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일 일본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A조 조별리그 한국과 일본의 경기. 한국 김연경(10), 오지영(9) 등이 일본에 승리하며 8강에 진출한 뒤 환호하고 있다. 2021.7.31

31일 일본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도쿄올림픽 여자 배구 A조 조별리그 한국과 일본의 경기. 한국 김연경(10), 오지영(9) 등이 일본에 승리하며 8강에 진출한 뒤 환호하고 있다. 2021.7.31 ⓒ 연합뉴스


여자배구가 한국 구기종목의 자존심을 살렸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이끄는 한국 여자배구팀은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배구 여자 A조 예선 4차전에서 홈팀이자 숙적 일본을 상대로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3-2(25-19, 19-25, 25-22, 15-25, 16-14)로 짜릿한 역전승을 거뒀다.

한국은 세계랭킹이 14위이고 일본은 5위로 전력에서 뒤진다는 평가를 받았던 데다가 상대는 홈팀이었다. 앞서 6월 열린 발리볼네이션스리그(VNL)에서도 일본에 0대3 완패를 당했기에 이번에도 어려운 경기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하지만 한국은 김연경이 무려 30점(공격 성공 27점, 블로킹 3득점), 18디그, 19리시브를 홀로 기록하는 투혼을 발휘했다. 김연경은 개인적 활약은 물론 정신적 지주답게 코트 안에서 끊임없이 동료들과 소통하고 독려하며 팀분위기가 흔들릴때도 자신감을 불어넣어줬다.

양팀은 경기 초반부터 일진일퇴의 공방을 펼쳤다. 가장 백미는 역시 마지막 5세트였다. 접전을 이어가던 한국은 일본에 12-14로 매치포인트 코앞까지 끌려가며 패색이 짙었다.하지만 위기의 순간에 박정아가 또다른 해결사로 나서며 연속 스파이크 득점으로 14-14 듀스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정신적으로 흔들린 일본은 이시카와 마유의 공격이 라인을 벗어나며 한국이 15-14로 역전했다. 기세를 탄 대표팀은 마지막 네트 위 볼싸움에서 박정아가 디시 승부의 마침표를 찍는 득점을 올리며 짜릿한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경기가 끝나고 한국 선수들은 포효했고 동그랗게 모여 8강 진출의 기쁨을 만끽했다.

김연경과 함께 승리의 또다른 주역은 박정아였다. 사실 한국은 경기막판 선수교체 미스로 세터가 2명이 투입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고, 주포 김연경이 후위에 포진하여 가장 중요한 승부처에서 공격력과 높이가 흔들릴수 있는 위기상황이었다. 하지만 박정아가 막판 한국의 4연속 득점중 3점을 책임지는 결정적인 활약으로 팀을 구해냈다. 박정아는 이날 15득점에 블로킹 4개를 기록하며 김연경의 부담을 덜어줬다.

박정아에게는 이번 올림픽, 특히 한일전이 남다른 감회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박정아는 지난 2016 리우 대회에서 불안한 리시브와 기복으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한동안 수많은 팬들의 악플세례에 시달리는 마음고생을 해야했다. 하지만 5년의 시간이 흘러서 더욱 성숙한 선수로 돌아온 박정아는 명실상부한 대표팀의 주역으로 거듭났다. 8강진출의 첫 고비였던 도미니카전에서도 박정아는 경기를 끝내는 마지막 득점을 포함하여 16득점으로 맹활약한 바 있다. 이어 한일전에서의 활약은 박정아가 리우 대회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더 훌륭한 선수로 성장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여자배구대표팀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번 올림픽에 나서야했다. 올해 2월 이재영·다영 쌍둥이 자매가 학창 시절 폭력 문제가 불거지면서 배구계를 바라보는 여론이 싸늘해졌다. 쌍둥이 자매가 대표팀에서도 퇴출되면 라바리니호도 큰 전력약화가 불가피했다. 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전초전 격이었던 네이션스리그에서는 3승 12패로 전체 16개팀중 15위에 그쳤다. 전체적으로 2012 런던이나 2016 리우 대회보다 전력이 약해졌다는 비관적인 평가가 많았다.

주장이자 에이스인 김연경에게 이번 올림픽은 국가대표 선수로서의 마지막 도전으로 여겨졌다. 김연경은 올림픽에 나서며 "우리 팀의 전력이 강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라며 현실을 솔직히 인정했지만, "우리에게는 좋은 팀워크가 있다. 선수들 모두 올림픽에 대한 절실함을 잘 느끼고 있다. 최선을 다하여 높은 곳까지 올라가보겠다"고 선전을 다짐했다. 그리고 김연경의 약속은 빈말이 아니었다.

한국은 첫 경기에서 브라질에 0-3으로 완패하며 불안하게 출발하는 듯 했으나, 이후 케냐-도미니카 공화국을 연파한데 이어 일본까지 잡아내며 3연승을 내달렸다. 한국은 한일전 승리로 3승1패(승점 7점)를 기록하며 남은 세르비아(2일 오전 9시)와의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조4위까지 주어지는 8강 티켓을 예약했다. 도미니카와 일본이 지난 네이션스리그에서 한국이 모두 0-3으로 완패했던 팀이라는 점에서 더 의미있는 복수였다.

한국은 이로서 2012 런던 대회(4강)-2016 리우 대회(8강)에 이어 3회 연속 올림픽 8강이라는 역사를 썼다. 반면 일본은 남은 도미니카공화국과의 최종전에서 최소 승점 3점을 따내야 8강에 진출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몰렸다. 이로서 여자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동메달 이후 45년 만의 올림픽 메달 도전이라는 희망을 이어갈수 있게 됐다. 모두가 이번 올림픽이 어렵다고 예상했을 때, 여자배구대표팀 선수들은 묵묵히 절치부심했고 오직 결과로서 과정을 증명한 것이다.

또한 여자배구의 선전은 자칫 최악의 하루가 될 뻔했던 한국 구기종목의 명예를 지켰다는데도 의미가 크다. 대표적인 인기스포츠로 꼽히는 야구대표팀과 축구대표팀은 같은날 나란히 패전의 멍에를 썼다. 김경문 감독이 이끄는 야구대표팀은 미국과의 경기에서 삼진만 14개를 당하는 졸전 끝에 2-4로 패배하며 조1위에 실패하며 올림픽 2연패에 빨간불이 켜졌다.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은 멕시코와의 8강전에서 역대 올림픽 한 경기 최다실점이라는 흑역사를 경신하여 3-6으로 참패하며 탈락으로 올림픽 여정을 마무리지었다.

여자배구는 자국에서의 인기와 메달 가능성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았던 야구와 축구에 비하여 크게 기대를 받지못했던게 사실이다. 배구팬들에게는 하필 한일전 경기시간이 야구-축구 경기와 겹치며 TV 방송중계에서도 상대적으로 홀대받는 아쉬움을 느껴야했다.

그러나 정작 야구나 축구가 잇달아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주며 '구기종목 최악의 토요일'이 될뻔했던 하루를 여자배구가 한일전 승리로 피날레를 장식하며 고단했던 국민들의 마음을 위로해줬다. 가장 불리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승부를 역전해내는 저력, 끝까지 포기하지않는 여자배구 선수들의 근성은 우리가 태극전사와 스포츠에 기대하는 감동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장면이었다. 여자배구 한일전이 이번 올림픽에서 한국 구기종목이 보여준 최고의 명승부로 두고두고 기억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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