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병역제도에서 신체검사 1~3급을 받은 대한민국 국적의 남성은 현역병으로 입대해야 한다. 그리고 군복무를 마친 사람은 자동으로 예비군에 편성된다. 전역 후 1년 차부터 4년 차까지는 지정된 부대에 모여 합숙을 하며 훈련일정을 소화하는 '동원훈련'을 받고 5~6년 차들은 1년에 한 차례씩 8시간의 기본 훈련과 당/후반기 각 6시간의 작계훈련을 받는다(동원훈련은 없지만 사회복무요원들도 똑같이 예비군훈련을 받는다). 

따라서 병역의무를 마친 대한민국의 남성들은 모두 현재 예비군이거나 과거 예비군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비군들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베일에 싸여 있다. 가끔 뉴스로만 예비군들의 실태가 보도될 뿐 실제로 예비군이 어떤 훈련을 받고 그들이 실제 대한민국 전투력에 어떤 도움이 되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예비군 당사자들도 본인들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예비군들에 대해 알려진 게 많지 않다 보니 대중매체에 알려진 예비군에 대한 이야기도 극히 한정적이다. 기껏해야 예비군 훈련장에서 유명 연예인의 훈련 모습이 동료 예비군에 의해 사진이 찍혀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가거나 기사화되는 정도다. 그런데 지난 2002년 예비군이 주인공인 영화 한 편이 개봉했다. 지금은 <킹덤> 시리즈를 집필한 김은희 작가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장항준 감독의 장편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였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장항준 감독은 다른 작가의 시나리오로 장편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를 연출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장항준 감독은 다른 작가의 시나리오로 장편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를 연출했다. ⓒ 시네마 서비스

 
다른 작가 시나리오로 만든 장항준 감독의 데뷔작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내를 잘 만난 남자'로 불리고 스스로도 딱히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장항준 감독은 서울예대 연극과 졸업 후 방송국의 막내작가로 일했다. 대학동기 장진이 연극연출로 성공하는 것에 자극을 받은 장항준 감독은 1996년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의 각본을 쓰며 충무로에 입성했다(김은희 작가와는 1998년 결혼했는데 결혼 초기에는 프로 작가였던 장항준 감독이 '아마추어' 김은희 작가의 글을 지적했다고 한다).

1999년 <북경반점>의 시나리오를 쓴 장항준 감독은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감독 데뷔를 준비했지만 최종 무산됐다. 결국 장항준 감독은 2002년 <주유소 습격사건>과 <신라의 달밤> 각본을 쓰며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박정우 작가의 시나리오로 연출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를 만들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이 다른 작가의 시나리오로 연출 데뷔를 하는 게 자존심이 상할 법도 했지만 유연한 성격의 장항준 감독은 현실을 받아 들였다.

2002 월드컵이 막 끝난 2002년 7월에 개봉한 <라이터를 켜라>는 톰 크루즈의 <마이너리티 리포트>, 윌 스미스의 <맨인블랙2>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음에도 서울에서만 47만 관객을 동원하며 쏠쏠한 성적을 올렸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라이터를 켜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각자의 사정을 가진 주·조연배우들이 얽히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2000년대 초반 한국 코미디 영화의 수작으로 꼽힌다.

데뷔작 <라이터를 켜라>를 통해 코미디 영화 감독으로서 가능성을 보인 장항준 감독은 2003년 드디어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로 차기작 <불어라 봄바람>을 선보였다. 하지만 <불어라 봄바람>은 <오!브라더스>와 <조폭마누라2>에 밀려 전국 100만 관객을 넘기지 못했고 장항준 감독은 2011년 드라마 <싸인>을 연출할 때까지 7년이 넘는 공백을 가져야 했다(하지만 <싸인>에서도 장항준 감독보다는 김은희 작가가 더욱 주목 받았다). 

김은희 작가가 집필한 <유령> <시그널> 등이 연일 성공가도를 달리는 동안 장항준 감독은 '김은희의 남편'으로 살다가 2017년 <기억의 밤>을 연출하며 영화계에 복귀했다. 강하늘, 김무열 주연의 <기억의 밤>은 130만 관객으로 손익분기점을 돌파했고 장항준 감독은 오랜만에 자존심을 회복했다. 하지만 장항준 감독은 현재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와 유튜브 <편의점클라쓰e> 등을 진행하며 영화보다는 방송인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유쾌한 웃음과 예비군 제도에 대한 비판까지
 
 엘리트 및귀공자 전문배우였던 김숭우는 <라이터를 켜라>에서 백수 예비군 연기를 찰떡 같이 소화했다.

엘리트 및귀공자 전문배우였던 김숭우는 <라이터를 켜라>에서 백수 예비군 연기를 찰떡 같이 소화했다. ⓒ 시네마 서비스

 
예비군들은 군복을 입는 순간 조교들을 후임으로 부리려 하고 교관을 아저씨처럼 대하는 불량 군인이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예비군들은 아직 사회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지 못한 20~30대 청년들에 불과하다. 특히 일정한 직업도 없이 백수로 생활하다가 차비와 점심값만 들고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오는 허봉구(김승우 분)의 마음은 더욱 불편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훈련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동네 친구(정은표 분)까지 만났다.

