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구여제' 김연경이 대표팀 은퇴를 선택했다. 김연경은 12일 협회사무실에서 오한남 배구협회장과의 면담을 통해 대표팀 은퇴 의사를 밝혔고 오 협회장도 김연경의 뜻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 이로써 한일전산여고(현 수원전산여고) 3학년이던 지난 2005년 FIVB 월드그랜드 챔피언스컵을 통해 성인 대표팀에 데뷔했던 김연경은 햇수로 17년에 걸친 대표팀 생활을 마무리하게 됐다.

사실 대한배구협회와 배구팬들은 내심 김연경이 오는 20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까지 대표팀에서 후배들을 이끌어 주기를 기대했다. 현 시점에서 김연경이 없는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연경이 천년만년 대표팀에 남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언젠가 대표팀을 떠나야 한다면 2020 도쿄 올림픽 4강이라는 멋진 성과를 만들어낸 지금이 '적기'임에 분명하다.

윙스파이커로서 공격은 물론 서브, 서브리시브, 수비에 뛰어난 리더십까지 갖춘 김연경은 '한국 대표팀 전력의 절반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여자배구를 이끌었다. 실제로 한국 여자배구가 지난 10여 년 동안 세계의 강호들과 대등한 승부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은 세계 최고의 윙스파이커 김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배구팬들에게 짜릿한 기억들을 남기고 대표팀을 떠나는 김연경이 지난 17년 동안 가장 돋보였던 순간들을 돌아보자.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가슴 아픈 역전패의 기억    
 
'소녀 거포' 김연경은 쟁쟁한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소녀 거포' 김연경은 쟁쟁한 외국인 선수들 사이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2006년 '소녀 거포'로 불리던 시절 김연경의 모습. ⓒ KOVO

 
2005년 김연경이라는 걸출한 신인이 등장해 V리그를 지배했지만 사실 2000년대 중·후반까지 한국 여자배구는 세계무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 무대에서도 강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한 수 아래라고 여겼던 태국에게 덜미를 잡히며 노메달에 그쳤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도 중국과 일본은 물론, 카자흐스탄에게도 밀리며 본선 무대를 밟지도 못했다.

하지만 한국은 김연경의 성장과 함께 아시아 정상을 향한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실제로 김연경은 2009년 일본 JT마블러스에 진출해 첫 시즌부터 팀을 25연승으로 이끌며 정규리그 득점왕에 올랐다. 여기에 자매스타 한유미(KBS 배구해설위원)-한송이(KGC인삼공사)를 비롯해 신예센터 양효진, '꽃사슴' 황연주(이상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등이 가세하면 충분히 아시아 정상을 노려볼 수 있었다.

실제로 김연경은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대표팀의 주포로 활약하며 한국을 결승으로 이끌었다. 결승 상대는 개최국 중국. 한국은 중국을 상대로 1, 2세트를 먼저 따내며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이후 16년 만의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향한 확률을 높여가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한 한국은 중국에게 3, 4세트를 내줬고 경기는 마지막 5세트에서 승부를 가리게 됐다.

한국은 5세트에서 14-12로 매치포인트를 선점하며 금메달의 목전까지 왔지만 14-12에서 중국에게 거짓말처럼 4점을 연속으로 허용하며 역전패를 당했다. 금메달을 위해 마지막까지 힘을 쏟은 김연경은 패배가 확정된 후 코트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훔쳤다. 한국 여자배구를 이끌어갈 에이스로서 김연경이 본격적으로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2012 런던 올림픽] 역대 단일 올림픽 최다득점
 
 '김연경 최전성기' 2012년 런던 올림픽 경기 모습

2012년 런던 올림픽 경기 때 김연경 선수의 모습. ⓒ 국제배구연맹

 
한국은 2012년 5월 런던올림픽 세계예선전에서 맹활약을 펼친 김연경의 선전에 힘입어 올림픽 본선티켓을 따냈다. 특히 한국은 일본과의 경기에서 세트스코어 3-1 승리를 따냈는데 이 승리는 무려 한일전 22연패의 긴 사슬을 끊어내는 값진 승리였다. 그렇게 한국 여자배구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이후 8년 만에 올림픽 본선 티켓을 따내며 런던에 입성했다.

