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방극장'에선 처음 또는 다시 볼 만한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작품부터 아직 국내에 정식으로 소개되지 않은 작품까지 다양하게 다루려고 합니다.[편집자말]
 
<헤더스> 영화 포스터

▲ <헤더스> 영화 포스터 ⓒ 세종영상(주)

 
웨스트버그 고등학교엔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헤더' 챈들러(킴 워커 분)를 중심으로 '헤더' 듀크(섀넌 도허티 분), '해더' 맥나마라(리잔느 폴크 분), 베로니카 소여(위노나 라이더 분)로 구성된 사교 클럽 '헤더스'가 존재한다.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는 헤더스의 짓거리에 불만을 가지면서도 이들 무리에 속하고자 아등바등하는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던 베로니카는 전학생 JD(크리스찬 슬레이터 분)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어느 날, 베로니카는 챈들러와 함께 대학생 파티에 갔다가 크게 다투며 헤더스에서 쫓겨날 처지에 놓인다. 사실을 안 JD는 세정제를 이용하여 챈들러를 죽인 다음 베로니카에게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유서를 쓰라고 지시한다. 며칠 후 베로니카는 교내 미식축구팀 선수인 커트(랜스 펜톤 분)와 렘(패트릭 라보티우스 분)이 이상한 소문을 퍼뜨리는 걸 알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그러자 JD는 커트와 렘도 챈들러처럼 죽인 후 자살로 위장하자고 제안한다.

많은 사람이 <멍하고 혼돈스러운>(1993), <클루리스>(1995), <스크림>(1996), <내가 널 사랑할 수밖에 없는 10가지 이유>(1999) 등 최고의 하이틴 영화는 1990년대에 나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리치몬드 연애 소동>(1982), <조찬 클럽>(1985>, <페리스의 해방>(1986) 등 영화사의 상징적인 하이틴 영화들은 1980년대에 쏟아졌다. 그리고 1980년대의 끝자락에 문제적 작품 <헤더스>(1989)가 나왔다.
 
<헤더스> 영화의 한 장면

▲ <헤더스> 영화의 한 장면 ⓒ 세종영상(주)

 
<헤더스>는 <허드슨 호크>(1991), <배트맨 2>(1992), <데몰리션 맨>(1993)으로 유명한 각본가 다니엘 워터스의 영화화된 첫 번째 시나리오다. 평소 하이틴 소설과 잡지, 학교 신문의 칼럼 등을 즐겨 읽으며 10대 소녀들의 '자기혐오'에 관심을 두던 그는 10대의 자살, 또래 사이의 괴롭힘 등 당시 하이틴 영화에서 다루지 않던 민감한 소재들을 바탕으로 삼아 <헤더스>를 썼다. 다니엘 워터스는 10대의 잔혹한 폭력 묘사로 논란을 일으킨 <시계태엽 오렌지>(1971)를 연출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헤더스>의 메가폰을 잡길 원했다는 후문이다.

제작을 맡은 뉴월드픽쳐스는 신예 마이클 레만에게 감독을 맡겼다, 주연 배우는 경력이 끝장날지 모른다는 주위의 반대(오디션에 참가한 10대 배우의 어머니는 영화 대본이 "악마"고 영화 제작자가 "악의 목소리"라고 비판했을 정도다)를 물리친 위노나 라이더와 한때 물망에 오르던 조니 뎁, 오디션을 봤던 브래드 피트를 제친 크리스찬 슬레이터에게 돌아갔다. 예산은 3백만 달러에 불과해 32일 만에 촬영을 마쳤다고 알려진다.

<헤더스>는 1988년 10월 24일 이탈리아에서 선공개한 다음에 1989년 3월 31일 미국에서 개봉했지만, 110만 달러라는 저조한 성적을 거두며 간판을 내렸다. 그러나 비디오로 출시한 후 반전이 일어났다. 영화의 기발한 유머와 날카로운 비판 의식에 열광하는 사람이 하나둘 생기며 비디오 세대의 컬트영화로 등극한 것이다. <헤더스>는 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최고의 하이틴 영화 가운데 하나로 칭송을 받고 있다. 2006년 미국의 매체 '엔터테인먼트 위클리'가 선정한 최고의 하이틴 무비 50편에서 5위에 오르기도 했다. 근래엔 뮤지컬이 만들어질 정도로 인기는 여전하다.
 
<헤더스> 영화의 한 장면

▲ <헤더스> 영화의 한 장면 ⓒ 세종영상(주)

 
영화 속 '헤더스'는 단순한 사교 클럽이 아니다. 권력의 다른 이름이다. 극 중에서 JD는 "학교는 사회와 다르다고 말하는데 아니야. 학교가 바로 모든 사회의 출발점이라고."라고 말한다. 그의 표현대로 사회의 계급, 권력 구조처럼 학교의 계급, 권력 구조의 상위에서 군림하는 존재가 헤더스다. 다른 학생들은 베로니카와 마찬가지로 헤더스를 싫어하면서 한편으로는 동경하는 양가적 감정을 품는다. 

