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길목에서 만난 전현직 대한민국 감독 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 A조 1차전 대한민국과 이라크의 경기. 한국의 파울루 벤투 감독(오른쪽)과 이라크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 월드컵 길목에서 만난 전현직 대한민국 감독 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최종예선 A조 1차전 대한민국과 이라크의 경기. 한국의 파울루 벤투 감독(오른쪽)과 이라크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축구가 가장 원하지 않았던, 그리고 사실은 예상 가능했던 시나리오가 결국 현실이 됐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피파랭킹 36위)은 2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이라크와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1차전에서 0-0으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행을 노리는 벤투호는 이라크를 포함해 이란, 아랍에미리트(UAE), 시리아, 레바논 등 전원 중동팀과 한 조에 속했다. 최종예선 후반으로 갈수록 부담스러운 중동 원정을 계속해서 치러야하는 만큼 일단 홈에서는 확실하게 승점 3점을 따내는 게 중요했다. 한국은 손흥민-황의조-김민재 유럽파를 포함한 최정예 전력을 모두 가동했다.

하지만 벤투호는 국제축구연맹 랭킹 70위의 이라크를 상대로 홈 첫 경기에서부터 기대 이하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간신히 승점 1점을 따내는 데 그쳤다. 2006 독일월드컵에서 한국축구대표팀을 이끌었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라크는 견고한 선수비 후역습 전술로 한국의 공격을 번번이 무력화시켰다. 이로서 이라크와의 역대 전적은 7승 12무 2패가 됐다.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사실상 한국의 판정패나 마찬가지였다. 양팀 모두 가장 자신있는 카드를 꺼내들었고 상대가 무엇을 할지도 서로 잘 알고 있었던 경기였다. 한국은 이날 경기에서 볼점유율이 무려 68% 가까이 이르렀고, 15개의 슈팅을 시도했지만 단 한 개도 골망을 가르지 못했다. 벤투 감독의 실속없는 점유율과 빌드업 축구로는 아드보카트의 밀집수비 전략을 알고서도 제대로 공략할 수 없다는 사실만 또 한번 확인했다.

벤투 감독은 이른바 빌드업으로 대표되는 공격 전개에서의 짜임새있는 연계 과정을 강조한다. 그런데 벤투식 빌드업의 문제는 애초부터 점유율에 연연하지 않고 뒤로 물러서서 지키는 상대에게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벤투호는 지난 2019 아시안컵과 월드컵 2차예선에서도 선수비 후역습에 치중하는 비슷한 스타일의 중동팀들에게 여러 차례 골탕을 먹은 바 있다. 이라크도 이런 전략으로 나올 것임은 충분히 예측했지만 이번에도 벤투호는 대안을 보여주지 못했다.

높은 점유율 때문에 겉보기에 한국이 경기를 주도한 것 같지만 전진패스보다는 후방에서 의미없이 볼을 돌리는 횡패스의 비중이 훨씬 높았고, 상대의 허를 찌르는 예리하고 창의적인 패스나 속도감있는 플레이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이라크는 페널티지역에서 촘촘한 대형을 유지하며 한국이 편하게 슈팅할 수 있는 공간을 거의 허용하지 않았고, 이럴 때 시원한 중거리 슈팅을 시도한다거나, 피지컬과 제공권을 바탕으로 롱볼을 올려서 경합을 시키는 뻥축구조차도 없었다.

물론 촉박한 일정으로 손흥민 등 믿었던 유럽파 선수들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손발을 맞출 시간이 짧았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충분한 핑계거리가 되기는 어렵다. 해외파 선수들의 컨디션 관리 문제는 월드컵 일정이 나올 때부터 대비했어야 하는 문제였고, 벤투 감독은 한국축구의 지휘봉을 잡은 지 무려 3년이 넘는 최장수 감독이다. 본인이 가장 자신있다는 플랜A의 완성도조차 물음표가 붙은 상황에서, 플랜B는 아예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던 벤투호의 무모함이야말로 이라크전 결과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벤투 감독은 인터뷰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을 제대로 못 한 경기다. 볼 순환을 빠르게 하고 공간을 침투하는 것, 수비 진영으로 내려와 볼을 받아줬어야 했다.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경기를 진행하지 못한 책임은 감독에게 있다"라며 졸전의 원인을 분석했다. 빌드업 축구에 기반한 경기 전략이 또 실패했음을 시인한 셈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만 인정'했을 뿐, 앞으로 어떻게 나아지겠다는 반성이나 대안은 찾을 수 없었다. '감독의 책임'을 언급했지만 정작 자신의 빌드업 축구가 왜 안 통하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성찰했다면 그에 따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벤투는 '이번엔 잘 안됐지만 다음 번엔 같은 방식으로 더 잘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다.

