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5년 13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베테랑>에는 톱모델 장윤주가 광역수사대 강력 2팀의 홍일점 봉윤주를 연기했다. 장윤주는 모델은 물론 여러 장의 앨범을 발표한 가수이기도 하고 예능활동도 활발하게 하는 편이지만 <베테랑> 이전까지 연기 경험은 전무했다. 하지만 장윤주의 연기는 황정민, 오달수 같은 노련한 배우들 사이에서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류승완 감독이 만든 봉윤주 캐릭터와 장윤주의 이미지가 정확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마블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는 WWE 챔피언 출신의 데이브 바티스타가 로난에게 가족을 몰살당한 전과 22범의 암살자 드랙스 역에 캐스팅됐다. 바티스타 역시 B급 액션영화 몇 편에 출연한 것이 연기경력의 전부였지만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드랙스가 가진 반전 개그 캐릭터를 잘 표현하면서 속편에서는 맨티스와 러브라인까지 생겼다. 그만큼 드랙스라는 캐릭터와 프로레슬링 챔피언 바티스타의 이미지가 잘 어울렸다는 뜻이다.

이처럼 캐릭터와 배우 이미지가 어울리는 캐스팅을 하고 그에 걸맞은 연출을 한다면 관객들을 만족시키는 영화를 만들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조근식 감독의 장편 데뷔작 <품행제로>는 양아치 주인공 박중필 역의 류승범과 불량끼 넘치는 여학생 나영 역의 공효진, 얌전한 이웃 여학교의 퀸카 민희 역의 임은경까지 세 주인공 캐릭터가 배우의 이미지와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이며 더욱 흥미로운 작품으로 탄생했다. 
 
 <품행제로>는 신인급 배우들 위주로 캐스팅했음에도 전국 160만 관객을 동원했다.

<품행제로>는 신인급 배우들 위주로 캐스팅했음에도 전국 160만 관객을 동원했다. ⓒ 청어람

 
양아치 연기에 특화된 류승범의 젊은 시절

지금은 형이 천만 감독이 되는 바람에 '류승완의 동생'으로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지만 사실 대중들에게 이름을 먼저 알린 쪽은 류승범이었다. 2000년 형이 만든 옴니버스 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로 데뷔한 류승범은 <다찌마와 리>와 <킬러들의 수다>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거쳐 2001년 SBS드라마 <화려한 시절>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류승범은 <화려한 시절>에서 만난 공효진과 꽤 오랫동안 공개연애를 하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에 특별출연한 류승범은 이어 조근식 감독의 <품행제로>에서 불량학생 중필 역으로 첫 주연을 맡았다. 사실 불량한 캐릭터는 류승범에게 새삼스러울 게 없지만 코믹하면서도 껄렁하고 의외로 소심한 면모까지 두루 갖춘 중필의 캐릭터는 류승범에게 '맞춤정장'과도 같았다. 2002년 연말에 개봉한 <품행제로>는 신인배우 위주의 캐스팅에도 전국 164만 관객을 모으며 선전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류승범 특유의 불량스런 연기는 그를 상징하는 트레이드마크가 됐고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주먹이 운다>와 황정민과의 첫 만남으로 화제를 모은 <사생결단>까지 이어졌다. <라듸오 데이즈> <용서는 없다> <방자전> 등에 출연하며 연기 변신을 시도한 류승범은 2010년 <부당거래>를 통해 부일영화제와 판타지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지금까지도 여러 매체에서 쓰이는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줄 알아"가 여기서 나온다). 

<페스티벌>과 <수상한 고객들> <시체가 돌아왔다> 등이 연속으로 흥행에 실패하며 슬럼프를 겪었던 류승범은 2013년 <베를린>을 통해 710만 관객을 동원하며 건재를 과시했다. 물론 <베를린>은 하정우, 한석규, 전지현 등 호화 캐스팅으로 유명한 영화지만 북한의 첩보요원 동명수를 연기한 류승범의 존재감도 대단했다(공교롭게도 류승범의 히트작 대부분은 류승완 감독이 연출한 영화들이다).

류승범은 2015년 고준희와 함께 출연한 영화 <나의 절친 악당들>이 평단과 흥행에서 모두 참패했고 김기덕 감독과 호흡을 맞춘 두 편의 영화도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지난 2019년 <타짜: 원 아이드 잭>에서 애꾸를 연기하며 오랜만에 상업 영화에 출연했던 류승범은 여전히 하정우, 조승우와 함께 최민식, 송강호,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이병헌의 뒤를 이을 연기파 배우로 꼽힌다.

학교 짱들의 전설, 풍문과 현실은 다르다
 
 <품행제로>의 세 주인공은 캐릭터와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였다.

