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 18번째를 맞은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 8월 23일부터 29일까지 “일상의 특별함을 담다”라는 주제로 전 세계 29개국의 64편의 다큐멘터리를 상영했습니다.[편집자말]
 
"엄마, 저 방학 동안 영어학원 끊을래요.",
"아니, 왜? 선생님도 좋으시고, 기말 성적도 잘 나왔잖아."
"방학은 좀 쉬고 싶어요." 

학원 덕인지 영어에 자신감이 붙길래 이참에 수학도 권해볼까 혼자 머리 굴리던 참인데, 잘 다니던 영어를 끊겠다니 맥이 빠졌다. 몇 번 더 가라, 안 간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딸은 제 뜻대로 학원을 끊고 방학 동안 정말 푹 쉬었다.

사실 쉬고 싶다는 딸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었다. 대입 수시를 노리는 고2 딸은 알찬 생활기록부(생기부) 기록을 위해 정신없이 살았다. 캠페인이다, 축제 준비다 학생회 활동으로 늦은 귀가가 다반사였고, 인터뷰와 기사 작성, 편집까지 신문제작을 하느라 내내 분주했다. 교내의 각종 대회 또한 소홀히 할 수가 없어 틈틈이 대회 준비에도 열을 올렸다. 제 능력치보다 초과 발휘하느라 기진맥진 살아온 게 사실이다. 
 
   서릿발같은 경쟁 속에서 아이는 오늘도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서릿발같은 경쟁 속에서 아이는 오늘도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 Unsplash

 
체력이 뚝 뚝 떨어지는 게 보였다. 갑자기 흰머리가 늘어나고, 팔뚝에 아토피 증상이 올라왔으며, 스트레스 푼다고 찾는 자극적인 음식들 덕에 체중은 증가하고 있었다. 신체적 증상들도 걱정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마음 아팠던 건, 친구의 부재에서 오는 정신적 피폐였다. 이상하게 고등학교에서는 마음 터놓을 친구를 찾기 어려워했다. 거리두기로 등교를 띄엄띄엄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근본적으로는 입시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행 평가나 중간, 기말시험 점수 0.5점, 0.3점 차이로 등급이 갈리는 살벌한 경쟁 속에서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까칠했다. 서로 견제와 시기, 자기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하다. 톡으로 오가는 대화들도 공부 많이 했느냐고 떠보고, 뭔가 학업적인 걸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둘러대는 게 보이는 영혼 없는 기계적인 대화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우리 애만의 문제가 아닌 듯하다. 친구 사귀기가 어렵다는 아이 동창들의 비슷한 이야기들이 자주 들리니 말이다. 

마음이 여린 딸은 온기 없는 말들이 내뿜는 냉기 속에서 버티고 버티다 괴로워하며 우는 날이 많았다. 엄마로서 지켜보기 매우 안쓰러웠다. 서릿발 같은 경쟁만 남아있는 공간에서 과연 진정한 배움이 일어나기나 하는지, 그렇게 힘들게 챙긴 성적과 생기부가, 딸의 심리적 피폐함과 사람에 대한 부정적·회의적 시각을 언젠가 회복해 줄 수는 있을지, 답답한 마음으로 답 없는 질문만 속으로 되뇔 뿐이다. 

학생들의 입시 다룬 '아이비리그 캐슬'

진로·진학을 놓고 힘든 시기를 보내는 부모-자녀는 당연히 나와 우리나라에만 한정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마침 지난 8월 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EBS 국제 다큐영화제에서 <아이비리그 캐슬>이라는 다큐 영화를 통해 다른 나라의 학생들과 부모들은 어떻게 입시를 치러내는지 그 일면을 엿볼 수 있었다. 궁금했다. 그곳도 분명 입시 압박감과 극한의 경쟁에 내몰린 학생들이 있을 텐데 그들은 어떻게 입시를 치러내고 있는지 말이다.

영화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로웰 고등학교의 대여섯 명 학생들을 인터뷰하는 방식으로, 입시를 치러내는 그들의 마지막 학년을 시간 순서대로 풀어주고 있었다. 로웰 고등학교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모이는 곳으로 유명한데, 동양인 학생수가 과반이 넘는다고 한다. 게다가 엄격하게 자식 교육을 시킨다는 동양계 타이거 맘(기자주 : '호랑이처럼 자녀를 엄격히 관리하는 엄마'를 말한다)들의 센터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역시나 엄마의 주도적인 진두지휘로 입시를 치르고 있는 대만계 미국인 앨번이 대번 눈에 띄었다.   
 
