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걷기왕>, 2018년<오목소녀>를 연출한 백승화 감독은 영화 감독이 되기 전 아주 독특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백승화 감독은 단편 애니메이션과 뮤직비디오를 연출했고 인디밴드 '타바코 쥬스'에서 드럼 연주자로 활동했다. 2004년에 결성된 밴드 다바코 쥬스는 2장의 싱글앨범과 2장의 정규앨범을 발표하고 2011년에 해체됐는데 백승화 감독은 팀에서 드럼과 작사를 담당했다.

<불신지옥>과 <건축학개론>, 그리고 올해 티빙을 통해 개봉한 <서복>을 연출한 이용주 감독의 전직도 특이하다. 연세대 건축공학과 출신의 이용주 감독은 영화 감독이 되기 전 건축사무소에서 설계사로 일을 했던 경력을 가지고 있다. <살인의 추억> 연출부 막내로 영화판에 뛰어 들었을 때 이용주 감독의 나이는 서른 두 살이었다. <걸스카우트>와 <심야의 FM>을 연출했던 김상만 감독은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로 업계에서 유명했다.

이처럼 영화계는 나이의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라 다른 일을 하다가 영화 쪽으로 직업을 바꾼 사람들이 많은 편이다.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가 소설가, 영화 감독, 그리고 참여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까지 지낸 이창동 감독도 영화인으로 변신에 성공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무려 40세의 나이에 동갑내기 감독의 조연출로 영화계에 뛰어든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첫 연출데뷔작 <초록 물고기>를 통해 단숨에 영화계의 거목으로 떠올랐다.
 
 이청동 감독은 <초록물고기>를 통해 1997년 청룡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건너뛰고 바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청동 감독은 <초록물고기>를 통해 1997년 청룡영화제에서 신인 감독상을 건너뛰고 바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 시네마 서비스

 
단 5편으로 거장이 된 리얼리즘의 장인

국어교사로 재직 중이던 이창동 감독은 1983년 중편소설 <전리>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문학계에 발을 들였다. 1992년에는 <초록물고기>의 원작이 된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한국일보 창작문학상을 수상하며 소설가로 인정 받았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소설로 표현할 수 있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40세의 나이에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각본과 조연출을 맡으며 영화에 뛰어 들었다.

1995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각본을 쓰며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이창동 감독은 1997년 첫 장편 영화 <초록물고기>를 연출했다. 신도시가 건설되던 일산을 배경으로 군대를 갓 전역한 청년의 비극적인 삶을 리얼하게 그린 <초록물고기>는 개봉과 함께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이창동 감독은 <초록물고기>를 통해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대종상 시상식 등에서 무려 12개의 트로피를 휩쓸며 '늦깎이 괴물 신인 감독'의 등장을 알렸다.

하지만 이는 '이창동 신화'의 시작에 불과했다. 이창동 감독은 무명의 설경구와 문소리를 내세운 <박하사탕>을 통해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주인공 김영호를 연기한 설경구는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 청룡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2002년에 선보인 <오아시스>에서는 뇌성마비 장애인 한공주를 연기한 문소리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신인배우상, 이창동 감독이 특별 감독상을 수상했다.

2003년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임명된 이창동 감독은 1년 4개월 동안 공직에 몸담았다가 장관직에서 물러난 후 3년의 준비기간 끝에 신작 <밀양>을 선보였다. <밀양>에서 유괴사건으로 아들을 잃은 엄마 신애를 연기한 전도연은 2007년 칸 영화제에서 한국인 최초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밀양>은 칸 영화제를 비롯해 무려 9개의 국제영화제에서 초청받아 상영될 정도로 작품성을 인정 받았다.

<밀양> 이후 3년의 공백을 가진 이창동 감독은 2010년 원로배우 윤정희를 캐스팅해 <시>를 만들었다. <시>는 국내외 7개 영화제에서 작품상 혹은 감독상을 수상했다. 2018년 유아인,스티븐 연, 전종서가 출연한 6번째 장편영화 <버닝> 역시 국내외 수 많은 영화제에서 주요상을 수상하며 이창동 감독의 위상을 또 한 번 확인시켰다.이창동 감독은 1997년 감독 데뷔 후 단 6편의 영화를 만들었지만 이미 충분히 거장의 반열에 오른 '리얼리즘의 장인'이다.

한석규를 감동시킨 한국형 갱스터 무비
 
 많은 관객들이 90년대 한석규 최고의 연기로 <초록물고기>의 막동이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많은 관객들이 90년대 한석규 최고의 연기로 <초록물고기>의 막동이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 시네마 서비스

 
<초록물고기>의 주인공 막동이 역에 한석규가 캐스팅됐을 때 한석규는 <닥터봉>과 <은행나무 침대>를 히트시키며 충무로의 흥행보증수표로 떠오르고 있었다. 화려했던 90년대 후반 한석규의 필모그래피에서 사실 서울관객 16만의 <초록물고기>는 그리 성공한 작품은 아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한석규는 훗날 자신이 주최한 시나리오 공모전 이름을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라 지을 만큼 막동이 역할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다. 