올림픽 본선무대는 그야말로 김연경의 '원맨쇼'였다. 김연경은 조별리그와 8강까지 6경기에서 경기당 평균 27.5득점을 기록하며 그야말로 군계일학의 활약을 펼쳤다. 물론 한송이와 양효진, 김희진 등이 요소요소에 좋은 활약을 펼치며 제 역할을 해줬지만 런던 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배구는 '김연경과 아이들'이라고 표현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그만큼 김연경의 활약이 돋보였다는 뜻이다.

한국은 4강에서 미국, 동메달 결정전에서 일본에게 패하며 메달을 따내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8경기에서 207득점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른 김연경은 국제배구연맹에서 선정한 런던올림픽 MVP에 등극하는 영광을 누렸다. 특히 김연경이 기록한 207득점은 206cm의 신장을 자랑하던 러시아의 전설적인 공격수 예카테리나 가모바가 아테네 올림픽에서 기록한 204득점을 뛰어넘는 역대 단일 올림픽 최다득점 기록이었다.

김연경이라는 '사기캐릭터' 덕분에 36년 만에 올림픽 4강에 오른 한국 여자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동메달 이후 가장 좋은 성적을 올렸다. 하지만 김연경은 2020년 6월 절친한 후배 양효진과 함께 일본과의 3, 4위전을 리뷰하면서 당시 너무 경직된 플레이를 했다고 자책했다. 그리고 김연경은 9년의 시간이 흘러 2020 도쿄올림픽 일본의 안방에서 일본에게 통쾌한 설욕에 성공했다.

[2020 도쿄 올림픽] 메달보다 빛났던 '라스트 댄스'
 
[올림픽] 김연경의 서브 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김연경이 서브를 준비하고 있다.

▲ [올림픽] 김연경의 서브 8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 김연경이 서브를 준비하고 있다. ⓒ 연합뉴스

 
2019년 8월 올림픽 대륙간 예선전에서 러시아에게 풀세트 접전 끝에 패하며 본선 티켓을 놓친 한국은 2020년 1월 아시아 예선에서 태국을 꺾고 3회 연속 올림픽 본선에 진출했다.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올림픽이 1년 연기되고 쌍둥이 자매 학원폭력 폭로사태로 많은 내홍을 겪기도 했지만 김연경은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을 맞아 남다른 각오로 후배들을 이끌며 착실히 올림픽을 준비했다.

브라질과의 첫 경기에서 0-3으로 패한 한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을 풀세트 접전 끝에 꺾은 후 7월 31일 개최국 일본과 맞붙었다. 그리고 김연경은 무려 30득점을 퍼붓는 대활약 속에 한국의 3-2 승리를 이끌었다. 특히 한국은 5세트 12-14 열세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연속 4득점을 올리는 극적인 상황을 연출했다. 한국은 8강에서도 세계 4위 터키를 3-2로 제압했고 김연경은 28득점으로 또 한 번 한국의 승리를 이끌었다.

김연경은 도쿄 올림픽에서 실력은 물론 상대팀 선수들과의 진한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한국이 두 차례 상대했던 브라질의 주장 나탈리아 페레이라와 8강 상대였던 터키의 주장 에다 에르뎀, 이번 대회 득점왕을 차지한 세르비아의 티아나 보스코비치는 모두 터키리그에서 활약하던 시절 김연경과 한솥밥을 먹었던 사이다. 이들은 경기가 끝난 후 김연경에게 다가와 포옹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는 스포츠맨십을 선보였다.

이번 도쿄 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을 떠나기로 했지만 김연경이 현역생활을 접는 것은 아니다. 지난 5월 중국리그의 상하이 브라이트 유베스트와 계약한 김연경은 다가올 시즌에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기량을 뽐낼 예정이다. 물론 지난 시즌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에서 활약했던 것처럼 은퇴 전에 다시 V리그를 누빌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배구팬들이 김연경의 대표팀 은퇴를 너무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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