    학구열이 높다는 샌프란시스코의 공립 로웰고등학교 학생들

학구열이 높다는 샌프란시스코의 공립 로웰고등학교 학생들 ⓒ EBS 국제다큐영화제 <아이비리그 캐슬>

 
앨번은 어느 대학에 원서를 넣을지, 원서를 몇 개나 쓸지에 관해 엄마의 조언에 의지하면서도, 과한 참견과 의사결정을 독점하려는 엄마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앨번에게는 입시도 스트레스지만,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엄마에 대한 불만이 더 큰 문제처럼 보였다. 이 두 모자가 앞으로도 잘 지낼 수 있으려나 걱정이 되면서 3년 전, 잠시 미국에 살 때 어덜트 스쿨에서 만났던 대만인 수잔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수잔 아주머니는 아들을 어려서부터 쉴 새 없이 채근하고 엄격하게 공부를 시켰다. 덕분인지 아들은 학창 시절 내내 우등생이었고, 당연히 일류 명문대로 진학했다. 또한 졸업 후 높은 연봉으로 구글에 입사해서 엄마를 한껏 기쁘게 했다. 그런데, 자랑스럽던 그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돌변했다. 부모에게 말도 없이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고, 구글을 그만두었으며,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아들의 선언 이후, 수잔 아주머니는 큰 충격과 괴로움에 휩싸였고, 우울함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아들은 왜 갑자기 이해 안 되는 행동과 주장을 하기 시작했을까? 어린 아들을 다그치던 젊은 수잔은 이런 미래를 상상이나 했을까? 과연, 어디서부터 수잔 아주머니와 아들의 관계가 잘못되었을까? 나는 내 아이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며 살고 싶은지 두고두고 생각해보게 됐다.  

앨번처럼 같은 동양계지만, 이안의 엄마는 좀 달랐다. 입시보다는 이안이 즐거워하는 정치 풍자 취미 활동을 지지해주며, 유명 대학이 아니더라도 이안이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안은, 유명대학은 아니지만, 전액 장학금으로 1년 후 애모리 대학에 편입이 보장되는 단기대학에 원서를 넣고 합격한다. 자신의 진로를 포기하지 않고 엄마와 상담가의 조언을 수용하여 최선의 합리적 선택을 하는 것 같았다. 

레이첼도 흑인 싱글 엄마의 열성적인 지지와 협력 아래 입시를 치르고 있었다. 레이첼 엄마는 부족한 성적에 따끔한 질책을 하기도 하지만, 요구하고 명령만 하는 건 아니었다. 따뜻한 말로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며 자립적인 성인이 되는 게 중요한 일이라고 자주 당부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레이첼은 그런 엄마의 전적인 지지와 기대를 토대로 좀 더 높은 목표를 향해 도전하고 있었다. 

한편, 전혀 부모의 도움 없이 입시를 잘 치러낸 학생들도 있었다. 다재다능한 중국계 미국인 소피아와 심화과정인 AP 수업을 듣는 셰이라는 11학년 백인 학생이 그랬다. 특히, 무책임하고 자신을 방치하는 아빠와 함께 사는 셰이는, 스스로 집안일을 하면서도 꿋꿋이 환경문제 해결에 기여하고 싶다는 자신의 꿈을 위해 학업에 열중하였고, 결국 놀랍게도 스탠퍼드에 합격한다. 
 
    영화<아이비리그 캐슬> 자료화면

영화<아이비리그 캐슬> 자료화면 ⓒ EBS 국제다큐영화제 <아이비리그 캐슬>

 
미국에서도 입시 환경 속에서 부모-자녀가 마음고생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점은 비슷했다. 치열한 입시 압박 속에서 가족별로 조금씩 다른 대응을 하며 입시를 치러내고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과하게 아들을 걱정하는 앨번 엄마의 경우와 부모의 특별한 도움 없이도 스스로 헤쳐나가는 소피아와 셰이를 보며, 부모의 적정한 역할과 부모-자녀의 균형을 이루는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입시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 중의 한 단계이다. 좋은 대학, 유명한 대학에 가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 과정에서 자녀가 부모에 대한 애정과 신뢰를 잃게 되고, 친밀감을 나눌 친구들을 점점 찾을 수가 없게 된다면, 그런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기필코 달성해야 하는 목표인지 의심해 봐야 할 것 같다. 

좋은 교육을 위해 학생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덴마크 교사, 메테 페테르센은 <삶을 위한 수업>에서 이렇게 말한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가 아니에요. 우리는 아주 다양한 길을 통해 좋은 인생을 살아갈 수 있어요.

숨 쉴 틈 없이 몰아대는 고등학교 생활에서 이런 철학을 견지하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어려운 일인지 다시금 절감한다.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