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밤부터 SBS에서 시작한 판타지 사극 <홍천기>는 출생 당시 마왕의 저주를 받아 눈이 멀게 된 화가 홍천기(김유정 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홍천기는 가상의 국가인 단 왕조가 상왕(전국환 분)의 어진을 그린 뒤 마왕을 봉인하는 의식을 거행할 때 그 어진을 그렸던 화가 홍은오(최광일 분)의 딸이다.
 
마왕은 자기를 퇴치하려는 의식에 분노해 참석자들을 저주했고, 이 저주의 영향을 받은 홍천기는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청력에 더욱 의존할 수밖에 없는 홍천기가 화가의 길을 걷게 되는 이야기가 이 드라마에서 펼쳐진다.

<용재총화>에 등장하는 홍천기
 
 SBS 드라마 <홍천기>.

SBS 드라마 <홍천기>. ⓒ SBS

 
홍천기(洪天起)라는 이름은 학자 겸 관료인 성현(1439~1504년)의 <용재총화>에 등장한다. 세종시대부터 연산군시대까지 생존했던 성현은 고려시대부터 성종(연산군 아버지)까지의 문화 현상들을 이 책에 담았다.
 
성현은 <용재총화> 제1권에서 "사물의 형상을 묘사하는 일은 하늘의 재주를 얻지 않고는 정통할 수 없다"며 "한 가지 사물에 정통한다 해도 여러 사물에 정통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화가가 한 가지 분야를 잘 그리는 것도 어렵지만 여러 가지를 다 잘 그리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말을 한 뒤 "우리나라에는 명성 있는 화사(畵史, 화가)가 희소하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본조(本朝, 우리나라)에 이르러 고인(顧仁)이란 이가 있었으니 중국에서 왔다"며 "인물을 잘 그렸다"고 한 뒤 안견·최경과 더불어 홍천기·최저·안귀생 등을 거론한다. 홍천기 이하의 세 화가를 따로 묶어 언급한 것은 드라마 <홍천기> 때문이 아니라 <용재총화>가 안견·최경과 홍천기·최저·안귀생을 각각 별도로 묶었기 때문이다.
 
성현은 <몽유도원도>를 그린 안견 외 1인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모두 신묘(의 경지)에 들어갔다"고 극찬했다. 그에 비해 홍천기 외 2인을 거론할 때는 '기타'라는 한자어를 써가며 "그 외에(其他) 홍천기·최저·안귀생 부류는 비록 산수화에서 명성이 나기는 했지만 모두 다 용품(庸品)이었다"고 평가한다. '고용하다, 어리석다, 보통이다' 등을 뜻하는 용(庸)을 써서 기타 화가들의 재주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한 것이다.
 
드라마 <홍천기> 제1회는 화가 홍천기가 마왕의 저주를 받기는 했지만 우주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신령한 존재라고 설정했다. 하지만 성현은 그를 안견·최경 같은 입신묘(入神妙)의 화가로 평가하지 않고 용품 수준의 화가로 낮춰 평가했다.
 
하지만 이것은 성현이 홍천기의 그림을 하찮게 여겼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성현이 글 서두에서 "우리나라에는 명성 있는 화사가 희소하다"고 말한 것은 화가들에 대한 그의 평가가 상당히 인색했음을 알려준다. 그처럼 인색하기 그지없는 평론가의 글에 등장한 것 자체가 홍천기의 실력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성현의 글은 홍천기의 명성과 더불어, 간접적이나마 홍천기의 생존 시점을 알려준다. 그의 생몰 연도를 알려주는 문헌은 확인되지 않지만, <용재총화>가 조선 성종시대까지를 다룬 것과 "본조에 이르러"라는 문장 뒤에 홍천기가 언급된 것을 보면, 그가 1392년 조선 건국 이후부터 100년 이내에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태조·정종·태종·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중의 어느 시기에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성현은 같은 책 제6권에서는 전혀 다른 사연을 소개로 기타 화가를 다룬다. 이번에는 홍천기의 그림이 아닌 얼굴을 소재로 이야기를 꺼낸다.