애정을 보인 캐릭터답게 한석규는 <초록물고기>에서 명불허전의 연기력을 보여줬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갓 군대를 제대한 26세 청년을 연기한 것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 법도 했지만 한석규는 깡만 믿고 지하 조직으로 들어가 성공을 위해 발버둥치는 막동이를 통해 삶의 허무함과 부조리를 관객들에게 실감나게 전달했다. 지금도 한석규 역대 최고의 연기로 <뿌리 깊은 나무>의 세종대왕과 함께 <초록물고기>의 막동이를 꼽는 관객들이 적지 않다.

영화가 막동이를 중심으로 흐르다 보니 자세히 표현되진 않았지만 여주인공 미애(심혜진 분)의 운명도 참 가혹하다. 나이트 클럽 가수이자 조직폭력배 두목 배태곤(문성근 분)의 애인인 미애는 배태곤의 사업 확장을 위해 성접대 자리에 불려 간다. 순수한 청년 막동이를 통해 불행한 일상을 탈출하려 했지만 우유부단한 막동이 때문에 이마저도 성공하지 못했다. 심혜진은 <초록물고기>를 통해 대종상과 백상예술대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뭐니뭐니해도 <초록물고기>의 백미는 배태곤의 명령에 따라 김양길(명계남 분)을 살해한 막동이가 집으로 전화해 큰형(이호성 분)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초록물고기를 잡기 위해 다리 밑에서 슬리퍼를 잃어버린 옛날 이야기를 꺼내던 막동이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옛 생각에 회한을 느끼며 흐느낀다. 결국 막동이는 자신에게 살인을 지시한 배태곤의 칼에 맞아 숨을 거두고 막동이의 가족들은 그의 소원처럼 버드나무 집에 작은 식당을 차린다.

한석규는 이창동 감독의 차기작인 <박하사탕>에서도 김영호 역에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한석규는 이미 <접속> 장윤현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하기로 계약돼 있어 <박하사탕> 출연을 고사했다다. 한석규가 선택한 영화는 <텔미썸딩>이었고 현재 영화계에서 <박하사탕>과 <텔미썽딩>이 차지하는 위치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다. 과연 한석규가 당시 <박하사탕>을 선택했다면 한석규와 설결구의 운명은 또 어떻게 달라졌을까. 

송강호-정진영을 발굴한 이창동의 안목
 
 송강호는 <초록물고기>의 판수 역을 통해 관객들로부터 '진짜 건달을 섭외한 거 아닌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송강호는 <초록물고기>의 판수 역을 통해 관객들로부터 '진짜 건달을 섭외한 거 아닌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 시네마 서비스

 
혹자는 이창동 감독의 가장 뛰어난 능력은 바로 좋은 배우들을 발굴하는 눈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창동 감독은 역할에 적합한 배우를 고르는 감독으로 정평이 나 있고 이 때문에 단역이라도 까다롭고 꼼꼼하게 오디션을 보는 감독이다. 특히 지나치게 외모가 뛰어나거나 특징이 강한 배우보다는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스타일의 배우를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초록물고기>를 통해 발굴한 대표적인 배우가 바로 송강호와 정진영이다.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 영화 출연의 전부였던 연극배우 송강호는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와 사사건건 부딪히는 비중 있는 조연 판수를 연기했다. 이창동 감독은 송강호가 출연한 연극 <비언소>를 본 후 직접 그를 캐스팅했을 정도로 일찌감치 송강호의 재능을 알아봤다. <초록물고기>에서 배태곤을 배신하는 판수를 실감나게 연기한 송강호의 차후 행보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대학 시절 연극무대에 서며 연기를 시작한 정진영은 사실 연기보다는 연출에 욕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초록물고기>의 연출부로 합류한 정진영은 이창동 감독의 권유에 막동이의 셋째 형을 연기했고 이듬 해 박신양, 전도연 주연의 <약속>에서 엄기탁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며 인생의 진로가 바뀌었다. <초록물고기>에서 뇌물을 받은 경찰차를 쫓으며 거스름돈을 달라고 소리치는 셋째형과 막동이는 영화에서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장면이다.

이 밖에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인희를 연기했던 오지혜는 막동이의 여동생 순옥으로 출연했고 한석규의 매니저이자 친형인 한선규는 막동이의 둘째 형을 연기했다. 이 밖에 훗날 <실미도>로 천만 배우가 되는 정재영이 나이트클럽 취객으로 출연해 한석규에게 두들겨 맞는 연기를 했고 충무로의 대표적인 감초 배우 이문식은 오프닝 기차 장면에서 미애에게 추근대는 불량 청년으로 짧게 등장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초록물고기 이창동 감독 한석규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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