앓기 직전인 2010년부터 2018년 무렵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었다.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인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인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어머니의 오랜 침묵

부모를 따라 제주로 피란을 왔던 양 감독의 어머니 강정희씨는 정착한 지 3년 만에 4·3을 겪었고, 외가 친척과 약혼자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어린 동생들을 등에 업고 손을 끌면서 겨우 오사카행 밀항선에 몸을 실었다. 영화는 그런 양 감독 어머니의 역사를 발판 삼고 있다. 한 가족의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한국의 현대사와 아주 밀접하게 맞물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부모님이 남한 출신이고, 아버지도 술만 드시면 제주도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어머니는 왜 그렇게 한국을 거절했는지 계속 궁금했다. 머리가 아닌 마음 깊이 싫어하는 반응이었다. 한국 방송도 안 보시고. 그 이유를 말씀해주시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남은 삶을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 어떤 이론 때문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닌 자기 가족과 약혼자가 학살당하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태어난 어머니가 미국의 공습을 피해 제주에 자리 잡았고, 비록 가난한 섬이지만 사람들이 아주 좋고 첫사랑도 경험했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런데 끔찍한 경험의 섬이 된 것이지.

남한을 알려고 하지 않고 거절만 하는 어머니를 오랜 시간 무식하다고 생각했다. 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북한만 바라보나. 게다가 당신의 아들들을 북한의 요청으로 북한으로 보내기까지 했는데 말이다. 당시 조총련에서 김일성 환갑 때 재일조선인 청년을 선물처럼 보내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어머니는 내 오빠들을 보내면서 그게 영예롭고 자부심이 있다고 했는데 몸이 안 좋아지면서 솔직해진 거다. 그렇게 제주 얘길 하지 말라고 하셨던 분이 말이다. 그 얘길 들으며 많이 울었다. 부모님을 무식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무식했던 거지.

어머니의 자기 고백 이후에도 양 감독은 쉽사리 4·3을 다뤄야겠다는 생각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그간 감독이 다뤄왔던 북송 문제만 해도 거대한 주제였는데 제주 4·3까지 다루려 하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남편의 죽음 이후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어머니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고, 감독은 카메라를 들었다. 

감독의 눈물

가족 이야기를 이어서 한다는 게 감독 입장에선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에 살고 있는 오빠들과 가족의 안전도 마음에 계속 걸렸고, 일본 사회 내에서 조총련 구성원들의 시선 또한 달갑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디어 평양> 이후 양영희 감독은 북한으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해, 친척들과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내 가족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가) 아주 부담이지. 그동안 사회나 국가를 위한다기보단 뚝심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근데 내 어머니나 내 남편의 일상에선 이런 영화로 부담을 줄 수 있다. 남편이 프리랜서 기자다. 조선 사람과 결혼한 게 알려지면서 일할 기회가 적어지면 어쩌나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결혼 전에 충분히 설명했고 이해를 구했다. 이 영화로 남편과 싸울 수도 있고, 심하게는 이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영화는 해야 했다. 참 뻔뻔스럽고 잔인하지.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최대한의 경의를 갖고 윤리적으로 솔직하게 만들려고 했다. 

<디어 평양> 때는 어머니가 가족 영화 찍는 걸 반대했다. 조총련에서 사죄문을 쓰라고도 했다. 내 가족 이야기는 우리가 결정하는 건데 사죄문이라니. 그리고 그 영화로 북한에서 내 가족을 못 만나게 한 거는 아주 비겁한 거다. 날 비판하면 되는 건데 말이다. 어머니는 날 걱정해서 말린 거였지만 우리 가족 중 한 사람쯤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지 않나, 나 혼자라도 하겠다 말했다. 어머니는 걱정하면서도 내심 응원하셨던 것 같다. 아마 마음이 많이 복잡하셨을 것이다.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인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인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4·3으로 한국을 등진 이후 강정희씨는 문재인 정권 초기 제주에서 진행된 추모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미 치매가 많이 진행돼 기억을 제대로 나눌 수 없는 상태였다. 영화에선 그런 어머니와 함께 추모식에 참석했다가 꺽꺽 우는 양영희 감독의 모습이 나온다. "이렇게 잔인한 역사를 왜 이리 오랜 시간 금기시했고, 시체도 못찾게 했을까. 사람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 너무 끔찍해서 많이 울었다"고 양 감독은 말했다.
 
어머니 나이 18살이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가족과 이웃이 불에 타는 걸 목격했고, 검열을 피해 제주를 떠나 잘 살아남으셨다. 그 덕에 제가 태어난 것이지. 대단한 18세 처녀였다. 제주도 하면 아름답고,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으로만 생각했는데 제주의 아픔을 느끼게 됐다. 참 신기한 건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 슬픔과 아픔을 안 이후인 지금의 제주가 더 가깝게 느껴진다.