<품행제로>의 세 주인공은 캐릭터와 놀라운 싱크로율을 보였다. ⓒ 청어람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하지만 문화계 전반에서 '복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높다. 영화에서도 역대 한국영화 흥행 4위에 빛나는 <국제시장(1420만)>을 비롯해 <써니> <쎄시봉> <건축학개론> 등 다양한 장르의 복고 영화들이 제작되고 개봉하면서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품행제로> 역시 복고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로맨스가 살짝 섞인 코미디 장르에 잘 녹여 낸 작품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배경이나 소품들도 당연히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많다. 김승진의 <스잔>과 박혜성의 <경아>를 사이에 두고 민희(임은경 분)와 나영(공효진 분)이 롤러장에서 신경전을 벌이거나 레코드 가게에서 클래식 기타를 배우는 민희와 중필(류승범 분)의 모습 등은 오늘날 거의 사라진 문화들이다. 세운상가에서 어렵게 구입한 제목 없는 비디오 테이프에서 나오던 <전원일기> 역시 1980~19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남학생들의 공감포인트.

유급생 중필은 어머니(금보라 분)가 운영하시는 미용실에서 스치듯 마주친 민희에게 반하고 기타학원 등록을 빌미로 민희에게 접근한다. 옷 사이즈를 묻는 민희의 질문에 "남자는 다 100"이라며 허세를 부리던 중필은 안경을 벗은 민희와 눈이 마주치고 수줍고도 달콤한 첫 키스를 한다. 키스의 과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카메라가 위로 올라가면서 종소리 효과음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데 이 역시 <품행제로>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

중필을 좋아하는 민희와 나영의 신경전도 상당히 재미있다. 불량학생 나영의 무서운 협박에도 민희가 물러서지 않자 나영은 민희에게 '정말로 중필을 좋아하면 음식물 쓰레기를 먹어 보라'고 제안한다. 단지 겁을 주려고 한 행동이었지만 민희는 정말로 음식물 쓰레기를 한 웅큼 집어 먹고 나영에게도 먹어 보라고 반격한다. 그리고 중필을 위해 음식물 쓰레기 섭취도 마다하지 않았던 민희와 나영은 사이좋게(?) 양호실에서 재회한다. 

학우들 사이에서 전설처럼 회자되는 싸움실력을 가진 중필과 상만(김광일 분)이 맞붙는 마지막 결투 장면은 액션 영화들의 과장을 비트는 현실적인 액션을 보여준다. 중필과 상만은 하늘을 날고 공중 3회전 날아차기 같은 과장된 장면은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소위 '막싸움'으로 일관한다. 하지만 등에 칼이 꼽힌 줄도 모르고 싸움에 몰두하며 "내가 문덕고 캡짱이야, 이 개XX들아!!"라고 소리 치는 류승범의 연기는 상당히 인상적이다. 

끝까지 류승범 곁 지킨 단짝 봉태규
 
 <품행제로>에서 단짝으로 출연하는 봉태규와 류승범은 실제로도 절친한 사이다.

<품행제로>에서 단짝으로 출연하는 봉태규와 류승범은 실제로도 절친한 사이다. ⓒ 청어람

 
학교에서 '짱'은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외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학우들이 쉽게 다가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필은 언제나 중필을 따르는 수동이 있기 때문에 외롭지 않았다. 수동은 말동무 겸 참모 역할을 하는 중필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다. '싸움을 잘해서' 중필을 따라 다닌다고 솔직하게 말하면서도 '불꽃전학생' 상만과의 대결을 앞두고는 중필을 진심으로 걱정해줬다.

수동을 연기한 봉태규는 2000년 <눈물>로 데뷔한 후 개성 있는 조연으로 이름을 알리다가 2003년 시트콤 <논스톱4>에서 한예슬과 커플 연기를 펼치며 유명세를 탔다. 2006년 <방과 후 옥상>과 2007년 <두 얼굴의 여친>, 2008년 <가루지기>에서는 주연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다만 고르는 작품마다 흥행에 실패하면서 류승범만큼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최근엔 인기드라마 <펜트하우스> 시리즈에서 찌질한 마마보이 변호사 이규진을 연기하고 있다.

<품행제로>에는 봉태규 말고도 개봉 당시엔 신인이나 무명에 가까웠지만 훗날 얼굴을 알린 배우들이 제법 등장한다. 중필을 따라다니다가 나중에 상만에게 붙은 단군파 멤버 중에는 <응답하라1994>의 '쓰레기' 정우가 있다. <품행제로>는 <7인의 새벽> <라이터를 커라>에 이은 정우의 3번째 영화였다. 정우는 2009년 이성한 감독의 <바람>을 만나기 전까지 양아치, 건달 역을 주로 맡으며 제법 긴 무명 생활을 보냈다.

류승범 패거리에 정우가 있었다면 공효진이 이끄는 오공주파에는 박효주가 있었다. 대사가 그리 많지 않은 단역이지만 나영과 민희의 롤러장 신경전에서 민희의 얼굴에 담배연기를 뿜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도 제목을 헷갈리는 사람이 많은 영화 <추격자>와 드라마 <추적자>에 모두 출연한 배우로도 유명한 박효주는 2015년 결혼 후에도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품행제로 류승범 공효진 임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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