'일시무쌍'한 홍천기의 외모
 
 SBS 드라마 <홍천기>.

SBS 드라마 <홍천기>. ⓒ SBS

 
제1권에서 홍천기의 그림을 '용품'으로 평가한 성현은 제6권에서는 그 외모를 일시무쌍(一時無雙)으로 소개한다. "화사 홍천기라는 여자는 얼굴 용모가 일시무쌍이었다"고 서술한다. 홍천기와 쌍벽을 이룰 만한 외모가 같은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선비들은 웬만해서는 남의 얼굴을 평가하지 않았다. 외모를 운운하는 것은 선비의 위신을 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성리학자의 자질을 의심케 만들 수도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철학적 이치를 탐구하는 성리학자가 눈에 보이는 외모를 기준으로 인간을 평가한다면, '학문도 저런 식으로 하는가 보다'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성현 역시 그런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 역시 아무런 명분도 없이 여성의 외모를 운운할 수는 없었다. 그가 홍천기의 외모를 부득이 거론한 것은 사헌부에서 벌어진 에피소드를 소개할 목적에서였다.
 
<용재총화>에 따르면, 한번은 홍천기가 범법 행위에 연루돼 사헌부로 출석하게 됐다. 지금의 검찰청에 해당하는 이곳에서 홍천기는 관헌의 추국을 받았다. 그가 심문을 받던 시각에 젊은 유생 하나도 옆에서 추국을 받았다. 홍천기와 유생이 나란히 앉아 관헌의 질문에 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옆자리의 유생은 패거리로 어울려 다니며 활 쏘고 술 마시며 놀다가 체포된 상태였다. 정확히 어떤 죄목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기록만 놓고 보면 떼 지어 몰려다니며 소동을 피웠던 듯하다.
 
그런데 유생은 수사에 성실히 임하지 않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잠시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용재총화>는 말한다.
 
이 모습이 대사헌의 눈에 띄었다. 대사헌이 계속 주시하는데도 유생은 눈길을 돌릴 줄 몰랐다. 보다 못한 대사헌은 결국 이 상황에 끼어들게 되고 그는 유생을 귀가시킬 마음을 먹게 됐다. "유생이 무슨 죄가 있겠냐?"며 "속히 풀어주라"고 지시한 것이다. 
 
그런데 유생은 대사헌의 방면 지시가 하나도 고맙지 않았다. 사헌부 밖으로 나온 유생은 분통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사헌부를 나온 게 아니라, 사헌부에서 쫓겨나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유생은 친구들 앞에서 검찰의 '신속한 사건 처리'를 규탄했다. "무슨 공사(公事)가 이리도 바쁘고 급하단 말인가?"라며 "공사라면 모름지기 범인의 말을 묻고(訊犯人之言) 또 고소장도 받아보고 옳고 그름도 분별하면서 천천히 해야지 어찌 이리 급하게 하는 것인가?"라며 불평을 쏟아냈다.
 
스스로를 범인으로 부른 것을 보면 처벌받을 만한 일을 하기는 했던 모양이다. 그런 자신이 너무도 신속히 방면됐다며 그는 소란을 피워댔다.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유생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가 퍼졌기 때문에 <용재총화>에까지 실리게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재총화>는 "이는 필시 홍녀(洪女, 홍천기) 옆에 오래 있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며 "친구들이 그의 말을 듣고 이가 시릴 정도였다(齒冷)"고 말한다. 유생의 하소연이 배꼽 빠질 정도로 웃겼던 게 아니라 이가 시릴 정도로 웃겼던 것이다.
 
기록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홍천기는 <용재총화>에서 거론된 화가인 동시에 외모로도 당대의 주목을 받았다. 그런 홍천기를 SBS 드라마는 판타지 형식으로 묘사하게 된다. 전통적인 무속 신앙은 물론이고 정체불명의 신비 신앙까지 동원된 이 드라마에서 '일시무쌍의 용품 화가' 홍천기가 어떻게 묘사될지 주목된다.
홍천기 조선시대 화가 여성 화가 성현 용재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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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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