국가에게 상처 입은 감독의 어머니가 평생 남한을 부정하고 북한을 이상향처럼 생각했던 것, 건강이 악화되면서 상처를 꺼낸 것을 두고 양영희 감독은 "어머니는 평생 진정한 조국을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면서 "제주 4·3을 알게 된 이후 그곳이 가깝게 느껴지는 나 또한 어머니처럼 고향이나 조국을 찾아 헤맸던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그간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로 정의하곤 했던 것도 "하도 북한을 택하라고 강요받은 것에 대한 반항심 때문"이라며 양영희 감독은 "북한은 살아보지 않았지만 살고 싶지 않은 체제이고, 일본은 내가 태어난 곳이지만 심한 차별을 받아왔기에 고향이라는 감각을 갖기 쉽지 않다"고 덧붙였다.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인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제13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개막작인 <수프와 이데올로기>의 한 장면. ⓒ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새로운 가족이라는 희망을 품다

무엇보다 이번 영화가 그간 양 감독의 작품과 다른 지점은 가족의 확장 내지는 새로운 화해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점이다. 오십 대가 되어서 만난 지금의 남편은 일본인이지만 그 누구보다 감독의 어머니를 깊게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영화엔 어머니가 끓인 삼계탕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어머니에게 불의한 일이 있을 때 적극 나서서 항변하는 남편의 모습도 꽤 자세하게 담겨 있다. 영화 제목도 바로 이 대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제목은 불쑥 생각났다. 요리 장면을 사실 꽤 많이 찍었다. 어머니가 삼계탕은 물론이고 곰탕도 자주 끓였고, 나도 어머니에게 호박 수프를 해드리기도 했다. 평소에 국물을 먹어야 한다고 어머니가 자주 말했거든. 남편이 그걸 또 아주 좋아했다. 미각이 아주 한국 사람이다(웃음). 김치와 마늘 없이 못 산다.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영화를 이번에 하고 싶었다. 4.3뿐만이 아닌 엄마와 딸, 그리고 새로운 가족이 함께하는 이야기잖나. 가족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독신이라 해도 부모가 있고, 멀리 떨어져 못 만나거나 이미 사망했다고 해도 가족은 가족이다. 서로 미완성이고 부족한 존재가 모인 게 가족이다. 서로의 상처를 감추지 않고, 함께 밥을 같이 먹으며 공존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절대 일본 사람과 결혼은 안 된다고 했는데 남편을 반갑게 맞이했다. 지금의 남편은 4.3 관련 책을 하도 읽어서 강의도 할 수 있을 정도다. 나보다 훨씬 공감과 공존의 힘이 있는 사람이다.

첫 다큐 이후 26년이 흘렀다. 양영희 감독은 "하나의 숙제가 끝난 느낌"이라면서 "이후 작품은 아마 극영화가 될 것이다. 이번처럼 10년이 걸리면 안 되고 속도를 올려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프리랜서 미디어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일본 최대 다큐 영화제인 야마가타에서 여러 사람들의 휴먼 다큐를 본 후 다큐 영화 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한 지 벌써 30년이 되어 간다. "영화제에 가보니 어느 사람이 가장 이상하고, 어느 가족이 가장 독특한가 경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우리 가족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며 양 감독은 초심의 일부를 전했다.
 
물론 영화하면서 너무 힘들고 고민이 와 우울증이 온 시기도 있었다.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한때는 내가 왜 이런 가족에서 태어났고, 이런 작품을 하고 싶어하는지 지쳤던 때가 있었다. 그럼에도 한 작품은 더 하고 죽어야겠더라. 미련이 있는 거지. 고맙게도 주변 친구들이 많이 도와줬다. 쌀과 야채를 가져다 주는 이들도 있었다. 오랜 시간 전기세, 가스값 걱정하며 살았다. 이번 영화에 그 모습이 일부 나온다. 다큐라는 게 대상의 옷을 벗기는 일인데 그러려면 나도 솔직해져야겠지. 창피하지만 가족의 옷을 벗긴 만큼 내 마음의 옷도 벗고 싶었다. 

이 작품이 나오고 난 후 일본에서 살며 차마 4.3에 대해 말하지 못했던 분들이 하나 둘 고백하고 있다. 한 유명 배우도 엄마가 북한에 살고 있고 본인이 계속 돈을 보내고 있다고 하더라. 이런 영화가 더 많이 나와서 다들 얘길 나눴으면 좋겠다. DMZ 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돼서 너무 감사하다. 영화를 만들 때 일본 사람을 생각하면서도 한국 관객도 늘 생각한다. 해외 많은 관객분들도 내 어머니의 개인적 이야기로 함께 가족과 국가의 관계를 생각할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
양영희 수프와 이데올로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북한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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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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