오프닝 장면은 영화가 묘사한 헤더스와 베로니카(학생)의 관계를 흥미롭게 담고 있다. 노래 '케세라 세라'가 흐르며 빨간색 머리끈을 묶는 챈들러의 뒷모습과 함께 제목이 나온다. 계급 구조의 정점인 헤더의 상징은 빨간색 머리끈이다.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챈들러, 듀크, 맥나마라는 크리켓 게임을 위해 정원의 꽃을 밟으며 걸어간다. 하위 계층을 짓밟겠다는 의미다. 크리켓 게임의 공이 굴러간 지점에 있는 것은 (땅속에 파묻힌) 베로니카의 머리다. 이것은 헤더스에 들어가기 위해 모욕을 참는 베로니카의 상황을 상징한다. 이어서 베로니카는 "일기장에게"라고 말하며 내면과 대화를 나눈다. 앞으로 전개가 베로니카의 '의식의 흐름'대로 진행하겠다는, 꿈과 현실을 자유롭게 넘나들겠다는 뜻이다.

JD는 베로니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진짜로 죽이며 욕망을 실현해준다. 그런데 베로니카와 JD가 사람(들)을 죽인 후 자살로 위장하는 방법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필적을 위조해 유서를 만든다는 건 대충 넘어가도 1980년대라 해도 사방에 지문을 남기는 등 과학 수사의 관점에서 현실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꿈과 현실이 뒤섞여 있다는 설정으로 본다면 말이 된다. JD는 베로니카의 내면에 있던 불안과 욕망이 실체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전개는 지나친 욕망과 잘못된 가치관(커트와 렘을 동성애자로 위장한 사실을 기억하자)에 맞서 싸우는 의식의 세계를 형상화하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JD를 단순히 사이코패스로 보면 곤란하다.
 
<헤더스> 영화의 한 장면

▲ <헤더스> 영화의 한 장면 ⓒ 세종영상(주)

 
베로니카는 폭탄 테러를 하려는 JD를 막은 후 헤더를 상징하는 빨간색 머리끈을 하고 "새로운 보안관"이란 대사를 내뱉으며 주체적인 존재로 거듭났음을 알린다.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나라 수입사는 마지막 장면의 의미를 완전히 변질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영화 도입부엔 챈들러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이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어느 날 외계인이 500만 불을 주고는 이틀 뒤에 지구를 폭파한다고 한다면 그 돈을 뭐에 쓸 거야?"라 묻고 학생들은 각자 의견을 대답한다. 

JD는 계획한 폭탄 테러가 실패한 후 베로니카를 향해 "학교를 폭파하지 못했으니 나라도 폭파해야지. 마지막 가는 길에 담뱃불이나 붙여 줄게."라고 말한다. 이건 캐릭터의 정체성과 플롯마저 바꾼 엄청난 오역이다. 원래 대사는 "Pretend I did blow up the school. All the schools. Now that you're dead, what are you gonna do with your life?(내가 세상의 모든 학교를 폭파한다고 생각해 봐. 네가 죽는다면 마지막으로 뭘 하고 싶어?)"로 챈들러의 질문과 같은 맥락에 있다.

챈들러의 질문조차 받지 못해 답을 할 수 없었던 베로니카는 챈들러를 죽인 JD가 던진 질문을 받고 담뱃불을 붙이겠다는 행동으로 답하며 자신의 다른 자아인 JD를 폭파시킨다. 중요한 건 대답의 내용이 아니라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는 변화, 바꾸어 말하면 내면의 혼란을 극복했다는 사실이다. 성장은 대사 "새로운 보안관", 빨간색 머리끈과 연결된다. 그리고 놀림 받던 친구와 함께 하는 베로니카를 보여주며 새로운 헤더의 탄생을 축하하듯 도입부와 다른 버전의 '케세라 세라'가 울린다. 
 
<헤더스> 영화의 한 장면

▲ <헤더스> 영화의 한 장면 ⓒ 세종영상(주)

 
<헤더스>는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간 작품이다. 실제 10대 연령인 배우를 물색해 주연으로 발탁한 위노나 라이더, 크리스찬 슬레이터, 섀넌 도허티는 다음 10년의 스타가 되었다. 각본가 다니엘 워터스는 녹음한 10대들의 대화를 기반으로 만든 다른 하이틴 무비들과 달리, 시나리오에 당시 유행어나 속어를 일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독특한 표현을 집어넣어 오늘날까지 신선함을 유지한다. 하이틴 무비에 섹스나 화장실 코미디가 아닌, 블랙 코미디를 섞은 플롯도 참신하다.

비현실적인 화법을 사용하여 현실적인 학교와 10대를 그린 <헤더스>는 이후 <클루리스>, <일렉션>(1999), <조브레이커>(1999), <슬랩 허, 쉬즈 프렌치>(2002), <퀸카로 살아남는 법>(2004) 등 새로운 유형의 하이틴 영화에 크고 작은 영향을 끼쳤다. 최근에 개봉한 <터지기 전에>(2020)는 <헤더스>에 나온 자살(로 위장한 타살)과 폭파를 인용하여 한 학교의 반 애들이 어느 날부터 하나둘 터져버린다는 기가 막힌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놀라운 점은 의도치 않은 '예언'이다. 10년이 지난 1999년, JD처럼 두 학생이 학교를 폭파하려고 시도했던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질 줄은 감독, 배우, 작가는 예상하지 못 했을 것이다. 2019년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미국에서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 교내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으로 학생 및 학교 관계자 146명이 목숨을 잃었고 308명이 부상을 입었다. <헤더스>가 묘사한 풍경은 슬프게도 현실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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