집으로 돌아갈 버스비가 부족해 차를 타지 못한 봉구는 남은 300원으로 부대 앞 슈퍼마켓에서 일회용 라이터를 구입한다. 다행히 훈련장에서 담배를 얻어 피운 떠벌남(강성진 분)과의 인연으로 서울역까지 택시를 얻어 타지만 서울역 화장실에서 그만 건달보스 양철곤(차승원 분)에게 라이터를 빼앗기고 만다. 어느덧 일회용 라이터가 자신의 전부가 된 봉구는 건달보스에게서 라이터를 되찾기 위해 부산행 열차에 뛰어든다.

영화 전체의 내용과는 크게 상관없지만 초반 택시 안에서 떠벌남에 의해 표현되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예비군 훈련의 부조리함은 군필 남자 관객들의 많은 공감을 얻었다.

"시간 낭비, 돈 낭비, 노동력 낭비. 나 봐요, 나. 예비군 훈련 한 번 받으려고 어제 부산에서 올라와서 오늘 밤 차 타구 내려가니까, 시간적으론 1박 2일을 소비한 거죠. 거기다가 왕복 기차표 값에, 밥 값에 이런 비생산적이고 무의미한 짓거리가 어디 있냐고요."

현직 국회의원인 박용갑(박영규 분)은 정치판에 조폭을 동원해 자신의 잇속을 챙긴 후 토사구팽해 철곤의 열차테러를 부추긴 원흉이다. 결국 박용갑과 양철곤 모두 취급도 안 했던 봉구의 박치기에 의해 정의구현 당한다. 그리고 기차의 위기를 구한 영웅이 된 봉구는 모든 인터뷰 제의를 뿌리치고 양철곤에게서 되찾은 라이터를 꺼내 들어 얻어 피운 담배 한 모금을 내뿜으며 길었던 하루를 마무리한다.

<라이터를 켜라>의 영화음악은 장항준 감독의 절친인 가수 윤종신이 맡았다. 윤종신은 <라이터를 켜라>의 주제가와 다름 없는 <담배 한 모금>, 그리고 유희열과 함께 <어느 예비군의 편지>라는 노래를 불렀다. 특히 <어느 예비군의 편지>는 "집 떠나와... 버스 타고", "부모님께... 꾸중 듣고"처럼 고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 가사를 재미있게 변주한 가사가 유쾌한 웃음을 짓게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꽤나 진지하고 철학적인 노래다.

유해진, 이문식, 정은표... 명품 조연들의 향연
 
 '명품조연' 이원종(왼쪽)과 성지루는 비리경찰과 조직폭력배의 부정한 결탁을 풍자하는 캐릭터로 등장했다.

'명품조연' 이원종(왼쪽)과 성지루는 비리경찰과 조직폭력배의 부정한 결탁을 풍자하는 캐릭터로 등장했다. ⓒ 시네마 서비스

 
<라이터를 켜라>는 선거판에 조폭을 동원한 국회의원에게 돈을 받아내기 위해 열차에 오른 조직폭력배 두목과 그가 무의식 중에 챙긴 라이터를 되찾으려는 백수의 대결을 그린 영화다. 하지만 <라이터를 켜라>에는 두 주인공과 이 대결의 시작점이 된 비리 국회의원 외에도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등장해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라이터를 켜라>의 최대 관람 포인트가 '배우 보는 재미'라고 이야기하는 관객들이 많은 이유다.

<주유소 습격사건>의 용가리로 얼굴을 알리기 시작했던 배우 유해진은 여러 영화에서 보여준 수다쟁이 캐릭터와 달리 소심하고 내성적인 캐릭터로 등장해 강성진이 연기한 떠벌남과 시종일관 비교되는 연기를 보여준다. 이문식이 연기한 양철곤의 오른팔 찐빠는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험한 말을 구사하고 봉구를 완력으로 제압하기도 한다. 하지만 승객들을 위협하려고 휘두른 흉기가 의자에 박히면서 허무하게 제압 당한다.

<야인시대>의 구마적 이원종과 <공공의적>에서 마약판매상을 연기했던 성지루는 <라이터를 켜라>에서 경찰과 조폭의 부정한 결탁을 보여준다. 국회의원 박용갑과 양철곤은 각각 천안역에서 경찰과 절친 만수에게 연락을 취해 지원을 요청하지만 이들은 천안역에서 난투극을 '연기'하며 기차가 지나가길 기다린다. 결국 한바탕 상황극을 끝낸 두 사람은 훈방조치를 약속하며 사이 좋게 경찰서로 이동한다.

예비군 훈련장에 등장해 봉구에게 온갖 악담을 퍼붓는 동창 역의 정은표도 짧은 시간에 상당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가만 듣다 보면 대부분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한 적 없이 건너건너 들은 이야기들이었다. 장항준 감독의 서울예대 동기인 장현성도 초반 동창회에서 봉구를 망신 주는 광필 역으로 출연했다가 후반 박치기에 눈을 뜬(?) 봉구에게 호되게 당한다(이 밖에 김민교, 임형준 등도 동창회 장면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라이터를 켜라 장항준 감독 김승우 차승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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