벤투의 행보를 보면서 자꾸만 울리 슈틸리케(독일)의 기시감이 떠오르는 것을 피할수 없다. 슈틸리케는 벤투가 등장하기 이전에 한국축구 최장수 감독이었고, 비슷한 점유율 축구를 추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슈틸리케 역시 세밀한 부분전술과 맞춤형 대응의 부재, 선수장악력의 문제점을 드러내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슈틸리케호는 최종예선에서 이란, 카타르, 시리아 등 중동팀들에게 부진을 거듭하다가 결국 2경기를 남겨두고 경질당했고, 구원투수인 신태용 감독이 월드컵 본선행을 간신히 마무리지은 바 있다.

이런 슈틸리케 감독도 한때는 '갓틸리케'라고 불리우던 시절이 있었다. 부임 이후 첫 대회이던 2015년 아시안컵에서 한국을 결승까지 이끌며 준우승을 차지했고, 러시아월드컵 2차예선에서는 비록 약팀들을 상대했지만 무실점 전승 행진을 기록하며 한때 70%(39전 27승 5무 7패로 승률이 69%)대에 육박하는 승률 고공행진을 이어가기도 했다.

하지만 벤투 감독은 현재까지 모든 면에서 흑역사가 되어버린 슈틸리케보다도 훨씬 못하고 있다. 2019 아시안컵에서는 카타르에 일격을 당해 8강에서 탈락했고, 월드컵 2차예선에서 원정경기마다 약팀들에게 고전을 면치못하며 승점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친선전이었지만 라이벌 일본에게 0-3으로 완패한 '요코하마 참사'도 있었다.

또한 슈틸리케는 최종예선에서 몰락했다고 하지만 원정에서 고전했을 뿐, 그래도 중국과의 1차전(3-2 승)을 비롯하여 카타르(3-2)-우즈벡(2-1)까지 최소한 홈경기는 '꾸역승'이라도 모두 이겼다. 그런데 벤투는 홈 첫 경기에서 이라크에 발목을 잡히며 가뜩이나 험난한 대진운에 벌써부터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당시 슈틸리케 감독을 향한 여론이 악화된 것은 패배의 책임을 선수나 외부 탓으로 돌리고 자신을 향한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독선적 태도에 있었다. 벤투 감독은 슈틸리케에 비하면 미디어 노출을 최소화한 탓에 불필요한 언행으로 인한 설화나 급격한 이미지 추락이 적었다.

대표팀 감독은 자신이 어떤 축구철학과 비전을 가지고 팀을 운영하는지, 어떤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선수를 선발하는지, 솔직하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벤투 감독은 지난 3년간 일방적이고 권위적인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따라만와)' 스타일을 고수해왔다.

벤투 감독은 '한국축구가 자신이 추구하는 패스와 점유율 축구에 잘 맞는다'고 주장하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나 논리를 제시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동안 손흥민같은 핵심선수의 '혹사 논란'이나 특정선수-특정팀에 편중된 선수선발-K리그와의 소통 등에 있어서도 "팀에 필요한 선수이고 절차대로 뽑았다"는 형식적인 대답만 있을 뿐 그 결정의 당위성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 같은 문제에 비판이 거듭되면 마지못해 수용하고 부분적이나마 개선하려는 모습이라도 보였던 슈틸리케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다.

한국축구는 벤투가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고유의 전통과 스타일을 가지고 월드컵 본선무대에도 꾸준히 진출해온 팀이다. 한국축구 대표팀은 벤투 감독 개인의 신념이나 축구철학을 증명하기 위한 실험장이 아니다.

이런 벤투 감독을 적절히 통제하고 관리해야 할 축구협회는 4년 전 슈틸리케의 악몽을 겪어놓고도 벤투호의 문제점을 그대로 방치하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외국인 감독을 영입한 것은 이런 모습을 기대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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